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전세는 없고, (보증금) 5000에 40 있어요. 볕 잘 들고 좋아요. 혼자 살기 딱이야."
"전세 아니면 됐어요. 월 40씩 어떻게 감당해요?"
김성철(33, 가명) 씨는 이번에도 허탕을 쳤다. 퇴근길, 주말을 이용해 종종 집을 보러다니길 15일로 일주일째지만 아직도 전세를 구하지 못했다.
현재 노원구 상계동에서 강남구 청담동으로 출퇴근하는 그는 조만간 집을 구해야 한다. 형이 결혼하게 되면서 따로 나와 살아야 할 처지가 됐다. '이참에 출퇴근 시간도 줄여보자' 싶어 강남 일대를 누비는 중이지만 여의치 않았다. 전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전세 어디로 갔나
마침 김 씨에게 역삼동 부근의 중개업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방금 전에 7000만 원짜리 원룸 전세가 나왔으니 서둘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세 명의 대기자가 섰다고 했다.
김 씨와 함께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봤다. 침대 하나, 책꽂이 하나, 텔레비전(TV) 한 대에 빨래걸이가 전부였다. 더 이상 발 디딜 공간이 없을만큼 방은 작았다. "세탁기는 어디다 둬요?" "화장실에 두면 돼요." "공간이 나요?" "에이, 젊은 총각이 이렇게 살면 되지. 이 정도 방이면 강남에서 찾기 힘들어요. 정말 좋은데 뭘 그래?"
방 구경을 마치고 잠시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돌아다녀 본 곳 중 그나마 볕이 제대로 드는 집이란다. 송파 원룸촌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어, 고층에 있어도 대부분 빛이 들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중년의 여성과 청년이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먼저 본 분들이에요. 저분들 아직 도장 안 찍었으니 빨리 계약하세요. 강남에서 전세는 나오면 로또에요."
김 씨는 고민 끝에 '딴 곳 한 곳만 더 보고 올게요"라고 했다. 중개업자는 "됐다"고 했다. 경쟁자가 나타난 걸 본 모자가 그 사이 계약을 해버렸단다.
김 씨는 "인터넷에 중개업자들이 싼 방이 있다고 글을 올리는데, 막상 가보면 전부 허위매물"이라며 "이런 저런 조건이 생기다보니 방을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번 주말에 김 씨는 전 주에 전화했던 왕십리 일대, 뚝섬 일대를 돌 예정이다. 그는 "고민이 많다"고 한숨을 쉬었다.
전세난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계약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보증금이 크게 오르고, 그마저도 매물이 부족해 나오는 족족 사라진다.
보증금 1억8000만 원인 경기 안양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직장인 박현우(39, 가명) 씨는 얼마 전 집주인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올해 말이 계약 만료일인데, 집주인이 벌써부터 전화를 걸어 보증금을 종전보다 7000만 원 올리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1년 만에 7000만 원을 무슨 수로 구해요? 아직은 기간이 남아 있지만, 연말되면 집 옮길 준비 해야죠."
1년 사이에 집값이 폭락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박 씨가 계약을 연장할 가능성은 낮다. 정부에서 마련한 전세자금대출을 이용한다손 치더라도, 그만큼 빚만 더 늘어나고 이자비용만 더 불어날 뿐이다.
▲아직 이사철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전세난은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의 한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주변 아파트 전세시세가 적혀있다. ⓒ뉴시스 |
'대학생=빚쟁이'
전세난이 심각해지면서 대학가 월세방도 영향을 받고 있다. 통상 대학가에는 전세 매물이 부족한데, 전세가 줄어들고 반전세가 늘어나자 대학가 원룸촌마저 월세가 오르는 모양새다.
건국대학교에 재학 중인 이진희(가명) 씨는 개강을 앞두고 세종대학교 부근의 월 50만 원짜리 하숙으로 옮겼다. 잠만 자는 하숙이지만 그나마 학교 부근보단 싸다고 했다. 학교 앞은 이미 5~10만 원가량 집값이 뛰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 씨는 "이번 학기에도 학자금 대출을 받을 예정"이라며 "4학년이라 취업 준비를 해야 한는데, 아르바이트 때문에 못 한다"고 했다. 밥도 안 나오는데 굳이 월 50만 원이나 더 내야 할 만큼 사정이 좋지 않은걸까. 이 씨는 "여학생은 밥을 꼬박꼬박 먹기 때문에 잘 안 받는다"며 "여자 목소리 확인하면 안 받으려는 하숙집이 많다"고 했다.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한양대학교에 재학 중인 김현수(가명) 씨는 기숙사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집을 찾아나서게 된 경우다. 그는 사근동 월셋방을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의 조건으로 구했다. 김 씨는 "학기마다 80만 원이면 해결되던 주거비가 크게 뛰었다"며 "부모님께 죄송할 따름"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김 씨의 친구 박동민(가명) 씨는 월세마저 올라 집을 옮긴 경우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이던 방이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월 50만 원으로 뛰었다. 이렇게 값이 오른 게 6개월 정도 지났다. 어쩔 수 없이 박 씨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박 씨는 "(학교 부근인) 왕십리가 개발되면서 월세가 크게 뛰었다"며 "구의, 성수, 뚝섬 등지로 방을 구하러 다니는 친구가 많다"고 했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도 "회사 부근에 집을 못 구한 직장인들이 왕십리로 몰려든다"며 "학생들은 또 다른 곳으로 찾아다닌다. 그나마 사근동이 교통이 불편해 덜 오른 편"이라고 말했다.
대책 없나…"돈 없으니 공포 느껴"
실제 이와 같은 전월세 강세는 통계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지난 6일 국민은행이 발표한 '전국 주택가격 동향조사'를 보면, 이사철을 앞둔 비수기인 지난달 전셋값이 전국 평균 0.9% 뛰었다. 이는 2002년 이후 9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서울에서는 성동·광진·서초가 1.8% 뛰었고, 강남도 1.6% 올라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정부가 지난 11일 이른바 '2.11 대책'을 내놨지만 결국 빚을 더 내라는 대책에 불과해 실효성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이미 가계가 워낙 빚부담이 커, 한계에 다가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함께 친구가 유학을 떠나게 돼, 어쩔 수 없이 혼자 살 월셋방을 구한 대학생 신지은(가명) 씨는 "세입자가 약자인데, 이런 사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직장인 김성철 씨도 "방을 찾아나서보니 공포가 생긴다"며 "돈이 없으면 정말 사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전세난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음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선거를 앞둔 마당이라 이 문제는 정치권에서도 대형 태풍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친박계인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5일 CBS 라디오 <변상욱의 뉴스쇼>에 출연해 "(정부가)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를 얘기하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이해가 안 된다"며 "지금 전세대란(의 핵심)은 서민들이 (전세값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거다. (전세값이) 내려오는 대책이어야 하는데, 전세값은 높은 대로 그냥 두고 빚을 내서 전세값 감당하라는 식"이라고 말했다.
만일 비판의 중심에 놓인 정부의 대책마저 실패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대학교는 개강한다. 대학가의 원룸 이동은 끝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본격적인 봄 이사철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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