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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요시히코 신임 일본 총리의 선택은?

[中國探究] 일본 정국의 혼란과 중일관계의 변화

일본 정국이 혼란스럽다. 총리가 바뀌었다. 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는 일본정부는 2년이 채 되지 않아 이미 총리가 3번 교체되었다. 8월 26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2010년 6월 4일 민주당의 초대 총리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재임 9개월 반)를 이은 간 나오토 총리가 15개월의 임기를 끝으로 하야하고 말았다. 8월 30일 오후 일본 중의원은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를 일본 정부의 신임총리로 선출했다. 민주당이 추천한 세 번째 총리다.

일본 정국의 혼란은 국내적으로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영향력이 크지만 외교 정책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크다. 왜냐하면 총리 교체로 이어지는 내각의 각부 장관의 빈번한 교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집권 이념과 품격이 달라지고 기존 정책에 대한 이해의 부족, 그리고 대내 업무 방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 더욱이 외교경험과 인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소수 정치파벌과 정치인들이 외교 권력과 핫이슈에 대해 지나치게 인기영합주의를 통해 지명도를 올리려고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본 정국의 혼란은 당연히 중일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변화는 양국관계를 촉진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퇴보시키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간 나오토 내각 시기 일본정국의 혼란은 중일관계에 비교적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경우가 많았다.

▲ 지난 2일 제95대 일본 총리에 취임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AP=연합뉴스

사실 지난 30년 동안 일본과 중국은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중국정부와 민중들은 간 나오토 내각에 대해서 중일관계가 크게 발전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간 나오토 총리에게는 재임 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도 2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일본 참의원의 중간 선거에서의 승리였다.

그러나 2010년 7월 11일 일본 참의원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집권연맹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민주당집권연맹은 설상가상으로 의회에서 의석을 늘리지 못하였고 참의원 의석 중 전체 110석만을 획득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야당의 의석수는 132석에 달하였다. 야당의 의석이 집권당을 추월하자 여야가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왜곡된 상황'을 형성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민주당 내에서는 혼란이 나타났다. 결국 이 선거는 민주당 내부의 갈등을 노출하고 말았다. 민주당내 최대 실력자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면서 간 나오토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간 나오토 총리는 결코 사직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선거 실패에 대한 책임을 깊이 있게 검토했다. 그러나 당내의 갈등을 조정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올 9월에 거행되는 민주당 당수 선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내의 갈등을 완화할 수 없었고 총리 스스로 지도력의 약화로 연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로 인해 여론의 지지도가 크게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간 나오토 내각의 소수 신우파는 외교정책상에 있어서 어느 정도 강경한 정책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총리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2010년 9월 7일 다오위다오(釣魚島) 해역에서 일본해상보안청의 순시선이 중국어선과 충돌하고 중국어민을 구류하는 충돌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발생한 뒤 중국정부와 국민들의 크게 반발하였다. 중국정부는 강력한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일련의 반일본 조치들을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크게 힘을 발휘하였다. 일본정부는 부득불 선박과 선원을 석방하였고 사태가 진정되었다.

그러나 간 나오토 내각의 이러한 사건은 중일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 타격의 정도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내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보다 컸다. 그러나 간 나오토 내각의 중일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는 민주당과 일본 우익의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2010년 9월 1일 간 나오토가 민주당 당수 선거에서 오자와 세이지로 전 간사장의 격파하고 연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중일관계는 최악으로 추락하였고 아울러 일본의 국가이익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 국내의 많은 이들이 간 나오토 총리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간 나오토 내각의 외교문제에 대한 도발은 그의 지도자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오위다오(釣魚島)가 중국으로 귀속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반파시스트 진영의 승리의 정의로운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에 도전하는 것은 국제관계의 연쇄적인 반응을 가져오게 되었다.

