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이미 양자 FTA 조항에 따라 유럽산 자동차 220대가 환경기준 특례조항을 받고 국내에 수입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국회가 가진 비준동의권을 명백히 훼손한 셈이다.
정부, 국회 동의 없이 자동차 환경기준 임의 발효
16일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정부가 협정 체결 시 한·EU FTA 협정문에 특정 날짜를 명시해 국회 비준 없는 작년부터 임의로 효력을 발생시킨 것으로 드러났다"며 "협정문 상의 시행 날짜를 '2010년 1월 1일' 로 명시하고,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기 이전 시점부터 이미 시행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EU FTA 협정문 부록 2-다-3의 '휘발유를 동력으로 하는 자동차의 배출가스 자기진단장치' 제3항 주석 4)를 보면 "이 협정이 2010년에 발효할 것이라는 상호 양해 하에, 대한민국은 유로(Euro)5 배출가스 자기진단장치(OBD)를 장착한 자동차의 시판에 대해 필요한 조치가 2010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갖도록 할 것이다"라고 명기돼 있다.
유로5는 2008년부터 EU 회원국에 적용된 자동차 배출가스 저감장치 관련 기준으로, 기존 유로4보다 더 강화된 환경기준이 적용됐다. 이와 관련,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 별표17을 보면 유로4를 기준으로 한 규칙 '마'에 이어, 환경부가 2009년 1월 1일 이후 적용을 원칙으로, 유로5와 같은 수준의 새 기준을 만들어 이미 고시해 둔 상태다.
이 기준에 따라 이미 유럽산 푸조 220대가 OBD 특례조항을 적용받아 국내에 수입돼 있다.
한국 정부가 국회 비준을 받기도 전에 협정 발효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특정 조항을 임의적으로 발효시킨 것이다. 사실상 위헌이라는 지적이다.
강 의원은 "언제 비준이 될지 모르는 협정문에 버젓이 날짜를 명시하고, 국회 비준도 받기 전에 정부 마음대로 발효시켜 시행하고 있다는 것은 국회를 우롱하다 못해 능멸한 처사"라며 "국회의원들이 헌법소원을 진행해서라도 비준동의권을 훼손한 외교통상부의 행위에 대해 명명백백히 위헌 여부를 가려야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사공일 FTA민간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겸 한국무역협회 회장이 지난 8일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 한·EU FTA 비준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정부는 이미 일부 조항에 대해 FTA 조항을 발동시키고 있다는 게 강기갑 의원의 설명이다. ⓒ뉴시스 |
비슷한 사례 더 있어
이와 같은 사례는 더 있다는 평가다. 한·EU FTA의 경우 공연보상청구권이 이에 해당된다. 공연보상청구권은 음악 저작권자가 가진 '음반' 공연의 손실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협정문 10.9조 3항을 보면 판매용 음반을 공중전달하는 자는 실연자나 음반제작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이 권리가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 카페나 술집 등에서 저작권자에게 공연료를 물지 않고 임의로 노래를 트는 게 금지된다. 음식점, 술집, 카페 등을 운영하는 영세자영업자의 운영 비용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외교통상부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보상청구권이 시행되기는 하지만, 백화점, 비행기 기내, 시행령상 규정된 유흥음식점 등 규모가 큰 곳에서 음악을 틀 경우에 한해 저작권자에게만 보상하도록 하고 있다. EU가 제시한 공연보상청구권은 이보다 더 강한 보호인 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당초 한국 정부의 강한 반발로 무마되는가 싶던 이 법은, 오히려 나중에 한국 스스로 강화시켜 이미 시행 중이다.
남희섭 변리사는 "공연보상청구권을 합의 내용에 넣으려던 EU가 2008년 1월 28일부터 2월 1일 사이에 열린 6차 협상에서 한국측에 양보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듬해 3월 25일 국내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저작권법이 개정돼, 공연보상청구권을 인정하게 됐다"며 "FTA와 관계없이 국내적으로 이미 이 권리가 확립된 셈"이라고 말했다. 당시 개정 이유는 한류산업 보호였다.
한·미 FTA의 경우, 위헌소지가 있는 사례가 많다. 우선 특허출원자에게 특허출원 유예기간을 주는 주는 조항의 적용시점이 2008년 1월 1일부터라 위헌 소지가 있다.
한·미 FTA 18.8조 7항을 보면, 특허출원일 이전에 특허출원인 스스로 발명 내용을 공지한 경우, 이것을 공지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는 일종의 유예기간(grace period)을 국내 특허법 30조보다 두 배로 늘린 12개월로 설정했다.
문제는 이 규정의 적용 시점을 2008년 1월 1일로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2008년 초 특허 가치가 있는 것을 발명한 사람 A가 유예기간 내에 특허출원신청을 하지 않고 지나가, 이를 자유롭게 쓰던 B가 있었다면, 그는 한·미 FTA 발효와 함께 과거 일을 소급적용받아 특허법 225조에 의거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의 벌금을 물 수 있다.
남 변호사는 "예전 법 내용까지 소급적용될 가능성이 높아 명백한 위헌 소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민변 변호사들, 감사원 감사 요청키로
한편, 한·EU FTA의 위헌적 요소들이 속속들이 드러남에 따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회원 변호사들은 이날(16일) 서초동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국회의 비준동의권을 침해한 사건에 대한 심사청구를 감사원에 요청키로 했다고 밝혔다.
또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FTA 추진에 효과적으로 대응키 위해 국제통상부문 변호사들의 회의체인 '국제금융통상위원회'를 민변 상설위원회로 설립키로 했다.
민변은 성명서에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국회의 사전 동의 없이 국회의 한·EU FTA 비준동의 시한을 2011년 6월 30일까지로 협상 상대국과 구두 합의한 것"으로 규정하고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조약심사권 및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 것으로, 아무리 그 효력 발생을 국회의 동의 절차가 완료될 것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헌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민변은 또 지난 2000년 중국 마늘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 사례를 들며 "국제간 합의나 조약에서 구두합의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정부는 중국 정부에 "2003년 1월 1일부터 중국 마늘에 대해 긴급수입제한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한중마늘교역합의서를 전달했으나, 2004년 헌법재판소는 "조약이 아닌 신사협정에 불과하여 효력이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서면합의문도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판단이 나온 마당에, 정부가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구두합의를 근거로 국회를 압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얘기다.
송기호 변호사(국제금융통상위원회 준비위원장)는 "미국 무역법(Trade Act)이나 EU의 리스본 조약(EU 설립에 관한 조약)은 모두 대외통상과정에서 대표기구가 할 역할을 법이 규정해뒀고, 국회가 사전단계에서 이에 관여하도록 명문화했다"며 "반면 한국은 국회가 사후적으로 조약에 동의할 권한만 갖고 있는만큼, 앞으로 조약체결절차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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