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와 민족주의
근대국가가 민족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대표적인 사람의 하나가 1982년에 대표작인 <민족주의와 국가>를 낸 존 브릴리이다. 그는 민족주의를 발전시킨 요인으로 산업화나 자본주의보다 근대국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와 근대국가체제의 문맥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행위의 특히 적절한 형태로 가장 잘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는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를 집합적 노동분업으로부터 기능적 노동분업으로의 이행에서 찾는다. 즉 대부분 개인들의 경제, 정치, 문화적 요구와 이해관계가 단일한 집합적 조직에 의해 충족되는 형태(길드, 종교교단, 농민들의 공동체)로부터 그 목적이 점차 분화되고 기능적으로 특화된 조직(노조, 정당, 대학 등)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관료주의적, 기능적으로 분화된 대규모적 국가의 우산 밑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능적 전문화의 과정은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에 의존한다. 즉 '공공적' 힘이 전문화된 국가기구(의회, 관료제)에 집중된 반면, 많은 사적인 힘들은 비정치적 기구들(자유시장, 사기업, 가족 등)에 남겨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공적 영역으로서의 국가와 사적인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가 분리되며 민족주의는 사적인 영역에 있는 주민들을 보다 폭넓고 단일화된 주권국가와 결합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위로부터, 또 아래로부터 함께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19세기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영국 사회학자인 앤소니 기든스도 1990년의 <근대성의 결과>에서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국가의 독특한 자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도 근대사회를 그 이전 사회와 구분하고 있는데 이 구분의 주된 기준은 계급체제의 성격이다.
전근대사회는 계급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그것은 사회집단들 사이의 불평등한 경제관계가 유지되도록 보증하기 위해 강제를 포함한 정치적 수단에 의존해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의 계급사회에서는 착취와 불평등이 노동계약과 경영체제에 의해 보다 직접적으로 경제관계 위에 성립한다. 따라서 근대국가는 구조적으로 경제문제와 분리되어 정치와 행정 문제에 배타적으로 집중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주의는 국가 행위의 범위가 확대되고 그것이 시공간에 걸쳐 관계를 통합할 능력을 증가시키는 과정에서 근대국가와 함께 성장한다고 믿었다. 민족주의가 근대국가 안에서 개인을, 정치질서의 구성원들 사이에서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상징이나 신념과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성은, 과거의 혈연이 강조되는 부족주의와 관련되는 공동체성보다는 범위나 깊이에서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소집단에 대한 헌신을 넘어서서, 또 특정한 지리적 장소나 공동체와 관련된 지역주의를 넘어서서 보다 포용적인 정체성의 감각을 구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기든스에게 있어 민족주의는 국가가 주권적 영토에 대한 통일된 행정적 통제를 달성했을 때만 존재하게 된다. 그 전에는 국가가 자신의 영토에 대해 불균등하고 불연속적인 지배를 했고 그 통치는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근대국가의 행정과 감시를 통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지역적, 종교적, 가족적 정체성을 넘어서서 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1986년에 <사회적 힘의 근원>이라는 책을 낸 마이클 만도 비슷하다. 그도 민족주의를 주로 근대국가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그리고 거기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을 강조한다. 민족주의가 발전하는 데에는 몇 세기가 걸렸는데 유럽에서의 그 핵심적인 발전은 대규모의 전쟁들을 통해 18세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규모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과세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여 군비를 갖추고 징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주의 발전의 원인을 자본주의나 산업화와 관련시키지 않고 지정학적인 경쟁이나 갈등에서 찾는다.
그는 민족도 그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위해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19, 20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 구성원은 누구나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므로 민족은 그 구성원들이 같은 자격을 갖는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도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 충동을 갖는다고 믿는다.
