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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잘 만나서' 안 통하는 사회는…"

[인권오름] "언제까지 '한줄 세우기' 경쟁인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4일 사퇴했다. 외교통상부 장관에 임명된 지 2년 7개월만이다. 통상전문 계약직으로 특별공채를 통해 뽑은 한 명의 유일한 합격자가 장관의 딸이었다는 특혜논란이 발단이 된 사의표명이었다. 이를 두고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외교부 특채뿐만 아니라 행정 기관 곳곳에 특채 의혹이 떠오르고 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 특혜 의혹이 줄줄이 드러남에 따라 이들은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었고 검찰조사의 압박도 받고 있다. 5급 이상 공무원 정원의 50%를 외부전문가로 특별 채용한다는 행정안전부의 행정고시 개편안은 결국 백지화되었다.

▲ 유명환 전 장관 딸 파문을 풍자한 동영상. 영화 <대부>를 패러디한 이 동영상은 누리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동영상 바로 가기) ⓒ프레시안
5급 공무원을 공개채용으로 뽑는 고시. 고시폐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회 문제를 야기했지만 돈 없고, 빽 없고, 학벌 없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역전을 꿈꿀 수 있는 길이었다. 고시 합격생에게 무담보로 대출을 해주는 은행상품까지 있는 것을 보면 '5급 공무원', '법관', '변호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한한 '신뢰'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시가 '없는 자'들의 유일한 신분상승수단으로 여겨지던 것도 옛말이다. 절간에서 고독을 씹으며 법전을 파던 시대는 끝났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이후 부모의 명예퇴직을 목격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으로 몰렸고 덕분에 고시 시장은 커졌다. 우후죽순으로 고시학원들이 생기고 심지어 고액 고시 과외가 등장했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로 간 강남학생들이 사법연수원으로도 진출했다. 이른바 고시도 돈 있어야 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끈기와 오기로 버티던 고시생들에게 잇따른 악재가 터졌다. 로스쿨의 도입이다. 한 학기 10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은 있는 집 자식만 오라는 단도직입적 신호다. SKY 출신이 로스쿨 합격자의 절반을 넘는다. 이어 외무고시 폐지와 외교아카데미를 통해 외교관 선발하겠다는 외교부의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의 행정고시 개편안까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제도 개편의 취지는 비슷하다. 다양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다양성과 전문성이라는 것을 쌓고 경험할 수 있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가져야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가난하여 한 학기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해외 어학 연수를 엄두나 낼 수 있을까. 외교관인 아버지를 두어 해외 곳곳을 두루 다닌 그녀의 경험과 게임이나 될까. 걱정이 앞선다.

제도의 실행에 앞서 공정성과 형평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할당제가 확보 되어야 한다. 할당제를 통한 장애인·여성·지역인재 등의 채용확대와 특정 대학 출신의 쏠림 현상을 예방할 방안을 강구하는 것 등이 제도 개편과 함께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제도 정비를 통한 형식적 틀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모두가 되려고 안달인 고위급 공무원·검사·판사·외교관. 이들이 자연스럽게 이루는 우리사회의 특권층. 왜 이들이 특권층을 이루고 있으며, 모두들 이 특권층이 되려고 하는지, 왜 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권력과 부, 명예가 집중되고 있는 것인지. 지금 우리 사회엔 이 근본적인 질문들이 빠져있는 것 같다.

몇 해 전, 덴마크에서는 의사와 벽돌공의 생활수준이 비슷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관련 기사: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 이런 덴마크도 불과 40년 전에는 서열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

서열의식을 깨고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모두가 특권이라는 꿈을 따라만 가는 한국 사회. 하지만 희망을 가져본다. 한 직업과 다른 직업 사이에 차이는 존재하지만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의사와 청소노동자의 삶의 질이 비슷한 사회, 누구나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너무나 먼 꿈 같지만.

고시는 흔히 등용문이라 비유된다. 등용문은 난관을 이겨내고 크게 출세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용문(龍門)은 황하 상류 지역에 있는 협곡의 이름이다. 물살이 워낙 빨라 물고기가 거슬러 올라갈 경우 바위에 비늘이 찢겨지고 상처를 입어 두 번 다시 오를 생각 조차 못한다고 한다. 그런 물살을 거슬러 오른 물고기는 용으로 변했다고 하여 등용문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동물이 무한한 권력을 가지고, 또한 그것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은 이상하다.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이 물고기. 흐르는 물을 억지로 거슬러 올라 그 비늘이 찢겨지지 않아도, 다른 물고기를 짓밟고 나아가지 않아도, 좁은 계곡이 아니라 너른 강물을 자유로이 뛰어 놀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길.

(이 글은 "모두 '용' 되려고 용쓰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 직업과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

"명문대? 우리 애가 대학에 갈까봐 걱정"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
"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
모두가 승리자 되는 복지제도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 임금보다 더 많은 나라

- '암기가 아닌 창의, 통제가 아닌 자율'을 장려하는 교육

"아이들은 숲 속에서 뛰노는 게 원칙"
"노는 게 공부다"
"충분히 놀아야 다부진 어른으로 자란다"
1등도, 꼴찌도 없는 교실
"왜?"라는 물음에 익숙한 사회
"19살 넘으면, 부모가 간섭할 수 없다"

- "아기 돌보기, 사회가 책임진다"

"출산율? 왜 떨어집니까"
"직장인의 육아? 걱정 없어요"

- "덜 소비하는 풍요"

"에너지 덜 쓰니, 삶의 질은 더 높아져"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공동체 생활"
'빚과 쓰레기'로부터의 자유
"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
"우리는 언제 '덴마크의 1979년'에 도달하려나"

- "낡고 초라한 아름다움"

"수도 한 복판에 있는 300년 전 해군 병영"
인기 높은 헌 집
"코펜하겐에 가면, 감자줄 주택에 들르세요"
도서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 덴마크 사회의 그림자

"덴마크는 천국이 아니다"
"덴마크 사회의 '관용'은 유럽인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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