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의 여러 나라에는 여전히 국왕이 존재한다.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등 이른바 서유럽의 선진적인 민주공화국으로 꼽히는 나라들에서 왕은 버젓이 살아 있다. 이들 나라에서 왕가의 일거수일투족은 자국의 국민뿐 아니라 이웃 나라에서도 지대한 관심사다. 왕가에서 결혼이나 장례식 행사가 있으면 그 나라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서도 하루 종일 특별 생중계를 한다. 왕가에 대한 관심은 때로 파파라치 식의 가십거리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왕가와 국민간의 거리를 좁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왕가를 유지하고 있는 서유럽의 주요 나라에서 왕은 민주공화정과 기능적으로 양립하며 성공적으로 자신들을 현대화시켰다. 정치적 실권을 공화정에 넘긴 대신 권위와 위신의 유지를 보장받은 것이다. '권위주의적'으로 행사되지 않는 이들의 '권위'는 국민통합의 중심에서 존경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국민은 하나같이 왕가에 진한 애정을 표출한다. 왕의 생일이나 왕가의 경사가 있으면, 연도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함께 축제를 벌이고 기뻐한다.
한편, 같은 유럽이어도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형성이 한참 늦었던 독일은 이웃 나라와 달리 왕을 지니고 있지 않다. 대신 그 역할을 대통령(President)이 한다. 독일에서 대통령은 정치가들 가운데에서 의석수에 있어서 제1당이 추천한 덕망 있는 인물을 의회의 추인을 통해 선출한다. 얼마 전 타계한 전임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는 사회민주당(SPD)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평생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를 일관되게 펴며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현 대통령인 호르스트 쾰러는 기독교민주당(CDU)의 정치가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지내는 등 대외적으로 높은 정치외교적인 역량을 보인 인물이다.
이웃 나라 왕가만큼의 대중적인 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일의 대통령도 국민 모두로부터 은근한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국정의 상징적 중심에 서 있다. 독일의 대통령은 그들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정당과는 거리를 두며, 살벌한 정쟁의 현장을 한 단계 위에서 바라보고 조율하는 위치에 서서 그에 걸 맞는 행동과 발언을 한다. 대통령이 직설적인 언어나 파당적인 행동을 자제하는 가운데, 권력의 실세인 총리(Kanzler)는 자유롭게 야당에 맞서서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언사를 선거철과 비선거철을 가리지 않고 서슴지 않는다. 특히 전당대회 등 '우리 편'의 행사에서 상대방을 온갖 수사를 동원해 비판하는 것은 상식이며, 국회에서나 제3의 조직에서 갖는 행사에 참석해서도 분위기에 맞추어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한국의 대통령제, 무엇이 문제인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외세가 국모를 살해하고 국왕을 강제로 폐위시키는 비극의 역사를 겪었다. '왕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민중들 스스로 일어나 왕을 단두대에 처형한 프랑스 혁명의 모델과 한편으로는 유사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자각과 도전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차단되는 가운데 왕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에서 프랑스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왕이 사라진 자리에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이 펄럭이며 아직까지 그 정신이 숭고하게 받들어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대한제국의 태극기가 내려진 자리에 일장기가 걸렸고, 그 어색한 깃발 아래에서 '우리의 왕' 대신 '남의 천황'을 섬길 것을 강요받는 세월을 35년간이나 지속해야 했다.
식민의 시대가 간 이후 형성된 분단체제 하에서 남이든 북이든 어디도 제도로서의 왕을 부활시키지 않았다. 양자는 체제의 원리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체제경쟁을 벌였으나 실상 정치 질서상으로는 둘 다 권위주의로 수렴되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체제든 김일성 체제든 자신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두 현대의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의 실체를 부정한 가운데 세워진 통치체제였다. 최고 권력자는 '왕 이상의' 권한을 쥐고 국가를 흔들었고,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으면서 권위주의에 굴복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사회통합을 이루어냈다.
여전히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 가부장적 봉건주의의 퇴행적인 정치 문화가 전 사회를 지배하는 북한과 달리 남한은 지난 20년간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적 자본주의를 향한 노정을 힘겹게 걸어 왔다. 사회 각계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표출되는 민주화는 완성은 아니어도 큰 진전을 보았고, 더불어 권위주의 하에서 비대해졌던 억압적인 사회통합의 기제는 점차 위력을 상실해갔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는 사회 내의 다양한 목소리들의 표출은 가능케 했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러한 목소리 간의 조율을 통해 새로운 민주적 사회통합의 원리를 창출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극단적인 반목과 대결의 정치가 정치권을 지배하며 양보와 합의를 통한 정치문화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단 민주주의의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정치권 전반과 정치가 개인들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나, 단순히 행위자들만 탓하기 이전에 분명 제도 내적으로 한계와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통령제가 아닐까 싶다.
