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유엔(UN)의 '글로벌 콤팩트'에 관한 글을 쓰다가 이에 참여한 한국의 기업과 NGO를 확인해보니, 기업 12개와 NGO 2개 등 모두 14개의 기업 또는 NGO가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참여 기업은 공기업이나 은행이 대부분으로 삼성, 현대, SK, LG, 두산 같은 내로라는 대기업은 하나도 없었다. 나이키, 마이크로소프트, 도시바, 후지제록스, 코카콜라, 휴렛패커드 같은 굴지의 대기업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과는 대조적이었다.
삼성의 '무노조' 정책에서 잘 드러나듯이 인권, 특히 노동권에 지독한 반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위한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명시한 UN 글로벌 콤팩트에 참여하지 않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원리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우리나라 대기업들에 기대하느니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UN 글로벌 콤팩트에 참여한 일부 기업들의 면면을 훑어보노라니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오히려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개발 광풍을 주도하면서 환경을 파괴해 사회의 공적으로 지탄받고 있는 한국토지공사와 한국도로공사가 참여기업 명단에 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사기업보다 심한 토공·도공
지금 우리나라가 개발 광풍에 휩싸여 있음은 세 살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말이 좋아 '개발'이지 사실 무지막지한 '파괴'에 다름 아니다. 멀쩡하던 산하가 토지공사의 무차별 개발로 황무지로 바뀌고, 그 황무지에 도로공사가 길을 내고, 주택공사가 아파트를 짓는다. 토지공사, 도로공사, 주택공사 덕택에 대한민국 어딜 가나 공사판이고, 아파트촌이다.
그런데도 시장을 관장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 밤새 졸았던지, 자고 일어나면 아파트 값이 '억억'하며 오른다. 대도시 주변의 풍광 좋은 땅이 갈아엎어지고, 그 위로 길이 뚫린다. 길이 뚫린 곳엔 어김없이 아파트가 들어서고, 아파트가 들어선 곳엔 투기꾼들이 파리 떼처럼 꼬여든다. 투기 광풍의 선봉엔 토지공사와 도로공사와 주택공사가 있고, 그 뒤를 대기업 건설사가, 그리고 그 뒤를 중소건설사가 따른다.
건설 투기에 공기업이 사기업보다 한 술 더 뜬다. "공급만 늘리면 집값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 반쪽짜리 경제학 소신을 가진 고급 관료를 등에 업은 건설 공기업들은 나라와 개인 땅을 싼 값에 사들여 비싸게 팔아넘기는 수법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토공의 땅값 사기
지난 17일 감사원은 2004~2005년 토공이 진행한 김해 율하, 용인 흥덕 등 8개 택지개발지구 중 택지조성원가를 기준으로 분양한 택지 52만7000평에서 분양가가 99억 원 과다 산정됐다고 밝혔다. 사실 이건 '새발의 피'다. 감사원은 2003년에도 토공이 땅값을 400억 원이나 부풀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부기관이 내놓은 자료가 그렇다는 것이고, 경실련 등 시민단체의 추산으로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넘어선다.
토공은 그 동안 서민주거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규모의 환경파괴를 자행해 왔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집 없는 서민들의 등골만 빠졌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토공이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국가정책을 등에 업고 국민의 주거권을 짓밟고 합법을 가장한 부패를 일삼아 왔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런 토지공사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하는 UN 글로벌 콤팩트를 준수한다고 선언하고 말았으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그 뒤를 따라 환경파괴에서는 난형난제(難兄難弟)인 도로공사도 올해 UN 글로벌 콤팩트에 덜컥 가입하고 말았다.
돋보이는 전경련의 '솔직함'
UN 글로벌 콤팩트는 인권, 노동권, 환경, 반부패 등 4가지 영역의 10개 원칙으로 이뤄져 있다. 환경 영역은 7, 8, 9번의 3개 원칙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원칙7. 기업은 예방(보호) 차원에서 환경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 원칙8. 기업은 환경에서 더 많은 책임을 지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 원칙9. 기업은 환경 친화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확산시켜야 한다.
UN 글로벌 콤팩트 참여 결정을 내리면서 토공과 도공은 위의 원칙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예방 차원의 환경보호, 환경에 대한 더 많은 책임, 친환경적인 기술 개발에 앞장서겠다는 토공과 도공의 말을 믿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토공과 도공이 그동안 해 온 사업과 지금 하고 있는 사업과 앞으로 해나갈 사업 가운데 환경보호와 어울리는 게 얼마나 있을까. 가입 1년을 넘긴 토공이 무지막지한 개발업자의 관행을 벗어나 환경을 고려한 건설사업을 벌인 사례는 얼마나 될까.
2005년 한국의 대기업들을 대변하는 전경련은 UN과의 협의를 통해 UN 글로벌 콤팩트에 참여하려 했으나 글로벌 콤팩트의 노동권 보장 원칙이 '수석' 회원사인 삼성의 무노조 정책과 정면충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참여를 포기했다. 이런 행위를 잘 했다고 칭찬할 순 없겠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할 수 없다"는 솔직함까지 나무랄 순 없을 게다.
서민 주거권 짓밟고도 인권?
인권에는 주거권도 포함된다. 토공은 서민들의 주거권을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나. 토공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살기가 도는 국민들이 부쩍 늘었다. 뇌물을 주고받는 것만 부패일까. 저가의 땅을 고가에 팔아넘겨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하는 행위는 부패가 아닌가. 더군다나 그런 치졸한 행위를 공기업이 하고 있다면 그런 류의 공기업에게 부패의 딱지를 부치는 게 과도한 걸까.
도대체 토공과 도공의 어느 사업과 어느 행위가 환경의 가치를 강조하는 UN 글로벌 콤팩트의 원칙과 부합하는 것일까. 토공과 도공에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단체교섭을 매년 하고 있으니 글로벌 콤팩트의 노동권 원칙이나마 준수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토공과 도공을 위해 일하는 하도급 건설노동자들의 노동권 문제에 대해 원청업체인 토공의 노사가 한번이라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준 적이 있던가. 그것도 사기업도 아닌 공기업의 노사가 말이다.
UN 글로벌 콤팩트에 먹칠 말아야
UN 글로벌 콤팩트는 정치적 강제력이나 법률적 구속력을 가진 국제조약이 아니다. UN이 민간부문에 권유하는 자발적인 성격의 '신사협정'일 뿐이다. 2000년에 본격화됐으니 역사도 짧다. 그렇다보니, UN 사무국에 제출하는 홍보물만 잘 만들면 글로벌콤팩트의 원칙을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UN 글로벌 콤팩트를 "국제적 립서비스"라고 평가절하한다. 인권과 노동권을 유린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교묘하게 부패를 저지르는 기업이나 단체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UN의 음모라는 극단적인 비난도 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지 토공은 2005년 10월에, 도공은 2006년 11월에 UN 글로벌 콤팩트에 각각 참여했다. 국내에선 땅 투기와 환경 파괴에 앞장서면서 국제사회에 대고 '립서비스'만 하는 토공과 도공을 보면서 노동권 보장이 싫어 UN 글로벌 콤팩트에 불참한 전경련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경련의 '솔직함'이 우러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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