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대통령제 국가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은 '법령에 의거해'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해야 한다(정부조직법 제11조 제1항). 2004년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대통령에게 헌법을 수호해야 할 책무를 지우고 있음을 근거로, '대통령이 법치와 준법의 상징이라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이라고 밝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 대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당연히 법령에 의거해 관계 장관을 지휘· 감독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대통령 맘대로 바꿀 수 없다
가축전염병 예방법에는 쇠고기의 살과 뼈가 '지정 검역물', 즉 수출입 검역대상물로 명시돼 있다. 또 이 법은 농림부 장관이 이 지정 검역물의 수입위생조건을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이 법은 20명 이내의 축산·수의 전문가들로 가축방역협의회를 구성해 농림부 장관의 자문에 응하도록 하고 있다. 가축방역협의회의 의결은 구성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정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농림부 고시는 총 8단계에 걸쳐 수입 검역대상물에 대한 '수입 위험 분석'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수입 허용 가능성 검토 → 수출국 정부에 가축위생 설문서 송부 → 가축위생 설문서에 대한 답변서 검토 → 가축위생 실태 현지조사 → 수입 허용 여부 결정 → 수출국과 동물·축산물 수입위생조건 협의 → 수입위생조건 제정·고시→ 수출작업장 승인 및 검역증명서 서식 협의' 등 이 모든 단계들을 통과해야 수입 위험 분석이 끝나는 것이다.
지난해 3월 농림부 장관이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조건을 변경하면서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살코기의 수입을 전면 허용한 것은 이처럼 법령에 정해진 여러 단계의 절차를 모두 밟은 것이었다.
'대통령이 한미 FTA 체결 위해 법령 어겨도 된다'는 법리는 없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을 위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 관한 협상에 성실히 임할 것이라는 점"과 "협상에 있어서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권고를 존중해 (쇠고기 시장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개방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구두 약속으로 확인해 줬다.
물론 한미 FTA는 국가의 중대사이고,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그 중대사를 위해 그 정도의 구두 약속은 미 국 대통령에게 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구두 약속의 내용과 의미다. 이 점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한미 FTA와 같은 통상 현안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법률을 어겨도 된다'는 법리는 없음을 분명히 짚고 가자.
2004년 대법원은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과정에서 대북송금을 했던 것을 처벌하면서 "어떤 국가 행위나 국가 작용도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그 테두리 안에서 합헌적·합법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2002년 서울행정법원도 중국산 마늘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 관련 판결에서 "통상정책에 대한 중앙행정기관장의 판단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무역위원회의 주장을 물리쳤다.
'협의의 기회를 주겠다' vs. '성실히 협상에 임하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구두 약속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미국과 성실히 '협상(negotiation)'에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런데 '세계무역기구(WTO) 위생검역(SPS) 협정'에 따라 미국은 한국의 현행 위생검역조건에 대한 '협의(consultation)를 요청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은 미국에 협의를 위한 '적절한 기회(adequate opportunity)'를 제공해야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이처럼 협의의 기회를 주는 차원을 넘어 "성실히 협상에 임하겠다"고 약속했다. '협상'은 '협의'와는 다를 뿐더러, 이런 단어 선택은 한국의 현행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의 변경이 가능함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확인했듯, 개별 수입위생조건의 변경이 필요한지 여부는 가축방역협의회의 의결과 농림부 장관의 결정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미리 개별 수입위생조건을 변경하겠다고 대외적으로 약속할 수는 없다.
국제수역사무국(OIE)이란 단어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기까지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정부가 향후 협상을 할 때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권고를 존중해' 합리적인 수준으로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노무현 대통령이 구두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국제수역사무국'이란 우리말로 풀면 국제 동물 질병 사무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OIE'라는 국제기구의 일본식 번역어로서,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매우 낯선 단어였다. 아직도 이 단어를 국제'무'역사무국의 오타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생경한 단어가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 축산업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
2003년 미국 축산업이 광우병 발생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자, 미 축산업계는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광우병 발생 국가라도 일정 조건 하에서는 뼈가 없는 살코기를 수출할 수 있도록 국제수역사무국이 권고안(가이드라인)을 개정하도록 전방위로 압박을 가했다.
