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세계에서의 표절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의 책을 쓰면서 정작 본인들은 외국 서적을 그대로 표절해 비난을 자초했던 자연과학계의 원로 교수들이 문제의 책을 쓰게 된 경위와 사후 수습방안 등을 담은 이메일을 이 사안을 처음 제기한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문제의 서적 <탐욕의 과학자들>(일진사 펴냄)의 4명 공저자들 가운데 표절이 확인된 민영기 경희대 전 교수와 박택규 건국대 명예교수는 4일 두 사람 공동명의로 된 이 이메일에서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다"며 "책을 회수하고 판매를 중단하도록 출판사에 요구함과 동시에 앞으로 저술 활동을 접겠다"고 밝혔다.
이들과 출판사 측의 경위 설명을 종합할 경우 외국서적 및 국내 번역서의 저작권에 대한 무감각이 이번 일을 낳은 주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로 부각돼 앞으로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워…저술 활동 접겠다"
민 교수와 박 교수는 "결과적으로 변명 비슷하게 되었지만 <탐욕의 과학자들>을 집필한 경위를 설명하겠다"며 집필 과정도 자세히 밝혔다.
이들은 "학교를 정년퇴직하고 시간도 있던 차에 (필자) 네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필자 중의 한 명인) 겸지사의 정해상 사장이 이 출판사에서 전에 발행했던 니콜라스 웨이드 기자 등이 쓴 <Betrayers of the Truth>의 번역본인 <배신의 과학자들>이 지금 시대에 딱 맞는 내용이니 그와 비슷한 책을 하나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정 사장을 비롯한 출판사 관계자들은 <Betrayers of the Truth>를 번역한 책이 오래 전에 절판돼 그 내용의 일부를 편집해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언급했다"며 "그래서 책의 일부를 편집해서 사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이들은 "단, 처음부터 저술이 아니라 편저로 생각했기에 '편저'로 표시할 것을 출판사에 부탁했다"고 덧붙였다.
"절판된 좋은 책 내용 소개하려는 순수한 마음에…"
이들은 이어서 "책이 나온 후에 보니 (표지에) '지음'으로 돼 있어서 다시 '편저'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면서 "그러나 출판사 측에서 책 표지를 바꿀 수 없다고 해 표지에 띠지를 둘러 '편저'로 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교보문고 등 서점에서 유통되는 책에는 띠지가 없는 상태다.
이들은 또 "(정해상 사장이) <Betrayers of the Truth>를 인용했음을 <탐욕의 과학자들>에 표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실수로 그런 사실을 빠뜨리게 된 것 같다"며 "우리는 본문 원고만 넘겨줬고 머리말과 부록은 정 사장이 알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탐욕의 과학자들>이 나온 지 한 달여 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Betrayers of the Truth>를 번역·출판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만일 우리가 이를 알았다면 당연히 책의 출판을 취소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절판된 책의 좋은 내용을 소개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편저의 형태로 그 책의 일부를 소개했는데, 그 책이 다시 번역돼 나오면서 문제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어쨌든 우리들의 불찰로 이런 무리가 빚어진 것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이번 일은 학자적 양심으로 70여 년을 살아온 우리에게 큰 오점으로 남겨졌고, 그 명예의 실추는 뼈를 깎는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회한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탐욕의 과학자들> 기획자 "저작권에 신중히 판단 못해"
한편, <탐욕의 과학자들>을 최초로 기획하고 공저자로도 참여한 정해상 겸지사 사장도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들과 대동소이하게 경위를 설명했다.
정 사장은 "애초 출판사에 편저라는 사실을 알렸으나, 출판사에서 그런 언급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지 않다"며 "나중에 책이 나온 다음에 필자들이 강하게 요구해서 띠지에 편저라고 넣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사장은 이어 "<Betrayers of the Truth>의 원서가 나온 지 20여 년도 지났고 번역서도 절판된 터라, 그 좋은 내용을 편저 형식으로 소개하는 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애초 교수들에게 책의 내용을 소개할 것을 권하면서 저작권에 대해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한 것은 불찰"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출판사 측은 당초 "필자들의 양심을 믿어 책의 내용에 대한 검토는 따로 하지 않았고, 책이 나온 뒤에야 편저로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명했었다. 그러나 <탐욕의 과학자들>을 담당한 편집자는 5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 과정에서 말을 번복했다.
그는 "정 사장이 편집장에게 편저 형식으로 출판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그게 출판사 내부에서 공유가 제대로 안 돼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며 "본문 중에도 <Betrayers of the Truth>에 의존했다는 식의 문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도용한 원고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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