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만은 노동가수다. 노동가수란 말은 노동가요를 부르는 가수와 노동자 가수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김성만에게선 하나가 된다. 공장노동자로 일했고 산업재해까지 당했던 그는 <비정규직철폐연대가>의 노랫말을 쓴 장본인이며 꾸준히 민중가요를 발표하고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노래하는 아저씨다. 남들이 일할 때 노래하는 베짱이가 아니라 거침없이 외쳐온 배짱이 김성만이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를 발표했다. 넉 장의 음반에 오랫동안 쌓아온 노래를 68개나 꾹꾹 눌러 담았음에도 벼린 곡들답게 버릴 곡이 거의 없다.
▲김성만 ⓒ다음카페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다 |
그에게서 하나 된 노래
같은 사람이어도 크기가 달랐던 때가 있었다. 고대 벽화와 중세의 그림은 인물을 지위에 따라 차별했다. 주인공은 표준말을 쓰고 하인과 가정부는 으레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면 지금이라고 달라진 것 같진 않다. 대중문화 속 언어의 서열화는 작은 예일 뿐이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도록 해줘야 할, 약자의 최후수단인 폭력을 안 써도 되도록 해야 할 '법과 원칙'이 무력한 이들을 조연이자 비극의 주인공으로 내몬다. 재현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공포도 향수가 된다지만,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둥 잠꼬대도 거짓말로 하는 세상은 너무 공포스럽다. 구성원들조차 부동산과 청년실업, 재개발처럼 닥쳐야 자기 일로 인식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우린 누군가의 부고를 접한 날에도 밤엔 편히 자고 마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있다. 에밀레종처럼, 혹은 동충하초처럼 죄책감까지 동반하는 작품과 예술가의 관계이다. "용광로 쇳물 콸콸 넘친다"에 울컥해질 <낡은 작업복>과 비장한 <저항의 나이>는 듣고 부르는 이를 숙연케 하지만, 이연주가 대신 처연하게 부른 <무화과>와 함께 모두 아름다운 음악이기도 하다. 현실이라는 질척한 진흙에서 피운 수련들이다. 하지만 지배계층의 '적개심 마케팅'과 싸우다 너무 뜨거워 차가워진 사람들과 달리 왼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는다. 노동자의 일상과 보통사람의 애환을 담은 노래들에는 온기가 스민다. 이렇게 손병휘처럼 '깨어있는 시민'을 따스하게 그리는 한편, 제 철 잃고 휑하게 빈 어항을 내건 횟집처럼 황량한 개인의 내적 풍경을 서정적으로 새긴다.
다른 이가 그런 이야기를 담아 쓴 시와 글이 노래가 되어 여럿 실렸다. 시를 노래로 만든 곡들 중엔 어색한 경우가 많은데, 원문을 존중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애초에 하나였던 음악과 시가 따로 떼어진 후 각자의 걸음을 가진 이유가 크다. 가끔은 안치환의 [정호승을 노래하다]처럼 쉬어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원래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글과 김성만의 노래는 함께 호흡한다. "쓰레기봉투 옆구리 터지고, 애새끼는 공차다 이마가 터지고, 찌개는 넘쳐 바닥까지 졸아든" <우리 마누라 열 받았다>가 건네는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다. 요란한 것이 아니라 작고 낮게 속삭일 때 더 잘 들리는 말이 있다. 그런 속삭임이 <마흔 무렵>에 스미고, '일인지상 만인지하'인 우리네 처지와 다를 바 없다는 <감자탕 & 순대국>, <닭대가리>에는 씁쓸하면서도 묘한 미소가 번진다. 이 때의 미소도 그냥 미소가 아니다. 이지상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을 새로이 재규정했듯이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놓는 이가 김성만이다. 김호철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따스하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며 양 손을 살랑거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는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따지고 싶고, 주방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손님들에게 중계방송 하는 식당을 좋은 사례라며 소개하는 뉴스에는 분노가 인다. 피와 장기로도 모자라 웃음과 감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매매하는 '인간=상품'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사원을 사복으로, 노동자를 농노로 여기는 주동자들은 수입이 일정치 않으니 이해해주자. 한 달에 1억을 벌 때도 있고 10억을 벌 때도 있다니 말이다. 사람들도 개인의 상품가치를 상향조정하는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그래도 겨 묻은 개에겐 똥 묻은 개 나무랄 자격 정도는 있지 않은가. 김성만은 그 끝자리에 선 비정규직을 주봉희의 글에 노래를 붙여 <두해살이풀>로 위로하고 응원한다.
