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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나간다"

[기고] 2010년 경인년을 보내며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지나간다. 생각도 사상도 주의 주장도 다 변하기 마련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진실뿐이다.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생물들은 아무리 크고 높고 세다고 해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히 활개를 칠 것같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왕후장상(王侯將相)도,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를 쌓아 올린 천하의 갑부(甲富)들도 다 지나간다. 그래서 장자(莊子)가 일찌기 말했고 이태백이 노래했다. "천지(天地, 세상)는 만물의 역려(逆旅, 주막)요, 광음(光陰, 세월)은 백세의 과객(過客, 손님)이다. 부생(浮生, 뜬구름 같은 인생)은 꿈과 같도다.…"라고.

동화 속의 이야기 이지만, 옛날 어느 임금님은 특별한 신하를 두었는데 그의 임무는 임금이 깨어날 때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임금님께서는 죽습니다."라고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죽음은 누구든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음을 하루 두 번씩 일깨우는 역할이 그의 임무이었다. 그 임금님은 태평성대를 이루고 성군(聖君)으로 추앙되었다. 오늘날 임기제인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는 이같은 특별한 임무를 띤 신하를 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 최고통치권자에게 매일 아침, "OOO님, 임기는 몇 년 몇 개월, 며칠이 남았습니다."라고 고하도록 할 일이다. 그래야 시체말로 '있을 때 잘 하여' 그만 두었을 때 무사 할 것이 아닌가!

▲ 김성훈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
충북 민예총 이철수 회장과 문화예술인들은 기축년(己丑年) 설날 아침 조령산에 올라 고천문(告天文)을 바치었다. "오늘 우리는 천하의 과객으로 여기 서 있다.… 고락의 바뀜이 아침이슬 같고, 겨울 북풍설한이 길지 않음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새해 새 세상에는 더러움과 헛된 집착과 간교함과 무지함과 비열함과 탐욕과 패권의 제국(帝國)을 북풍이 쓸어가 버리고 진실과 사랑과 평등과 믿음과 착함과 다정다감함과 평화의 아름다움이 저 눈밭처럼 찬란하기를… "빌고 빈다. 그리고 "분단 조국을 애서러워하는 만큼 통일을 위한 진심의 원력(願力)을 세워서, 새해의 제단에 바치노라. 신자유주의 망령이 FTA로 횡행하는 이 천지의 사악한 기운을 조령산맥의 정기로 물리치리라. 놀치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난무하는 세계체제(WTO)의 험악한 세상에서도 따스한 인정과 가슴 일렁이는 예술로 이 한해 역시 광영(光榮)이 가득하리라.…"고 천제께 고하였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에 있어서 지위고하나 나이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 나름의 감회가 있고 각오와 결의를 새로이 다듬는다.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의 민초들은 지금 이 순간 한반도에 또다시 민족상잔의 피비린내가 없고 평화가 깃들기만을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고 있을 것이다. 서해안에서 비명에 간 젊은 영혼들이 안식처를 찾지 못해 구천에 떠돌고 있지 않을까 걱정한다. 농사를 천직으로 삼고 생명산업분야에 종사해 온 농업인들에게 지난 한해는 참으로 서글프고 좌절된 시간이 길고 길었다. 폭풍이 몰아치듯 무관세(無關稅)의 자유무역협정 FTA들이 연달아 체결되고 외국 농산물이 홍수처럼 밀려드는데, 쥐꼬리만한 논농업 직불금마저 도시 공직자와 땅 투기꾼들에게 가로채이고 쌀값은 폭락하고 배추 무 등 여름채소는 죄다 비가 쓸어 갔으며 통치권자의 무관심하에 구제역이 전국에 창궐, 30여만 마리의 생축들을 동토에 묻어야 했다. 살길이 막막한 농민들이 부지기수이다. 전국의 노동자들의 삶 역시 팍팍하고 불안정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삶과 일터에서 생명의 끈을 놓은 민초들의 비참함이야 필설로 달래길 없다.

그런데도 전국 방방곡곡은 무슨 개발, 무슨 살리기 사업이 불도자 소리와 삽질로 산과 하천이 잘려나가고 논밭이 뒤엎어지고 있다. 자연산천을 살리기인지 죽이기인지 분간하지 못할 대규모 개발계획들이 요란하게 5천년 민족의 생명줄 곳간을 시나브로 절단내고 있다. 이상기후로 지구촌이 바야흐로 2-3년 빈도의 애그플레이션(Ag-flation) 현상으로 식량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세계 최하위 26%로 낮아지고 있어도 아무도 경각심을 보이지 않는다. 결식아동, 노약자, 농민, 노동자, 중소상공인 등 약한 사람을 위한 정책은 보이지 않고 비지네스 프랜드리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깃발만 요란하게 나부낄 뿐이다. 아둔한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정책들과 사업들이 하마처럼 국민세금을 퍼 삼키며 전개되고 있다. 아,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무슨 재미이던가?

사람은 본디 자연의 일부이다. 잘나고 힘세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과학기술과 상업적 셈법을 교묘히 써서 자연을 강제적으로 정복하고 자신의 명리(名利)만을 추구한다면 말 못하는 자연은 참고만 견딜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나라에서 과도한 도시 산업개발과 막개발 난개발들로 자연의 보복, 하늘의 재앙(災殃)을 불러들이고 있지 않은가. 세계 으뜸의 환경오염, 생태계의 불균형, 동식물의 멸종, 수자원의 오염, 거기에 전쟁위험까지 이 모두가 생명과 자연을 경시하는 우리 현대정치문명의 부정적인 후과(後果)들이다. 생명을 천시하고 환경생태계를 방기하는 그런 사회는 장차 자연의 보복에 시달릴 것이고 그런 정권, 그런 지도자는 결국 국민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죄악을 범하게 된다. 최소한 쓸모없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일방적 개발주의, 맹목적 자유무역주의 보다 훨씬 더 낫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현대 중국인의 구원(久遠)의 정신지도자 지센린(季羡林) 전 북경대 부총장은 아흔일곱이 되던 해에 수필집을 내놓아 전세계 지성인들을 감동시켰다. 이름하여 "다 지나간다.(허유영 옮김, 추수밭, 2008)"이다. 무릇 '천지란 만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고, 세월이란 끝없이 뒤를 이어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다.' 유수(流水)같이 흐르는 세월이 서글펐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장자의 말처럼 나쁜 것들도 다 그러할 것 같아 애달프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니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지도층들이 새해부터서라도 조금 더 고상하게, 조금 덜 거칠게, 또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덜 데면데면하게 살았으면 한다. 비록 힘없고 노쇠한 민초이지만 지센린 선생으로부터 배운 덕담으로 올해 마지막 송구영신(送舊迎新)을 갈무리 하고 싶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가야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여야만 한다면, 울고 버티고 저항해 봐야 탐욕에 눈이 어둔 그들이 꼼짝이나 할까. 차라리 웃으며 빨리 지나가도록 바라는 것이 천리(天理)가 아니던가! 민초들의 삶에 혹독한 겨울이 깊어질수록 부디 얼어 죽지 말고, 따뜻한 봄이 찾아 올 때까지는 고슴도치들처럼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데우고 시레기로라도 어떻게든 이 겨울을 넘기고 볼일이다. 만사가 "다 지나간다!"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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