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그래, 경부운하 가서 '삽질'이나 해야겠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그래, 경부운하 가서 '삽질'이나 해야겠다"

대선, 삐딱하게 읽기 <1> 취업 고민 20대, '확인 사살'한 이명박

2007년 대선을 맞아 <프레시안>은 기존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재를 마련한다. 여론조사의 통계 수치로만 존재했던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기로 한 것. 그간 정치 평론을 독점해 온 40대 이상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정치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새로운' 시각이 오는 대선을 둘러싼 얘깃거리를 더욱더 풍성하게 해주리라 확신한다.
  
  연재의 첫 문은 최근 우석훈 박사와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라는 책을 통해 '88만 원 세대'라는 명칭을 자기 세대에게 붙인 박권일 전 <말> 기자가 연다. 겨우 서른 문턱을 넘은 박 기자는 <말>을 퇴사한 후, 현재는 '백수'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가 처음 '삐딱하게' 보기로 한 대상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이다. <편집자>

  장면 하나.
  
  2006년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취업을 못해 방황하고 있다. 이 친구는 번번이 입사시험에서 미끄러진다. 술을 잘 못 마시던 그가 부쩍 술이 늘었다. 눈가엔 '다크 서클'까지 생겼다. 보다 못한 선배가 '위로주'를 사기로 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덕담이 오고간다. "괜찮으냐?" "더 좋은 데 취직하려 그런 거다" 등. 그러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너 말이야, 눈높이를 좀 낮추는 게 어때?" 말없이 술잔만 비우던 그가, 이 말을 듣고 눈을 부릅뜬다. "차라리 눈알을 파버리고 싶다!"
  
  "지방대생, 운하에 삽질하러 가야 하나"
  
  지금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이런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른바 '청년실업'이라 부르는 사회현상이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다. 1997년 외환 위기(이른바 'IMF 사태) 이후, 정확히는 2000년대부터 취직을 하려는 세대에게 모순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눈높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다.
  
  최근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가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지난 9월 12일 충청남도 목원대 취업박람회장에서 취업을 앞둔 대학생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 후보는 "세계 어느 선진국도 우리와 비교해 비정규직의 수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춰 여러 경험을 살리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관련 기사 : '이명박의 청년실업 대책은?' "눈높이를 낮춰라")
  
  이날 어떤 학생은 '수도권 학생에 비해 지방대 학생의 취업 길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후보는 "여러분이 지방대를 나왔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 중 상당수가 이 발언에 비판적이었다.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 지방대 학생은 분수에 안 맞는 욕심을 버리고 눈을 조금 낮춰 모두 노가다 전선에 뛰어들기로 맹세했습니다." "지방대생 전원 눈 낮춰서 삽 준비하도록. 운하 파러 가야지…"라는 이 후보의 인식에 대한 조롱과, 지방대생의 자조 섞인 댓글도 눈에 띤다.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이 후보의 발언은 마치 '요즘 20대가 철이 없어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다'는 질책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명박 후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해준 것이리라. 그런데 진심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문제다.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의 현실인식이 얼마나 안이하고 몰상식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생 앞에서 낯 뜨거운 거짓말
  
  이명박 후보가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88만원은, 비정규직 노동자 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 임금 평균 비율을 곱한 금액이다. 즉,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신조어다. 필자가 이름붙이긴 했지만, 사실 '88만원 세대'는 20대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이 탄생시킨 단어다.
  
  이 후보는 "세계 어느 선진국도 우리와 비교해 비정규직의 수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2006년 9월 22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5배"라며 "한국 경제가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 섞인 전망을 했었다.
  
  그렇다면 진위를 가려야 한다.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이 가입국 평균의 2.5배라는 IMF의 발표와 "세계 어느 선진국도 우리와 비교해 비정규직의 수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다"라는 이명박 후보의 발언 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할까. 안타깝게도 전자다. IMF의 발표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2000년 11월 발행된 <OECD 옵저버(OECD Observer)>의 한 기사는 "한국에서 정규직 일자리 수는 OECD 국가 중 터키 다음으로 적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형편없는 사회복지 수준이 한국의 생산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설상가상 지금의 한국은 2000년에 비해 훨씬 비정규직이 증가했다.
  
  고의든 아니든 학생 앞에서 대선 후보라는 사람이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한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대통령이 되어야할 사람이 이 정도 사실도 몰랐다는 것은 더욱 낯 뜨거운 일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어른이라면, '88만원 세대'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말해주어야 한다.
  
