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인수전 향방이 다시금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양상이다. 채권단이 예상보다 강한 수준으로 현대그룹의 자금동원력에 의문을 보이고 있다. 만에 하나 현대차그룹으로 물살이 이동한다면 가격요소를 집중적으로 고려한 채권단도 이해관계자들의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 매각 향방 아직 오리무중
24일 유재한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현대그룹에 (나티시스 은행) 대출계약서 제출을 요구했으나 결국 하지 않았다"며 "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그간 줄곧 의문이 제기됐던 현대그룹의 1조2000억 원 차입액에 대한 담보 여부를 아직 채권단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채권단이 공식적으로 의구심을 내비침에 따라 현대그룹이 다 잡았던 대어(현대건설)가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차입액의 성격은 이번 인수전에서 핵심적인 사안이 됐다. 현대그룹은 최초 이 자금을 두고 "현대상선 프랑스 법인의 은행 예치금"이라고 했다가 이후 "무담보, 무보증 차입금"이라고 말을 바꿨다.
무담보 대출금이라는 현대그룹 주장마저 거짓으로 밝혀질 경우, 현대그룹의 자금조달 능력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건 물론이고 중요한 평가요소인 계약이행능력에서도 점수를 깎이게 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재무상황 조작 논란까지 빚어질 사안이다.
외환은행과 함께 채권단 주요 운영위에 포함된 정책금융공사, 우리은행이 정부 소유라는 점을 감안하면 불똥은 정부로도 튈 수 있다.
현대그룹 차입조건 더 나빠지면?
현대증권 노조, 현대건설 노조 등이 현대그룹의 인수에 반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자금동원능력이 떨어지는 현대그룹이 무리하게 인수를 추진해, 금호아시아나그룹처럼 인수자와 피인수자가 공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큰 게 현실이다.
현재로서는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가격조건을 최우선 매각기준으로 삼아야 할 채권단이 더 비싼 매입가를 써낸 현대그룹 대신 현대차그룹을 선택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빗거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비가격요인은 고려 비중을 낮추는 게 바람직하다. 채권단도 이런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선웅 경제개혁연구소 소장은 "계약 이행능력 등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점에 대한 의구심이 없다면 결국 파는 입장에선 가장 비싸게 써낸 측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현대그룹에 '큰 하자'가 새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현 상황을 바꿔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채권단 조사 결과 현대그룹이 알려진 것보다 더 나쁜 조달조건으로 자금을 끌어들였다면 재고려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미 현대그룹은 많은 돈을 차입해, 그룹의 향후 경영 기반에 적신호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현금자산만 4조 원 정도를 가진 현대차그룹과는 사정이 다르다.
이번 인수전의 핵심계열사인 현대상선의 3분기말 현재 현금흐름표를 보면,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금은 8569억 원이다. 올 들어 9월 말까지 단기차입금이 1181억 원 늘어났고 회사채도 6589억 원을 발행했다. 상환분을 빼더라도 차입자금이 950억 원가량 늘어났다.
이에 더해 지난 9일, 현대상선은 현대건설 인수자금을 마련코자 금융기관에서 주식을 담보로 1680억 원을 추가로 차입받았다. 이로 인해 현재 현대상선의 단기차입자금 총액은 8712억 원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8일 기업어음 800억 원을 발행해 단기차입금 합계액을 1460억 원으로 늘렸다. 회사채 1196억 원을 새로 발행한 반면 상환액은 없다. 그만큼 유동비율이 떨어진다.
시장 상황이 급박해져 현대그룹의 매입자금조달이 어려워질 경우, 향후 채권단이 안정적으로 매각대금을 받아낼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다. 나아가 그룹의 생존에도 이상신호가 올 수 있다. 나티시스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이 무담보일 경우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담보물이 있다면 그만큼 그룹의 생존능력은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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