흥미롭게도 적잖은 곡들이 성인가요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특히 세 번째 CD인 '아, 비정규직'에선 중년이 된 여성 가수들의 창법 때문인지 더욱 그렇다. 민중가요가 투쟁노동자와 창작자의 연령 때문에 어느덧 계급성보다 세대성이 강화된 양상을 가늠케 하는 단면이다. 그렇다고 하여 새로운 세대를 외면하진 않는다. 소래골 아이들이 부른 <꿈 빛깔도 고아라>와 같은 전통음악과 백창우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동요 풍의 <우리 아가>가 손을 맞잡고 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시 하나 된다. 또한 그 옆에는 국악을 곁들인 투쟁가 풍의 <날려라>와 <날아라 빗자루>처럼 신나는 곡들이 따라 나선다. 이렇게 또 한번 개인의 노래와 함께 부르는 노래가 하나가 되고, 서정성과 현장성이 하나가 된다. 이 모두의 하나 됨을 "강강술래"하는 <봄 쑥>은, 그래서 의미 있는 순간이다.
한 사람이 작곡한 곡들로 채워진 넉 장짜리 음반을 듣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객원 가수들이 저마다 다른 빛을 낸다. 하모니카, 피아노, 국악기, 심지어 휘파람까지 적절히 쓰인다. 대학 노래패가 부른 <외사위>처럼 편곡의 묘가 도드라진 곡들이 많고, 서정가요에서 투쟁가와 동요 그리고 <칡꽃>과 같은 전통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유형을 망라한다. 그래서 2000년대 민중가요의 베스트 앨범이라 해도 좋을 구성이다. 왜 랩을 삽입했는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고, 투박한 가창과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는 일부의 중년 풍이 폭넓은 호응을 이끌어내긴 힘들지라도 김성만이 좋은 송라이터라는 사실을 바꿔놓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삶에 사랑이 있다. 인재(人材)라는 말에서 인(人)에 주목하는 것과 재(材)를 강조하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을 알 수 있다. 물론 김성만은 사람(人)을 바라본다. 들으려면 손수 찾아야 하는, 그리고 한번 들을라치면 꼬박 4시간 40분이 걸리는 이 앨범을 "사랑은 낮은 곳으로 저 맑은 물줄기처럼, 희망은 높은 곳에서 내리는 빗줄기처럼"의 순수한 믿음이 가로지른다. 물은 최고의 석공예 장인이며 수영선수의 몸을 조각처럼 만들어 줄 정도로 힘도 세다. 그 힘을 믿는 김성만은 트로트 히트곡이라 해도 믿을법한 <앗싸 가오리>에서 물방울들에게 호기롭게 노래한다. "까짓것 한번 부딪쳐보자."
▲ ⓒ화가 김재석(다음카페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 |
낮별지기 김성만, 신발 만드는 사람
가진 것 없다지만 당장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누리며 '운동'을 자기애 표출과 자아실현의 방식으로 여기는 듯한 청년, 진보정당의 당원이란 신분을 폼 나는 스티커처럼 옷에 다는 시민이 없다곤 할 수 없다. 하긴 88만원 세대나 루저와 같은 그늘마저 사고파는 시절이다. 그러나 김성만은 타자의 시점으로 안에서 밖을 내다보거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안을 노래하고 밖에서 밖을 노래한다. 본인의 동의도 없이 허무와 일회성의 비유물로 등장하는 하루살이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 무엇도 하루살이보다 위대하지 않다. 김성만은 하루살이와 두해살이풀 곁에서, 자신 역시 하루살이와 두해살이풀로서 육체의 언어로 노래한다. 어차피 사람의 몸에서 주사기로 영혼만 따로 뽑아낼 순 없다.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는 물음과 묻음으로 오늘을 기록한 사료이고 민중가요의 유효성을 증명한 물건이다. 화자와 대상이 하나이기에 안과 밖이 다르지 않고, 발이 부지런하니 서정과 현장이 하나가 된다. 시장과 국가의 결합이 강화되며 분리된 노래와 현실, 생산자와 수용자가 하나가 된다. 이 하나 됨은 연대의 조건이다. 몇 번의 반나절을 들이고 나서 절로 나온 박수는 이런 의의 때문만은 아니다. 저항음악에 관심을 놓지 않은 극소수 평론가들 중 하나여서가 아니고, 호의보단 적의로 좌파평론가라 불리는 사람이어서도 아니며, 김성만과 같은 당적을 가지고 있어서는 더욱 아니다. 고맙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있는데 낮에 보이지 않는 별"을 지켜온 <낮별지기> 김성만은 맨 아래에서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다. 제 발을 감싸고, 집밖으로 외출하는 누군가를 따라나설 신발을 짓는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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