당연히 그는 민족을 종족적으로나 인종적으로는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은 같은 피나 종족에서 나오지는 않으며 그 혈연적인 역사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민족-국가들이 종족적 집단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모든 성인(成人)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첫 국가인 시민-국가라고 생각한다. 그가 머릿속에서 매우 근대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은 기본적으로 근대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유럽의 국가형성 과정을 주로 연구해 온 찰스 틸리도 기본적으로는 만과 비슷하나 약간 다른 생각을 보여준다. 그가 편집한 <서유럽 민족국가의 형성>에서 그는 민족국가가 서유럽 많은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특히 군사적 경쟁 가운데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장기적 과정에서 상비군의 형성이 가장 큰 단일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상비군제도로의 이행이나 팽창은 자연히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짜내려는 새로운 노력을 만들어내고 백성들은 이에 저항하게 된다. 국가가 여기에 맞서기 위해 관료제나 행정혁신을 하며 강제력이 커지고 이에 따라 국가의 착취량이 장기적으로 증대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역사 발전에 있어서의 그 리듬을 3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1500-1700년의 시기로 상업적, 군사적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의 큰 민족국가들이 형성되고 공고화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그 국가들이 유럽의 다른 지역들이나 유럽 외부의 일부 중요한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두 번째는, 1650-1850년의 시기로 이 때는 유럽의 다른 지역들도 유럽의 국제체제에 편입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중국이나 일본 같이 상당하게 정치적 조직화가 이루어진 지역을 제외하고는 비 유럽지역 대부분에 대한 유럽의 정치적 통제가 확대되었다.
세 번째는 1800-1950년의 시기로 식민지나 보호령의 독립을 통해, 또 일본이나 중국 같은 나라들이 국제체제 안에 편입됨으로써 민족국가들의 국제체제가 비유럽지역으로도 확대된 시기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는 19세기 이전에는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전쟁 속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18세기까지의 것은 그 이후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점에서 그도 만과 같이 민족주의를 국가 사이의 경쟁의 산물로 보기는 하나 대체로 19세기 이후의 산물로 보고 있다.
네 사람은 근대국가와 민족주의를 연결시키는 점에서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는 있다. 브릴리와 기든스는 근대적인 영토국가의 발전과 함께 그 주민에 대한 행정적 통제가 달성되며 민족주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반면 만과 틸리는 주로 외부적인 면에서 접근한다. 근대 초 이후 국가 사이의 경쟁과 전쟁이 군사력을 위한 조세수취를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근대국가가 발전하며 민족과 민족주의는 그 산물이라는 것이다. 틸리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역사적으로 접근하고 있고 그래서 1500년을 그 기점으로 삼으나 그에게도 19세기 이전의 과정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근대국가에서 민족주의의 근원을 찾는 사람들도 전적으로 근대적인 현상에서 민족주의의 근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산업화나 자본주의에서 그것을 찾는 사람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근대주의의 맹점과 종족성의 문제
위에서 보았듯이 근대주의자들은 산업화, 자본주의, 근대국가가 민족주의를 형성시킨 구조적 요인이라고 본다. 얼핏 보면 그럴듯하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민족주의는 전근대에는 당연히 불가능한 현상이다.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날카롭게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허점투성이이다. 자기들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복잡한 이론들을 내세우나 그 역사적 기초가 부실하다. 이론들이 역사적 현실과 잘 아귀가 맞지 않는다. 전근대시기의 변화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많은 경우 역사가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경시한다.
민족주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산업화, 자본주의와 별 상관없던 시기이다.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국,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두 나라 사이의 경쟁의 결과이다. 영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네덜란드 민족주의는 신성로마제국의 억압에 대한 반동이다.
근대민족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프랑스혁명 시기의 민족주의조차 산업화, 자본주의와는 별 관계가 없으며 국내외적인 적에 대항하는 가운데 발전했다. 나폴레옹의 정복에 대항하여 등장한 독일, 스페인, 러시아, 이탈리아의 민족주의가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세기 후반의 동유럽민족주의, 20세기의 식민지지역 민족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네언의 불균등발전 테제는 19세기 후반이후 피억압 민족들의 민족주의를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 적용이 가능하다.
그래도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만과 틸리의 주장이다. 이웃나라와의 경쟁이나 전쟁을 위한 국가의 통제력 강화가 민족형성이나 민족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만은 그 시기를 너무 뒤로 잡고 있으며, 틸리는 1500년 정도까지 소급하면서도 전근대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렇게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전적으로 근대적 현상과 결부시킨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민족을 만들어낸 그런 현상들이 사라지면 민족주의나 민족도 당연히 쇠퇴내지 소멸한다고 생각한다. 홉스봄이 대표하는 민족주의 소멸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근대주의자들이 별로 고려하지 않으나 사실상 민족주의 이해에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종족성의 문제이다. 근대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전근대의 영역으로 보았으므로 거의 다루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합리화된 시민사회인 근대사회와는 관계없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검토하지 않으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는 반쪽짜리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종족성의 문제를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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