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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을과의 인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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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을과의 인연 1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34>

답사의 끝에 내린 결론

작년, 그러니까 2009년도 11월부터 다닌 답사가 거의 동이 낫다. 프레시안에 내 걸린 답사기의 제목이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였는데 다니다 보니 꼭히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 아닌 경우도 있었고 중간에 <예마네> 사무실에서 그동안 마을에 대해 이런저런 궁리와 염려가 많았던 인사들을 모시고 집담회도 가져 '마을에 관한 이야기캠프'라는 명목으로 서너 차례 연재에 끼워 넣기도 했다.

이제 마을에 대한 답사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싶다.

마을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동안 만난 사람들과 들은 이야기들은 나에게 소중했다. 미처 내가 마을에 대해 깨닫지 못한 것들을 알게 해 주었고 현장에서의 그들의 삶 자체가 먹물로 가득 찬 나의 삶을 다시 뒤돌아 보게 하였다. 답사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큰 소득이지 않은가?

사실 이번 답사는 서울 문래동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라는 마을 연구소를 만들어 놓고 이 일 저 일을 구상하는 중에 생긴 계획이다. 명분은 마을을 답사 하면서 그 실태를 현장에서 생생히 파악하고 공부를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일단 마을을 답사할 때 그래도 여러 정보나 자료에 의해 파악된 마을을 갔었어야하는 데 그러기에는 초짜로서 연고가 없는 마을을 간다는 게 겁이 났었다.

그래서 연구소의 이름답게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을 먼저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는 예술가들도 여럿 있었다. 또 수소문하기도 하고 농촌에서 활동하는 천규석 선생 같은 분들에게 찾아 갈 마을을 추천해달라고 부탁도 했었다.

또 한가지 마을 답사나 마을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 것은 '녹색평론'이었다. 거기에 추천된 도서들도 빠짐없이 읽는 편이지만 이번 답사의 합천의 서정홍시인도 녹색평론에서 그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째든 마을 답사는 나에게 여러 가지 소득이 있었다. 나 자신의 소득 이외에도 마을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들의 생업인 농업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고 조상 대대로의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가 주민들의 삶 속에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연재에는 마을 답사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정리하면서 미술가로서 나 자신이 어떻게 마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즉 나와 마을과의 인연이 나의 미술운동 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또 내가 화실로 쓰고자 들어간(?) 첫 번째 마을 가평의 두밀리와 요즘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에서 빌린 폐교(대전분교)가 있는 마을, 제천 수산면 대전리의 마을에 대해서도 쓸 생각이다.

그리고 그 동안의 답사와 마을 이야기 캠프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어설픈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마을들에서 우리가 마을 연구라는 미명하에 저지른 민폐에도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마을에서 만난 여러 예술인들과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와 마을과의 인연-1980년대의 나의 농촌그림들 (1)

내가 마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연조가 꽤 오래 되었다. 마을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 사실 나는 태생적으로 도시형 인간이다. 살아온 연조가 그렇다. 평양에서 태어나고 6.25 전 38선을 넘어 부모님에게 업힌 채 남하해 서울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피난가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다시 중학교부터 내리 서울에서 지금까지 살아 온 전력이 아무래도 나는 태생적으로 도시형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한 30년 이상을 공주대에 근무하느라 공주라는 지역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살았지만 내 관심과 활동의 태반은 거대 도시 '서울'에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다가 농촌과 마을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농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80년도부터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이라는 동인활동과 미술운동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아마도 공주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시각적으로 본 농촌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된 게 그 출발인 듯싶다. 이런 농촌의 모습들, 특히 도시화로 이농을 해서 텅텅 비어 가는 농촌의 모습들과 내가 서울에서 살면서 흔히 보는 도시 풍경들이 빚어내는 이상한 충돌, 모순된 이미지들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처음 '현·발' 창립전에 시도한 작품들에 농부들이 나온다. 광고 이미지에 농부의 모습을 중첩시킨 그림들이다. 내 그림 중 가장 많이 알련진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 럭키모노륨'은 그 당시부터 대량으로 건설되는 아파트의 거실에 깔린 장판-럭키모노륨의 광고 사진위에 농부가 모내기를 하고 있는 뒷모습을 오버랩 시킨 그림이다.

이외에도 대형 빌보드 간판이 파고든 산동네 풍경, 톰보이라는 의류 광고지에 나타난 미녀들의 패숀쇼 사진 위에 농부를 등장 시킨 그림(이 그림은 직접 광고지 위에 그리고 본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등 주로 도시의 이미지 위에 농부를 '등장' 시킨 그림들이다.

아니 어떻게 화학 장판지-럭키모노륨이 '풍요'를 창조하는가?

이는 그야말로 도시의 허구화 된 삶을 비판하기 위하여, 또는 산업화의 막장인 도시의 개발 바람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농부를 '등장'시킨 것이다. 자신의 도시적 삶을 자기비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만 하드라도 나 자신이 럭키모노륨이 깔린 아파트형 주거공간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렇더라도 미술가가 '등장'시킨 인물은 그냥 시각적으로 그려 넣은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1988년도에 미술운동에 뛰어 든 이후 처음으로 개인전을 갖는다, 그 때 개인전에 나온 대부분의 그림들이 '마을을 지키는 김씨',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 '한 농부의 일생' 등 주로 농촌과 관계된 그림들이다.

그 당시 이문구 등의 농촌소설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지만 나는 틈만나면 농촌으로 단독여행을 떠났다. 주로 농촌의 들녘이 펼쳐진 호남지역을 많이 다녔다. 진도 지역, 운주사가 있는 화순, 전봉준 생가터 등 역사적인 볼거리와 토속 먹거리를 중심으로 다녔지만 농촌이 점 점 피폐해지는 모습들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농촌의 들녘은 아름다웠지 만 그 안에 살고 있는 농민들은 그야말로 연명의 수준이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빈집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과 마을이 붕괴되고 있다는 현실감이 나를 자연히 농촌의 문제로 몰고 갔다.

이런 위기감은 그 당시 나에게 아주 심각한 영향과 자극을 준 것 같다.

그 이후로 1993년도의 개인전도 주로 농촌 마을이 주제였다. 아예 전시회의 제목을 '땅의 길, 흙의 길'이라고 붙였다. 자본에 의해 거래되는 부동산으로서의 땅이 아니라 생명체가 숨 쉬는 흙에 대해, 또 그 위에 사는 농부들에 대해,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대해 적어도 한 미술가로서 최소한의 사유를 그려낸 셈이다.

나의 삶이 그 흙 위에, 흙을 밟고 사는 삶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어설프긴 했지만 적어도 풍경이 들어가는 그림으로서의 요건은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좋아는 했다.

반성적으로 표현하자면 '농촌'과 '흙'을 시각적으로 대상화 시켰다고나 할까?
그래도 늘 마음속으로 '마을'과 '농촌'을 이상향으로 그리워하고 뭔가 실천할 계기를 찾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바로 가기 : 예술과마을네트워크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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