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걱정은 밖에 있다. 한미FTA 비준을 놓고 홍역을 치르는 동안 밖으로는 'FTA의 네트워크화'란 새로운 현실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등은 자국을 중심으로 한 다자 네트워크를 전략적으로 짜나가며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FTA를 많이 맺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구와 어떤 조건의 FTA를 맺는지, 또한 그것이 지구적·지역적 FTA 네트워크 구조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다.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 한미FTA 비준은 오히려 우리에게 전략적 고민과 복잡한 계산을 던져주고 있다.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숨가쁘게 돌아가는 밖의 판세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사태는 지난 12일 일본이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 교섭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본격화되었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고령화에 따른 생산성의 저하와 산업공동화, 엔고로 고전하고 있는 일본경제에 대한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TPP 가입을 주장했다. 그는 과거 메이지유신이 제1의 개국, 1945년 패전후 경제재건이 제2의 개국이라면 이번 TPP는 제3의 개국에 해당한다며 비장함까지 내보였다.
▲ 지난 19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 이명박 대통령(왼쪽부터) ⓒAP=연합뉴스 |
미국의 새로운 아·태 경제질서, TPP
TPP는 싱가포르, 브루나이, 뉴질랜드, 칠레 등 소국간 FTA에 호주와 미국이 뛰어든 후 페루, 베트남, 말레이시아를 끌어들여 덩치를 키우고 있는 다자무역협정이다. 하와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수출을 배가하여 국내 일자리를 창출할 핵심 수단으로 TPP를 강조한 바 있다. 이를 확장하여 종국적으로는 아시아-태평양FTA(FTAAP)를 완성하고자 한다.
TPP는 미국의 이익이 강하게 담겨 있는 만큼 고수준 개방을 지향하는 이른바 '21세기 협정'이다. 상품무역 전분야의 개방을 견지하고 있어 농수산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또한 한미 FTA처럼 사회제도와 규제시스템의 포괄적 개혁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경제적 측면과 함께 TPP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도 포함한다. 일년전 필자가 지적했듯이 TPP는 미국의 지역 아키텍처(regional architecture)의 핵심수단이다('일본외교의 딜레마, 남의 일 아니다', 창비주간논평 2010.11.10). 작년 1월 이래 수차례의 연설을 통해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물리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가운데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역 아키텍처란 개념을 활용하여 지역질서를 재건축하고자 노력해왔다. 날로 커가는 중국을 미국이 설계한 건축물에 끌어들여 관여와 견제의 복합네트워크로 얽어매려는 시도다.
여기서 두 기둥은 동맹과 FTA다. 기존의 군사동맹 네트워크로 팽창하는 중국의 군사력을 억지하는 한편,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동아시아경제가 중국 중심으로 통합되는 추세를 견제하기 위해 태평양의 남쪽 주위를 엮고 동북아의 일본으로까지 FTA네트워크를 확장하여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산을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태평양 순방의 첫 기착지인 하와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일본과 캐나다, 멕시코를 TPP 교섭상대로 끌어들여 덩치를 키웠고, 환율 문제와 중국의 시장개방을 겨냥하며 규제개혁을 강조했다. 호주 방문에서는 호주를 지구적 동맹국으로 치켜세우면서 동중국해 해상로를 지키기 위해 호주 다윈에 2500명 병력 규모의 미 해병대 기지를 설치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곧이어 인도네시아 발리로 넘어간 그는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여 급속히 해군력을 확장하는 중국에 견제구를 날렸다.
반격에 나선 중국의 동아시아FTA 구상
경제와 안보 양면에서의 미국 공세에 중국은 단단히 맞서고 있다. 미국이 문제제기하는 '위안화 환율조작'은 보편논리가 아닌 패권국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며 미국 중심 금융질서의 정당성을 문제 삼았으며, 남중국해 문제는 중국과 아세안(ASEAN)국가 간의 문제이므로 미국이 개입할 수 없다고 강력히 저항했다.
TPP가 오바마의 대선용 정치슬로건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중국은 아시아 국가들만의, 그리고 아시아의 형편에 맞는 FTA네트워크를 띄우고 있다. 당장 지난 19일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한중일FTA 산·관·학 공동연구를 연내 종료하고 조기에 교섭을 개시할 수 있도록 합의를 종용하는 한편, 아세안국가들과의 협조하에 광역 동아시아FTA를 주창하며 반격에 나섰다.
그렇다면 일본은 과연 판세에 대한 복잡한 수읽기를 마치고 나온 것인가. 노다 총리의 지시하에 집권 민주당의원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이 TPP 교섭 참여에 대해 "신중히 판단할 것을 제언한다"라며 최종 결정을 총리에게 떠넘긴 것을 보면 일본이 전략적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설익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팀이 합의를 이루지 못한 이면에는 다양한 반대논리가 있다. 우선 농업부문은 TPP에 강력히 저항하고 있다. 제도개혁이 미국식 제도로의 수렴을 가져올 것이란 비판론, 이미 10회에 걸쳐 교섭이 진행되어 기본틀이 짜여진 상태에서 뒤늦게 들어갈 경우 국익을 지킬 수 없을 것이란 비관론, 차라리 원점에서 미일FTA를 추진하자는 대안론, 일본의 최대 무역상대국인 중국을 견제하는 FTA네트워크는 국익에 반한다는 유보론 등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정무조사회장은 교섭 참여 후 일본의 국익을 해치는 경우 탈퇴할 수 있음을 내비칠 만큼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다.
이제 일본은 TPP 교섭을 놓고 안으로는 견고하지 못한 국내적 지지기반과 취약한 리더십을 극복하고, 밖으로는 교섭 중간에 뒤늦게 참여하여 다자적 압력을 받는 상황을 견뎌내야 하는 험난한 양면협상을 이끌고 가야 한다. 또한 지역 아키텍처를 둘러싼 미중 사이의 고도의 전략적 수싸움을 읽으며 그에 걸맞은 복합연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일본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고 그 앞날은 불투명하다.
한미FTA 비준, 떠밀려오는 과제들
한국은 곧 일본 못지않은 고민을 안게 될 것이다. 당장 중국은 한중일FTA의 조속한 교섭을 재촉하고 있어 내년에는 결정을 내려야 할 처지다. 더 큰 문제는 이제 한미FTA 비준으로 중국이 한중FTA 교섭을 강력히 촉구할 것이란 점이다. 일본도 한일FTA 협상 재개를 요청할 것이고 TPP 사안도 재부상할 것이다. 작년 APEC에서 미국은 한국의 TPP 참여를 권유한 바 있다.
초대가 많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중-대만(ECFA), 한중, 한중일, 동아시아 FTA로 엮이는 중국 주도의 네트워크와 TPP 및 한미FTA로 짜이는 미국 주도의 네트워크 사이에서 한국은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섣불리 양자를 동시에 택할 경우 엄청난 경제적·사회적 조정비용을 지불할 수 있고, 마냥 머뭇거리게 되면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한국은 일본의 5분의 1 정도 덩치에다 무역의존도가 100%를 상회하여 대외적으로 대단히 취약한 경제구조를 갖고 있어 일본에 비해 정책적 실기(失機)나 수순 착오를 범할 여유가 없다. 이제 FTA전략은 경제영토(수출시장)를 넓힌다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경제와 안보의 연계를 파악하는 전략적 사고, 미중간 경쟁을 완화시키는 중개자적 사고, 일자리 창출과 소득격차 축소를 동시에 고려하는 균형적 사고를 담은 복합전략으로 새롭게 접근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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