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디지털산업단지. 내비게이션과 위성방송 수신기를 생산했던 기륭전자 공장은 2년 전 철거해 지금은 없다. 굳게 잠겼던 철문과 담벼락도 두 달 전 철거해 없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건물 안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철거해 사라진 공장 앞을 떠나지 못한다. 만 5년을 넘기고 6년째 그 공장 앞을 떠나지 못한다. 그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사라져 다시 어느 공장 단기 파견 노동자로 팔려가야 했던 200여 기륭 여성노동자들을 대표한다.
유일하게 남은 게 경비실이다. 지난 8월, 철문과 담벼락이 사라졌을 때 같이 사라질 뻔한 경비실, 그 옥상 위에 두 여성노동자가 올랐다. 그들이 경비실 철거를 막았다. 벌써 70일이 넘었다. 그 옥상은 그냥 옥상이 아니다. 2008년 여름,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간 여성노동자들이 스무 날, 서른 날, 쉰 날, 예순 날을 넘겨가며 한 사람씩 죽음의 문턱에 가 닿았던 옥상이다. 혼자 남아 96일을 곡기를 끊었던 한 여성노동자가 보다 못한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로 통곡을 하며 내려왔던 옥상이다.
두 해가 지난 2010년 지금, 두 여성노동자가 단식을 시작한 지도 열흘이 훌쩍 넘었다. 6년 동안 세 번째 들어간 단식이다. 첫 번째 단식이라 쉬웠을 리도, 두 번째 단식이라 만만했을 리도, 세 번째 단식이라 무덤덤할 리도 없다. 건강을 위한 단식도, 도를 닦기 위한 단식도 아니다. 손 맵고 음식 잘하는 두 사람, 늘 남들에게 이것저것 만들어 먹이던 두 사람, 많은 양도 일없던 두 사람은 지금 음식을 만들지도 먹지도 못한다. 찾아온 이들이 괜찮으냐고 물으면 그들은 괜찮다고 말한다. 얼굴이 수척해진 게 눈에 띄는데도 그렇게 말한다. 지난 두 번의 단식을 함께 했던 동료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지 왜 괜찮다고 말하느냐고 한다. 힘들어도 그들은 지금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왜 단식을 하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왜 단식을 하는지 그들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그들 밖에 선 우리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들이 단식하는 천막 앞에 텐트가 하나 새로 쳐졌다. 민주노총 금속노동조합 부위원장이 머무는 농성장이다. 그도 단식 중이다. 옥상 위에 오른 두 여성노동자를 아래에서 바라보다 스스로 옥상 위로 올랐다. 2008년 기륭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자 달려왔던 이들이 모인 '함께 맞는 비' 회원들도 월요일부터 돌아가며 하루 단식을 시작했다. 기륭 노동자가 아닌 그들이 왜 곡기를 끊는지 그들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한다.
경비실 앞, 컨테이너박스 농성장은 햇볕과 눈, 비, 바람을 맞은 세월이 적잖다. 어느새 옷가지며 이불, 가재도구 등 살림이 늘었다. 그들은 단식을 시작하기 전 회사와 교섭을 하면서 이번에는 정말 컨테이너박스 농성장을 떠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다른 투쟁 사업장에 컨테이너박스 농성장을 줄 계획까지 짰다. 그러나 회사는 조인식을 하기로 해 놓고는 함께 짠 협상안을 바로 전날 거부했다.
그래서 다시 머물러야 하는 농성장 안, 태어난 지 일곱 달 된 아기가 엄마 젖을 문다. 오물오물 거리는 작은 입. 바라보는 낯선 눈길에 한 번씩 젖에서 입을 떼고 씩 웃고 얼른 다시 젖을 문다. 작은 손으로 엄마 가슴 저쪽을 만지작댄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였으니 아기는 컨테이너박스 농성장이 낯설지 않을 거다. 한 사람 두 사람, 결혼하고 애를 낳고 아이가 배밀이를 하고 뒤집고 기고 걷고 달리고 어린이집에 갈 만큼 시간이 흘러도 기륭여성노동자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만 5년을 꽉 채우고 6년째인 투쟁. 기륭에서 태어난 아이들, 농성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젖을 먹는 아기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다른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이곳 농성장으로 온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에는 그 아이도 날마다 이 농성장에서 먹고 자고 놀았다. 왜 갓난애를 데리고 날마다 농성장에 오는지 우리는 아이 엄마인 기륭 여성노동자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어린애들한테 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한다.
컨테이너박스 농성장 맞은 편, 두 달 만에 경비실을 철거하러 왔다가 길 가운데 멈춘 굴삭기에는 한 여성노동자와 한 시인이 올라가 있다. 벌써 열흘이 넘었다. 굴삭기에 오른 지 이틀째에는 전경부대가 몰려와 순순히 내려오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때 그들은 굴삭기 팔 끝에서 줄 하나를 잡고 세상에 맞섰다. 왜 굴삭기 바퀴 밑에 들어가 굴삭기를 막았는지, 왜 팔 끝에 섰는지, 그 끝에 서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먹는 일도, 자는 일도, 싸는 일도 그 모든 게 불편한 거기서 왜 내려오지 않는지, 그들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아래에 있는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한다.
그 굴삭기 저쪽으로 쳐 놓은 천막농성장. 그곳에서는 이 노동자들과 함께 하겠다고 찾아온 촛불을 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퀵서비스 노동자고, 사무직 노동자고, 해고당한 노동자고, 2008년부터 촛불을 든 시민이고, 학생이다. 일하기 전 새벽에 들르기도 하고, 일 끝나고 달려오기도 하고, 천막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혼자 오기도 하고 여럿이 오기도 한다. 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날마다 오기도 하고 아예 눌러앉기도 한다. 자기 문제도 아닌데 왜 그곳에 있는지, 왜 그리 안타까워하는지, 그들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멀리 있는 우리가 그 답을 찾아야 한다.
40년 전 11월 13일, 22살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40년이 지난 지금 파견노동자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라고 외친다. 인신매매와 별다르지 않은 '사람장사' 파견노동이 횡행하는 이 사회가 과연 올바른지 '공정한 사회'를 외치는 저들에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사회 어느 한 구석 그 무엇에라도 '평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면,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 당하는 일이 무수한 이 사회에서 그 평등은 대체 무엇인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얼마 전 칠레에서는 저 땅 깊숙한 곳, 보이지 않는 곳에 갇힌 사람들을 69일 만에 구해냈다. 한국에서는 땅 위, 보이는 곳에 있는 사람들을 6년이 되도록 구해내지 못한다. 구하지 않는다. 저들이 얼마나 더 애써야 하는가. 저들이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파견노동자로 언제든 해고당해야 하는 운명, 부당함을 묵묵히 견뎌야 하는 운명을 거스른 게 죄인가. 희망 없는 노동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희망을 갖는 노동을 꿈꾼 그들은 정말 죄인인가.
결국, 내 바람은 작고 구체적이다. 기륭전자는 성실하게 교섭에 나서서 이제는 저 여성노동자들을 집으로, 일터로 돌아가게 하기를 바란다.
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이 바람이 휩쓸어 가야 할 것은 저 약하디 약한 천막들이 아니다. 그들을 구하지 않는 이 사회다,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다고 좌절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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