한국에서 지난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벌어졌던 사건과 유사한 일들이 러시아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선거관리위원회 웹사이트의 투표소 데이터베이스(DB)가 해킹당해 이른 아침 투표소를 찾지 못한 젊은 직장인들이 투표를 포기했다. 트위터를 통해 시간별 투표율이 중계되고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늘어나면서 퇴근길 직장인들이 투표소에 몰려들어 무소속 박원순 후보의 당선에 일조했다.
SNS 등 인터넷을 통해 정치의식을 함양한 젊은 정치세대가 등장했다는 점도 한국과 러시아의 공통점이다. 2000년 대통령이 되어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푸틴은 지하자원을 무기로 러시아를 부흥시켰고, 3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에 따라 2008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줬다.
이후 총리를 지내면서 실질적으론 러시아의 1인자 자리를 놓지 않았던 푸틴은 지난 9월 2012년 대선 출마 의사를 밝혔다. 사실상 메드베데프와 총리-대통령직을 맞바꾸는 이런 구상에 러시아의 젊은 세대들은 반감을 표했지만, 이러한 반감이 '표심'으로 직접 노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통합러시아당의 추락한 득표율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이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던 푸틴에게도 위협이 될 전망이다.
러시아의 해킹 피해언론 중 하나인 <뉴타임스>의 편집장 예프게니아 알바츠는 5일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번 하원 선거 결과를 '푸틴에 대한 반대'라고 못 박았다. 러시아의 경제성장을 이끈 푸틴의 공적과 별개로 푸틴식 권위주의로의 회귀에 젊은 세대들은 반감을 표출하고 있고, 공산당 등 여러 야당들은 그러한 '반푸틴 정서'의 수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박원순이라는 단일 후보를 내세웠던 한국 야권과 달리 러시아에서 푸틴에 대항할 호적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의 틀은 갖추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부의 통제와 권위주의가 강한 러시아에서 이런 젊은 세대의 등장은 향후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SNS를 활용해 새로운 정치 혁명을 이뤄낸 중동의 청년 시위대, 경제적 불평등을 지적하며 미국에서 궐기했던 월가 점령 시위대에 이어 러시아의 청년 세대가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지 주목된다.
다음은 알바츠가 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원문 보기)
수백만 명의 러시아인들에 투표는 단순한 반대투표였다
러시아의 하원 선거일이었던 4일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투표소가 열리기 3시간 전인 이른 아침, <뉴타임스> 웹사이트가 정체불명의 해커들에 의해 디도스(DDos) 공격을 받은 뒤 다운됐다.
1시간 뒤 해커들은 라디오 방송 <모스크바의 메아리>의 웹사이트를 공격했고 몇몇 다른 사이트들이 그 뒤를 이었다. "맙소사, 그들(정부 당국)이 얼마나 겁을 먹었으면." 해커들이 모든 자유주의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를 공격했다는 게 명확해질 즈음 날아온 문자 메시지다. 심지어 SNS 사이트 '라이브저널'의 러시아어 게시판까지 공격을 받았을 정도다.
반정부 언론매체를 향한 동시다발 해킹을 아마추어가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해킹에 사용된 기술은 과거 에스토니아공화국이나 조지아(그루지야)의 정부 웹사이트 해킹에 사용됐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러시아 비밀경찰이 아직까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실제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선거에 대한 분노 말이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찍힌 휴대전화 동영상에는 3명의 교사가 투표용지 한 꾸러미에 무더기로 기표하는 장면이 찍혔다. 모스크바에서는 투표자를 버스로 투표소까지 실어 나르는데 학생들이 동원됐다. 바르나울에서는 독립적인 선거감시기구 '골로스'의 감시요원들이 투표소에 들어가지 못했다.
같은 시간 국영 언론과 정부가 통제하는 방송(엄밀히 말하면 러시아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러시아 방송은 없다)은 온화한 옷차림의 유권자들이 그들의 참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방 당국은 이날 특별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이는 "모든 소련 인민들이 함께 소련공산당에 투표했"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1964년부터 1982년까지 집권한 공산당 서기장. 편집자) 시절의 소련이 남긴 고통스러운 잔재다.
그럼에도 러시아 국민들이 이번 선거에서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과 당을 이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블라디미트 푸틴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수백만의 유권자들은 자신의 표를 여당이 아닌 다른 정당에 주고 싶어했다. 그 결과 투표용지의 대량 위조와 철저한 방송 통제에도 불구하고 통합러시아당의 득표율은 2007년 64%에서 50% 밑으로 추락했다.
▲ 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야당 집회에서 한 지지자가 "(그정도 했으면) 충분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피겟에 그려진 곰은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의 상징이다. ⓒAP=연합뉴스 |
물론 3000만 명(거의 유권자의 4분의 1)은 여전히 통합러시아당에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어느 정당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성투표가 아니었다. 반대투표였다. 러시아 지배층에 속한 정체불명의 정부 관료들에 대한 반대일 뿐 아니라 내년 3월 대선에서 3번째 대통령 복귀를 시도할 푸틴에 대한 반대다.
이 새로운 저항의 물결은 결코 야당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던 청년들 사이에 저항이 번지고 있다. 지난 9월 메드베데프와 푸틴이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바꿔먹기로 했을 때 청년들은 불쾌감을 표출했다. 이 세대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는 점을 알았다. 러시아를 떠나거나, 투쟁을 시작하거나.
자신의 블로그 구독자가 6만 명이 넘는 유명 활동가 알렉세이 나발니는 통합러시아당의 의석 독점을 깨트리기 위한 전략을 제안했다. 그가 만든 구호는 재빠르게 저항의 슬로건이 됐다. '사기꾼과 도둑이 모인 정당보다 다른 당에 표를 주자.' '사기꾼과 도둑 정당'이라는 말은 통합러시아당의 관료 출신 백만장자 의원들에게 타격을 줬다.
저항의 목소리는 인터넷을 통해 퍼졌다. 선거감시기구 골로스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선거법) 위반 현황표'을 만들어 시민들이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게 했다. 두 달이 지나자 이 사이트에는 100만 개 이상의 글이 올라왔다. 러시아 당국은 골로스가 외국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골로스의 웹사이트가 해커들에 의해 폐쇄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 당국의 비난, 그리고 <뉴타임스>를 포함한 다른 웹사이트에 대한 해킹은 여당과 러시아 당국이 난처한 지경에 몰렸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들은 인터넷 세대를 두려워해 허둥지둥 오래된 KGB(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식 방법을 이용했다. 폐쇄하고, 위협하고, 금지하기.
그러나 너무 늦었다.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호스니 무바라크, 그리고 무아마르 카다피가 너무 늦었던 것처럼. 만약 푸틴이 이 노쇠한 동지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면, 그는 지난 4일 러시아의 청년들이 그에게 한 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녯(nyet,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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