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선을 맞아 <프레시안>은 기존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재를 마련했다. 여론조사의 통계 수치로만 존재했던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기로 한 것. 그간 정치 평론을 독점해 온 40대 이상과는 다른 위치에서 정치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새로운' 시각이 오는 대선을 둘러싼 얘깃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리라고 본다. 새만금 간척 사업을 둘러싼 복잡한 쟁점을 명쾌하게 설명한 글(☞관련 기사 : "새만금 갖고 장난 치니까 재미 좋니?")을 통해 표를 얻고자 앞뒤 안 가리고 천박한 정책을 남발하는 대선 후보의 실상을 꼬집었던 필명 '리건'님이 두 번째 글을 보내왔다. 리건님은 최근 <프레시안> 지면을 통해서도 일부 필자들이 내놓았던 "이번 대선, 찍을 사람이 없다"는 지적에 "그래도 찍으라"고 반박한다. <편집자> ☞관련 기사 : "바야흐로 '구렁이들의 전쟁'이 도래했다", "650만 원짜리 대선…기권하려거든 '단체'로!" |
현실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를 지지하면서도 선거에 무심한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이번 대선을 놓고 '최선은커녕 차선도 안 보인다,' '누가 되든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서 기권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프레시안>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었다.)
나 역시 이번 대선은 매력 없는 후보들이 재미없는 이야기만 해대서 여러 모로 김이 빠진다. 하지만 매력 없고, 질이 낮고, 능력이 없는 정치인이 나와서 정치판을 꼴도 보기 싫게 만드는 방법이야말로, 국민의 무관심과 냉소를 유발해 정치 참여를 막음으로써 아무런 개입과 견제 없이 정치인끼리 해먹겠다는 고도의 술수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탓에 투표권을 가진 첫 대선부터 아무리 개판 오 분 전이라도 두 눈 부릅뜨고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뭐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래서인지 선거 자체에 관심 없다는 사람을 보면 속이 상한다. 만일 그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람인데다 무심한 정도가 투표하러 가지 않겠다는 데에 이르면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기권은 아니다
2004년 총선은 진보정당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하리란 희망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때 내 친구 '때릴거면꽃으로(가명)'는 투표 당일 내게 전화해서 왜 민주노동당에 표를 줘야지, 하고 물었다. 난 열심히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런 노력에도 그 친구는 '그래도 선거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는 대답을 반복했고 결국 투표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노동자, 농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정치가 보수 대 진보(심지어 우파 대 좌파) 구도가 될 수도 있는데, 좌파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할 텐데, (당시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한 표가 얼마나 소중한 데, 왜 투표를 안 하겠다는 거지?' 서운하고 또 서운해서 전화 끊고 난 울었다.
이번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 중에 또 다른 친구 '진짜좌파(가명)'가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 모두 좌파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대선 후보가 돼도 관심 밖이라고 했다. 그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내가 지지하던 후보가 결선에서 떨어지자 그때서야 좌파냐, 아니냐 하는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친구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한 강단 마르크스주의자 패밀리가 부르주아 정치 일정에 좌지우지되는 게 싫어서 선거 당일 새벽 6시에 엠티를 떠난다는 글을 읽었다. 좋아하는 애 괴롭히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이런 '초딩' 수준의 행동은 투표와 같은 중요한 정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 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여줄 뿐이다.
기권이 의미 있는 정치 행위가 되려면 전제가 딱 하나 필요하다. 투표율이 몇 퍼센트 아래이면 그 선거가 무효가 된다, 이런 규칙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기권은 뭔가를 바꿔놓기는커녕 패배와 허무만 남길 뿐이다.
이번 선거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가 나만큼 많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난 '생태적 전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현재 거론되는 후보는(이명박,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 할 것 없이) 그런 의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후보도 딱히 없고, 한 번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여성 후보도 없다.
더구나 나는 정치적으로는 '아나키(anarchy)'를 지향하고, 경제적으로는 '프리건(freegan)'에 가까워서, 기존의 제도화된 정치, 경제 제도로부터 도망쳐 나가고 싶은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코앞에 닥친 시험을 망치고 나면 최소한 1년간 밥벌이가 암담해진다. 솔직히 누가 집권하든 내 밥그릇 크기와 별로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선거에는 개입해야겠다.