'국가의 왕'과 '당파의 수장' 사이에서
한국의 대통령은 특수로서의 정책지향과 보편으로서의 사회통합의 가치를 한꺼번에 감당하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는 하나의 파당적인 정치적 지향을 가진 집단에 속해 선거로부터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당성을 바탕으로 그 집단이 지닌 정치적 지향의 효과적인 실현을 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파당성을 초월해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적절히' 행사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창출해내는 견인차로서 역할을 할 것을 기대 받는다. 쉽게 말해 국왕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수상의 역할과 왕의 역할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양자를 한 몸에서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참여정부의 경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자신의 역할을 쉽게 말해 수상보다는 국왕 쪽에 맞추었다. 국무총리에게 내정을 맡기면서 자신은 외교와 국방 등 대외적인 업무에 치중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파트너로서 대화를 통해 정책을 꾸려갈 야당과의 언로는 걸핏하면 막히기 십상이었고, 주먹다짐과 날치기 통과에 의존하는 우리 의회의 슬픈 관행은 청산되지 못했다. 대통령은 점잖게 사회통합의 역할에 추진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를 파당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두지 않았다.
이제 노대통령은 국왕보다는 수상 쪽으로 자신의 위상을 옮기려는 전략을 펴는 듯하다. 이러한 전략 이동의 배경에는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반년 앞으로 다가온 임기 말의 상황에서 그가 몸담고 이끌었던 정당이 처참한 분열상을 보이는 가운데, 정권 재창출의 전망이 어두운 쪽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 있다. 임기 말 점잖게 수상보다는 국왕의 역할을 하면서 다가올 선거를 조용히 맞이한다면 모양새가 좋으련만, 그의 다급한 정치적 상황은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자신의 지향을 갖도록 이끌고 있다. 그 가운데 사회통합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민주화의 가치에 비해 밀려나게 되고, 공정한 선거관리자로서의 역할보다는 선거전의 한가운데에서 싸움꾼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된다.
분명 임기 말에 대통령이 '설치는' 모습은 우리의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왠지 낯설다.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 3당 합당의 위력을 등에 업고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자당의 후보가 권력 재창출을 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설칠 필요가 없었다. 이어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국란에 처하거나, 임기 말 친인척 비리에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자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계승할 후계자들이 분열되어 앞이 불투명하고, 도덕적으로도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거리낄 것이 없는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조용히 침몰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임기종료를 반년밖에 남기지 않은 시점까지 굳이 '프로블램킨트(Problemkind)'로 낙인찍히면서, '사회통합보다는 민주화를' 외치며, '왕이 되기보다 수상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려는 대통령의 모습은 솔직히 지켜보기 안쓰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가 합법적으로 점유한 5년의 임기 안에는 분명 권력 교체기를 맞이하여 그가 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수상이 되겠다고 '설칠' 수 있는 권한까지도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는 애당초 우리의 대통령제에 내에서 언제든지 표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고,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떠한 세력이 정권을 잡아도 마찬가지다.
미래가 희망적인 야당이야 선거중립의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작은 흠도 걸고넘어지며 그에게 도덕적인 압력을 가하고 싶겠으나, 그에 대한 반응은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융단폭격과 같은 비판의 목소리를 일제히 퍼부으며, 마치 이성을 상실한 사람으로 대통령을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는 보수언론과 야당도 결국 우리의 대통령제가 애당초 갖고 있는 제도적인 특수성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모습은 아니다.
국민이 투표로 판단케 하자
이제 기왕에 막판까지 시끄러울 것이 예상된다면, 고발이나 낙인찍기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 시점에서 어려운 제도의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보다, 끝까지 정책과 관련한 논쟁을 중심으로 최대한 페어플레이를 통해 선거전을 치러 나가는 데에 경주하는 것이 어떨까. 정녕 선거에서 승리할 정당이라면 정공법을 통해서 충분히 승리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대통령의 선거개입이 부당하고 그의 주장이 정말로 잘 못된 것이라면, 야당이 고발을 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이에 대한 의견을 표출할 것이다. 선거법이든 헌법이든 제도의 문제야 차기 정부에서 정당들이 이미 함께 약속한 개헌의 과정 때 논의해도 늦지 않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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