2010년 11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대통령은 역사상 최초로 남쿠릴열도를 시찰했다. 이후 러시아 측은 여러 명의 고위관료들도 이 섬을 시찰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일본 정계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일본정부 요인들은 항의활동을 계속하였다. 2011년 2월 중순 일본 외상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은 특별히 러시아를 방문하여 교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본국 대통령이 자신들의 영토를 방문한 것은 불변의 진리이며 러시아가 장차 남쿠릴열도의 대규모적인 개발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국제합작으로 기업을 유치하고 동시에 기동미사일여단을 이 지역에 조준하여 방위를 증강할 계획임을 밝혔다.

러시아의 단호한 입장 앞에 간 나오토 내각은 이상하리만큼 피동적이었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원래는 외교적인 사건을 만들어 국민의 지지율의 상승을 꾀했으나 결과는 그 반대가 되고 말았다. 2월 11일 일본 교토통신사의 여론조사에서 간 나오토 내각의 여론 지지율이 처음으로 19.9%나 떨어지고 말았다.

중일관계와 러일, 한일관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3월 11일 리히터 9.0 규모의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였고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을 휩쓸었다. 이러한 대재난으로 거의 3만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1923년 동경대지진 이후 최악의 천재지변이었다. 이러한 천재지변은 더욱 무서운 상황을 노출했다. 바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선 누출에 따른 위기였다. 동일본대지진이 대재난으로 바뀐 것이었다. 평면적인 재해에서 입체적인 재해로 발전하였다. 재해의 피해지역이 일본을 넘어서 전체 태평양 연안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

2011년 '3.11대재난'이 발생한 이후 중국정부와 국민들은 가장 신속하게 일본정부와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긴급원조를 보내주었다.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는 중국주재 일본 대사관을 방문하여 일본 지진 사망자들에게 조의를 표하였다. 그는 중국재난구조대를 즉시 일본의 재난 지역으로 급파하였다. 중국기업들은 일본에게 특수한 구호장비를 보내고 각계 민중들의 모금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중국 언론 매체들은 '3.11대재난'에 대해 폭넓은 보도를 하였다. 중국정부와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 위로와 동정의 정을 표현하였다.(필자는 3일간 중국CCTV 뉴스 채널에서 '3.11대재난'에 대한 직접적인 평론을 하였다) 재난에 직면하여 중국정부와 국민들의 인도주의적인 태도는 일본정부와 국민들로부터 감사와 호평을 받았다. 이후 중일관계는 점차 회복되었고 아울러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혼란한 정국은 다시 한번 일본외교와 중일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11대재난'으로 잠시 휴전을 하고 있던 일본 정계 내부의 투쟁이 다시 나타났다. 5월말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야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은 공동으로 중의원에서 간 나오토 내각 불신임안을 제기하였다. 중의원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은 다수의석이 아니었다. 결국 불심임안의 처리여부는 민주당 내의 각 파벌간의 입장에 달려 있었다.