타인을 생각하라
우석훈 씨가 어떤 후보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국민 1인당 평균 650만 원의 손해 또는 이익이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이런 냉정한 분석 자체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평균'이 그렇다고 해서 모두에게 충격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지구 온난화로 지구 온도가 평균 1도 상승한다고 해서 지구 전체 각 지역 1년 온도가 고르게 1도씩 오르지 않는 것처럼….
지구 온도가 1도 상승한다고 해도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지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는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폭염, 혹한이 닥쳐 사람을 괴롭힐 것이다. 또 다른 지역은 해수면 상승으로 삶터가 수몰될 것이다. 즉 생태적 변경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평균 1도' 상승이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다. 평균 650만 원은 서민 돈을 650만 원씩 고르게 걷어서 건설 자본에게 안겨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변경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훨씬 더 큰 충격으로 나타날 게 뻔하다. 운하 판다고 난리치는 통에 술렁이다가 지역 공동체가 와해될 어느 강변 마을이 얼른 떠오른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소한' 의료 복지 축소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어갈 어느 차상위계층 가정. 초등학교 시절의 전부를 '대통령은 CEO' 하면서 보내게 될 어린이. 고등학교, 대학 서열화로 한층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청소년. 노동조합 활동이 축소되면서 일터에서 내몰릴 노동자. 의기양양한 '뉴라이트' 총학생회에게 탄압당할 대학 내 자치 단체 등….
또 대규모 국토 파괴 사업을 하느냐, 마느냐, 이런 논쟁이 언론을 지배하면서 학교 급식, 아토피, 지구 온난화, 습지 보존 등 '작은' 사안은 뒤로 밀려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두 번의 실패를 딛고 기어이 뜻을 이룬 조·중·동이 설레발 칠 때, 대통령이 대놓고 사회 약자를 비하할 때, 상처 받는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특정 대선 후보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친구 중 하나는 그 후보만 보면 '발 마사지 인생 지혜' 이야기가 떠올라 그의 얼굴에 '색기'가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여 소름 끼친다고 호소한다. 나 역시 그의 '장애아 낙태' 발언만 생각 하면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느낌이다.)
연대를 실천하라
최악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 최악이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되는 것을 막는 것이 '나'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변경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 작은 차이가 테두리 밖으로 밀려 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로 다가온다. 이런 게 바로 연대 아닐까?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고, 또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선거에서 발을 빼도 되는가?
이번 선거는 '기회'가 아니다, '때'가 아니다, 이런 말이 많이 들린다. 그러나 현실에서 입맛에 딱 들어맞는 '때'는 거의 오지 않는다. 각성된 민중과 그들과 상호 교감하는 성실, 현명한 정치 세력이 있고, 또 그들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집권할 수 있는 기득권층이 '찍소리'도 못하는 그런 선거 제도가 있는, 모든 '옵션'이 완비될 때가 언제나 올까?
그렇게 '옵션'이 갖춰지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겨우 그 많은 '옵션' 중 한두 개라도 만들어질 것이다. 여러 면과 여러 결을 따라 구성된 현실에서, 그 작고 섬세한 결, 다양한 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 반응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냉소는 대체로 비겁함과 통한다.
난, 전 국민의 마음 어딘가에 사지선다식(또는 오지선다식)의 반듯한 정답을 찍는 수동성이 배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둔다. 마음에 드는 정치인이 나오면 객관식 답 찍듯 찍는 것이 아니라, 개중 괜찮은 정치 세력을 내 성향에 맞게 고쳐나가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다. 정치인이 자기 지지 세력을 실망시키지 않고자 노력하지 않는 현실이 계속되는 데는 절반은 정치권 밖에 책임이 있다.
함석헌 옹의 시처럼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같은 마음을 정치인이 지지자에게 느끼게 하는 것까지는 무리라 해도, 적어도 똑똑하고 날카로운 감시자 역할을 하는 지지자의 눈치를 보게끔 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또 하나. 선거에 대한 이런 냉소는 공교롭게도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과 연결된다. 투표를 처음 하거나 두 번째 하는 이들의 냉소는 '분석해보니 이번 대선이 전망이 없다'는 식의 냉철한 무관심이라기보다는 '지쳐서 아무것도 신경 쓰기 싫다, 난 모른다'는 우울함에서 나오는 무관심에 가깝다.
젊은 세대의 기권이 유의미한 정치적 실천이라고 믿는 사람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이 세대는 투표가 정치적 행위라는 것부터 아예 믿지 않는 자포자기 상태에 멍하고 의기소침하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자, 한 번 더 경고한다. "이번 대선에서 기권 얘기하는 사람, 뒤통수를 때려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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