  이명박 후보야말로 눈높이 낮춰야
  
  2007년 3월 현재 비정규직 규모를 정부는 577만 명(36.7%),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879만 명(55.8%)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결과가 좀 더 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는 정부 통계가 비정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임시일용직' 등을 포함시킨 통계이기 때문이다. 임시일용직은 노동 현장에서 오랫동안 불안정 노동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고 국제적인 기준에 비춰 보더라도 정규직 노동자라 보기 어렵다.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가 특히 '악질적'인 이유는 대체로 비정규직 일자리가 정규직으로 가는 '가교(bridge)'가 아니라 '함정(trap)'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비정규직으로 일단 경험을 쌓다가 정규직의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로 옮겨가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그런데 한국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직업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평생 비정규직만을 전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 이게 문제다. 취업 준비생이 기를 쓰고 정규직 일자리, 괜찮은 일자리만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공히 지적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통계수치를 모르더라도 한국에 살고 있는 성인은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몸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88만원 세대' 역시 미래에 대해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이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경제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명박 후보가 대학생 수준의 실물경제 감각도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실물경제불감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것 같다. 2007년 1월 3일자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자리 문제가 심각하다"는 질문에 이명박 후보는 이렇게 답했다.
  
  "산유국에 일거리가 너무 많다. 나는 70년대 중반부터 20년간 이와 관련된 경험을 갖고 있고 철저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이곳에 눈을 돌리면 내수와 일자리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다."
  
  평생 건설 현장에서 뒹굴었던 이명박 후보다운 대답이다. 하지만 1970년대와 바뀌어도 한참 바뀐 2007년 한국의 일자리 문제를,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다시 일으키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초현실주의적 해법'에 그저 망연할 뿐이다.
  
  이 후보의 발언을 보고 있노라면, 이 분과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지, 혹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정말로 눈높이를 낮추어야할 사람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바로 이명박 후보다. 한국의 경제현실에 이토록 무지한 그에게 대통령직은 너무 과분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는 현재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질주하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이야말로 이명박 후보에겐 '최대의 후원 세력'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대선 관전평이나 하고 앉아 있기엔 현실이 너무 참혹하다.
  
  '88만원 세대'는 리트머스 시험지
  
  정규직,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는 지금 이 시각에도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비정규직은 계속 늘어나기만 한다.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와 달리 지금의 젊은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20대는 창조성도 진취성도 없는 획일적인 생존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승자독식의 법칙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취업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젊은이를 제외한 패자끼리 '개미지옥 게임'을 펼치고 있다. 개미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누구를 밀어 넣을 것인가, 즉 누가 개미귀신에게 가장 먼저 잡아먹히느냐를 놓고 벌이는 잔혹한 게임이다.
  
  개미지옥에 빠진 20대들은 좀 더 늦게 잡아먹히기 위해서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다. 그러니까 이건 패자부활전이 아니다. 고졸, 여성, 장애인 등 약한 사람부터 차례차례 사라지는 참혹한 '배틀로얄'이다. 협동해서 개미귀신과 싸우기보다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치다 차례차례 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미 안정적 일자리에 안착한 기성세대는 20대를 내려다보며 "풍요롭게 자라서 나약하다"거나 "노력을 안 해서 취직을 못하는 것"이라 비아냥거릴 뿐이다. 그 중 진보적인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혹은 보수화된 20대'를 나무란다. 사회 전체가 미래 세대의 숨통을 죄고 있으면서도 욕하고 다그치기만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구조적 현실, 그리고 그것이 불러올 미래를 생각해보라. 이대로 간다면 지금의 20대, 즉 '88만원 세대'는 역사상 가장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다. 불안정성과 획일성이 지배하는 '88만원 세대'에서 성장 동력이 생겨날 리가 없다. 인재의 역량으로 먹고사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특정 세대가 지나치게 가난해진다는 것은 모든 세대에게 치명적이다.
  
  지금 한국은 미래를 살해하고 있다. 미래를 살해하는 사회에 파랑새는 없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에는 IMF 이후 10년간 중첩된 병폐들이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향후 20년의 미래를 묻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승자독식의 경쟁으로 힘을 소진할 때가 아니다. 세대 간 협력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를 공약으로 만들어낸 후보, '88만원 세대'의 고통에서 한국사회의 비전을 끌어내는 후보야말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 2002년 대선의 20대 투표율은 불과 56.5%였다. 지금의 20대는 최소한 2002년을 넘어서는 투표율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