간 나오토 총리는 긴급하게 위기 팀을 가동하여 6월 2일 오전 하토야마 전 총리와 회담을 갖고 합의를 이루었다. 오후에는 민주당의 대부분 의원들이 투표에서 불신임안을 부결시키기로 의원 간에 양해를 얻어냈다.(오자와파의 일부 의원들은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간 나오토 내각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소위 '화와 복은 함께 다닌다'라는 것처럼 잠시 화살을 피한 간 나오토 총리는 자신의 계략이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2일 저녁, 그리고 다음날 그는 내각의 사임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을 묻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2012년 1월까지 총리를 담임하겠다는 점을 암시했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일본 정계는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쳤다. 방금 전까지 간 나오토 총리를 지지하여 위험을 넘어가게 했던 하토야마 전 총리는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바로 "만약 그가 의원 간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 밖의 각 당도 간 나오토 내각이 이미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빠른 시간 내에 하야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많은 압력 하에 간 나오토 총리와 그의 측근들은 부득이 최대한 빨리 7월 안에 사임하겠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 나오토 총리는 관직에 연연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8월 6일에 이르러 재차 총리 연임을 위한 전략을 추구하였다. 간 총리는 직접 민주당 고위지도자들과 자신의 사임조건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편으로 야당과 거래를 추진하였다. 9일 민주, 자민, 공명 3당 간사장은 간 나오토 사임 조건의 하나인 '공채발행특례법안'을 통과시키고 다시 한번 고등학교 학비에 대한 실질적인 무상 및 농업가구 소득보상제도 등의 문제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자민과 공명 양당은 이번 국회의 본 회기 내에 이 법안을 통과 시키려고 했다. 간 나오토 총리의 사임의 또 다른 조건인 '재생에너지특별조치법안'에 대해서도 본 회기 내에 통과할 수 있었다. 10일 간 나오토 총리는 중의원재무금융위원회에서 분명하게 8월 내에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반년동안 간 나오토 내각은 기본적으로 재난과 내부 갈등에 대응하느라 골몰했다. 또한 주목할 것은 간 나오토 총리가 최근 5명의 총리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과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던 총리이었다. 간 나오토 내각의 15개월 동안 3명의 외무상[오카다 가스야(岡田克也),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마쓰모토 다케아키(松本剛明)]을 교체하였다. 중일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음에도 일본 측은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간 나오토 내각의 퇴진은 여론의 관심이 곧 바로 노다 요시히코 신임 총리에게 집중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중의원은 8월 30일 오후 민주당의 신임 당수로 노다 요시히코를 선출하였고 그는 일본 정부의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노다 요시히코가 신임 총리에 당선된 것에 대해 세계의 많은 매체들은 그를 '다크호스'로 묘사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일본 민주당이 집권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에 이미 3명의 총리를 교체하였다. 그리고 노다 요시히코가 일본 여론이 비교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은 그가 간 나오토 내각의 재무상을 맡은 이후였다. 그리고 민주당 내의 비교적 지명도가 높고, 인기가 좋고 자격을 잘 갖춘 의원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출마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를 일본의 신임총리로 선택한 것은 확실히 의외의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다크호스'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왜 대파벌의 배경도 없고, 한편 뛰어난 정치적 업적도 없는 노다 요시히코를 일본정부의 신임 총리로 선출했을까?

먼저 일본 민주당 내의 현실상황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집권 2년 동안 내정과 외교에 아무런 업적이 없다. 경제도 호전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3.11대재난'의 타격 하에 오히려 하강하는 추세다. 7월 일본의 실업률은 4.7%에 달하고 있다. 8월 일본의 주식시장은 9000포인트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이는 냉전이후(1991년 이후 20년) 주식 시장의 최저점이다. 30일 일본정부 관방성의 발표에 따르면 8월의 일본국제 무역수지는 역조다(국제무역은 일본 경제의 주요 지주 가운데 하나이다).

2009년 9월 민주당은 자유민주당의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어받았으나 그 결과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오히려 더욱 크게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적 업적은 민주당 내의 지명도가 높고, 오랜 경력을 갖고 있는 의원인 오카다 가스야(岡田克也),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등이 경선이 참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민주당 내의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를 제외하고는 보편적으로 지명도가 별로 없는 인물들이 경선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둘째, 일본민주당 내 파벌의 역학관계의 결과이다. 업적은 화려하지 않지만 총리의 자리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총리가 되기 위해 기회를 엿본다. 6월초부터 간 나오토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이후부터 막후에는 거래가 시작되었다.

8월 26일 간 나오토 총리가 정식 사의를 표명하자 민주당 내에는 5명이 출마하여 경선이 이루어졌다. 이 5명 가운데 가이에다 반리(海江田萬里)는 비주류파가 지지하였고, 그 밖의 4명은 모류가 주류파에 속하였다. 이번 당내 민주선거는 주류파가 두번째로 비주류파에 승리한 것이었다.

민주당내에는 다양한 파벌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파와 비주류파가 고정불변은 아니다. 제1차 하토야마내각이 정권을 획득했을 초반에는 당시 민주당 내각은 상대적으로 단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간 나오토가 총리가 되고 이후 총리의 능력의 한계로 2010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당내 최대 파벌인 오자와파가 간 나오토를 압박하였다. 9월 중순 거행된 민주당 당수 선거에서 반오자와파가 연합하여 간 나오토가 당수를 연임하였지만 최대 파벌인 오자와파와 그를 지지했던 하토야마파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따라서 반오자와파의 연합이 주류파가 되고 오자와파와 하토야마파가 비주류가 되었다.