이같은 미국의 노력은 2004년 5월 총회에서는 좌절됐다. 그러나 2005년 6월 총회에서는 마침내 성공했다. (한국은 2004년과 2005년 총회에서 모두 이같은 미국의 요구에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의 축산업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새 가이드라인에서 미국의 광우병 위험 등급을 '위험 미결정 등급(undetermined risk status)'에서 '위험 관리 등급(controlled risk status)'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미국 축산업이 이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지난해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런 미국의 수를 정확히 읽지 못한 채, '한미 FTA의 선결조건'으로 서둘러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허용해 줬다.
하지만 미국의 축산업자들은 한국의 수입위생조건을 잘 지켜 살코기를 수출하기는커녕, 뼛조각이 포함된 쇠고기를 수출했다. 이들은 이제 한국에 수입위생조건을 또 변경하라고 요구하며, 선적 중단 등 집단행동에까지 나섰다.
이런 이들을 더욱 고무시킨 것은 지난 3월 초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제수역사무국 과학위원회가 미국, 캐나다, 대만, 브라질, 스위스, 칠레에 '광우병 위험 관리 등급을 부여할 수 있다'는 내용의 평가서를 제출한 것이었다. 이들은 오는 5월 열리는 국제수역사무국 총회에서 미국의 광우병 위험 등급을 상향할 것이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국제수역사무국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한 국가가 위험 관리 등급을 받으면 척추뼈, 머리뼈, 뇌 등 특정위험물질(SRM)을 제외한 대부분의 쇠고기를 수출할 수 있게 된다. 미국 축산업계가 그토록 갈망하던 갈비뼈 수출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구두 약속, 현행법 위반 소지 있다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국제수역사무국의 권고를 '존중해' 합리적인 수준으로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시 대통령에게 구두 약속으로 확인해 준 것이다.
노 대통령의 구두 약속에 대해 미국 측 협상대표였던 캐런 바티야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는 한국이 '국제수역사무국의 표준을 준수(complying with OIE standards)'하기로 약속했다고 해석했다.
물론 이같은 미국 측 해석을 우리가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발언은 노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현행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현행 위생검역 협정과 친하지 않은 '존중'의 의미다.
이같은 노 대통령의 구두 약속은 현행 가축전염병예방법을 위반한 소지가 있다. 현행 수입위생조건은 지난 2005년 3차례의 한미 광우병 전문가 협의회 및 미국 현지조사, 그리고 2차례의 가축방역협의회 등 법령이 정한 절차를 다 거친 후, 농림부 장관이 한국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 수준에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OIE 기준 따라야 할 이유도, 책임도 없어
각 나라는 고유한 풍토와 식생활을 가지고 있다. 한국처럼 소뼈를 고아 먹는 민족에게는 그에 적합한 위생검역기준이 필요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WTO 위생검역 협정은 국제수역사무국의 가이드라인을 기초로 회원국 간의 조화를 도모하되, '회원국에 대해 [자국민 건강과 생명의] 적정 보호수준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without requiring Members to change their appropriate level of protection)'라고 명시했다.
또 WTO SPS 협정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경우, 한 나라가 국제수역사무국의 기준보다 '더 높은 보호 수준(higher level of sanitary or phytosanitary protection)'을 설정할 권리를 부여했다.
1997년 WTO 판례도 국제수역사무국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모든 회원국이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이 판정에 따르면 회원국이 국제수역사무국의 기준보다 더 엄격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자국만의 독자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자율권(autonomous right)'에 해당한다.
따라서 농림부 가축방역협의회의 자문을 거쳐 농림부 장관이 정한 현행 수입위생조건에 과학적 근거가 있다면, 한국은 오는 5월 국제수역사무국 총회에서 미국의 광우병 위험 등급이 상향 조정된다 해도 한국의 수입위생조건을 변경해야 할 하등의 통상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게다가 농림부는 지난해 3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발표하면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하지 않았는가?
OIE도 '미,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앞서 언급된 국제수역사무국 과학위원회의 최근 평가서는 미국의 광우병 위험 등급의 상향 조정 가능성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당시 국제수역사무국은 미국에 대해 평가에서 '광우병 유발 인자를 보유한 가능성이 있는 원료가 동물용 사료로 이용되고, 또 광우병 교차오염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이 동물용 사료에서 특정위험물질(SRM)을 제거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국제수역사무국은 미국에 2006년 사료규제조건이 어떻게 관리되고 점검되는지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에 따르면 대통령은 법치와 준법의 상징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구두 약속은 현행 수입위생조건의 변경을 약속한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이는 부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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