이번의 당수 선거에서 재차 대결을 벌여 일차 투표에서 비주류가 지지한 가이에다 반리(海江田萬里) 143표, 주류파가 지지한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74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102표, 마부치 스미오(馬淵澄夫) 24표, 가노 미치히코(鹿野道彦), 52표로 1차 투표에서 누구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득표에서 최다투표를 획득한 가이에다 반리가 2차 대결을 벌여 주류파 내의 오자와파가 사전계획에 따라 노다 요시히코에게 215표를 몰아주어, 177표를 얻는데 그친 가이에다 반리를 침몰시켰다. 일본정치사에서 1972년 이래 계속되는 2위가 1위를 이기는 현상이 재출현하였다.

셋째, 이른바 정책의 추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노다 요시히코와 가이에다 반리, 두 사람의 정책 취향이 달랐다. 노다 요시히코는 개인적으로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의 정책적이 주장은 세수를 증가시키고, 엔화의 가치를 높이는데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미일동맹을 계속유지하려는 입장이다. 가이에다 반리의 경제정책은 온건하며 외교적으로 동아시아의 국가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개인적인 성격은 부드러운 쪽이다. 야당과의 관계는 노다 요시히코가 비교적 좋다. 그러므로 노다 요시히코를 선택한 것은 여전히 간 나오토의 민주당 주류파가 승리를 획득한 이후의 정책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노다 요시히코 신임총리는 일본정부의 외교기구의 업무를 한 차례도 맡아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가 등장한 이후 중국에 대한 어떠한 정책을 취할지 중국 독자들의 관심이 점증하고 있다. 그의 과거의 정치적인 경력에서 보면 그는 중국과 관련된 업무를 한 적도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인식의 문제에 대해 비교적 강경하다. 노다 요시히코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것이고 일찍이 동경국제재판에서 1급 전범은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인이 아니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중일관계의 구체적인 문제 이를 테면 다오위다오 문제에 있어서 그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노다 요시히코는 2010년 9월 중순에 발생한 다오위다오 해역 충돌사건과 선장 구류사건은 일으킨 우에하라파와 비교적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당선도 후에하라파의 지지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가 노다 요시히코 신임총리의 취임 이전의 정치적 인식이다. 취임 이후 대중국정책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일본정부의 외교기구의 일본의 국가이익과 중일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중일관계 현상에서 분석을 해보면 노다 요시히코 신임총리가 이끄는 일본정부 중일 수교 이후의 집행되어온 전체적으로 우호합작 정책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중일관계 우호합작의 전체적인 국면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일관계에 대한 중요 정도의 입장에서 분석을 해보면 노다 요시히코 신내각은 간 나오토 내각의 영향을 비교적 크게 받을 것으로 본다.

역시 미일관계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둘 것이다. 먼저 미일관계에서 나타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세와 중, 미, 일 3국의 종합적인 국력의 대비에서 보면 상호 관계는 부단히 변화할 것이다. 중국의 경제력과 영향력의 신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일본경제는 중국에 대한 의존성이 증가하고 있다. 중일경제 관계는 더욱 발전할 것으로 보며 전략적인 호혜 관계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중일관계에서 중대하고 구체적인 문제 대한 상황은 비교적 복잡하다. 역사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노다 요시히코 신내각은 민주당 내각의 규정을 집행해야만 할 것이다. 그 규정에 따르면 주요 각료들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 해양권익의 문제에 있어서 대중국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일 다오위다오 영토 분쟁에서 노다 요시히코 신임내각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강경한 입장이다. 중국의 군사력 특히 해군의 발전에 대한 대응에 대해 일본정부는 미일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이를 억제하려고 할 것이다.(번역: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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