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막 시작된 지난 9월 28일 여러 일간지들에 '농업은 나의 어머니입니다'라는 제목을 단, 배종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농업분과장의 편지가 광고 형식으로 실렸다. 정부는 이 광고를 통해 '한미 FTA로 인한 농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면서 한미 FTA 지지를 호소했다.
이런 감정 어린 호소에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농업 부문에 피해가 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 이런 호소는 '농업의 피해를 막기 위해 다른 산업부문의 이익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판단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전제들 위에서 우리 정부가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선언한 지난 2월 초 스위스는 '국내 농업을 위해 미국과의 FTA를 포기한다'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문화방송(MBC)의 해외시사 프로그램 <W>(매주 금요일 밤 11시 55분)는 17일 '스위스 FTA, 4% 농민을 살려라' 편에서 스위스 정부가 어쩌다가 한국 정부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됐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협상결렬 배경, 그 이면을 들춰 봤더니…
스위스가 농업 문제에 대한 이견를 좁히지 못해 미국과의 FTA 협상을 접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농업 분과의 농산물 개방 방식에 관한 협상에서 스위스는 포지티브(선별주의) 방식을 원했지만 미국은 네거티브(포괄주의) 방식을 선호했다. 또 스위스는 유전자조작(GM) 식품에 별도의 라벨을 붙이자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스위스 국민들의 발의로 '유전자조작 동·식물의 국내 사육·재배를 허용할 것이냐'를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56%의 유권자가 '추가로 5년 간 허용 유예'에 표를 던졌다. 이 결과에 승복해 스위스 정부는 미국과의 FTA 협상을 접기로 했다.
<W>는 '스위스 FTA, 4% 농민을 살려라' 편에서 이런 협상결렬의 배경에는 결국 한 나라의 농업을 어떻게 볼 것이냐, 나아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나라의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옳으냐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프로그램은 세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진다. 농업이 국민총생산(GDP)에 기여하는 비중이 미미할 경우에도 굳이 농업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가. 국민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 통상협정을 포기할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나. 정부가 판단하기에 너무나 좋은 것인데도 다수의 국민들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위스 헌법에는 농업의 중요성이 규정돼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스위스는 농업이 농산물을 생산하는 직접적인 기능 외에도 환경 및 생태를 보호하는 기능, 경관을 보호하는 기능 등 경제적 가치로는 정확히 측정되지 않는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국 농민들에게 이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직접지불제' 형식으로 지불하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농업 종사 인구는 스위스 전체 인구의 4%인 6만5000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농민을 대표하는 '스위스 농민연맹'의 자크 부르주아 회장은 <W>와의 인터뷰에서 "스위스 헌법에서 농업이란 단지 농산품을 생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연풍경을 보존하고, 국토를 보살피며, 스위스의 중요한 관광산업과도 연관된 것으로 규정돼 있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농업을 다른 산업들과 차별화시켜 보는 이런 관점이 스위스 헌법에 규정돼 있다고 그는 말했다.
또 스위스 국민들은 아직 그 안전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유전자조작(GM) 농산물이 미국과의 FTA를 계기로 자신들의 식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미국 농산물 가운데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이기 때문이다. 취리히 공과대학(ETH)의 그뤼섬 교수는 "유전자조작 생산물은 안전하다"고 주장되고 있지만, 프로나투라와 같은 스위스 환경단체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스위스 환경뿐 아니라 인체와 농업에까지 해를 입힐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에 대한 판단은 국민투표라는 형식으로 스위스 국민들에게 맡겨졌다. 스위스의 권위지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의 마르쿠스 슈필만 대표이사는 <W>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의회나 정부가 유전자조작 식품의 생산을 중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국민투표가 그런 결정에 반대하면 국민투표 결과가 우선한다"면서 "국가 최고의 권력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한 김상균 PD는 "스위스의 국민투표는 적은 인구 때문에 가능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우리도 나라의 경제적 틀을 결정할 FTA와 같은 국가대사와 관련해선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묻는 태도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스위스와 미국, '농업' 뺀 새로운 경제협력 협상 중
다시 '스위스 FTA, 4% 농민을 살려라' 프로그램이 따져본 세 가지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정부는 이 질문들에 어떤 답을 내놓고 있나.
농업이 GDP에 기여하는 비중이 낮다면? "경쟁력 없는 산업은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통상협정을 포기할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광우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쇠고기라도 먹어야 한다." 한미 FTA에 대한 찬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칠 의향이 있는가? "정부가 알아서 잘 할 테니 그럴 필요 없다." 이것이 우리 정부의 답변이다.
스위스와 한국은 닮은 점이 꽤 많다. 스위스와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77%와 70%로 둘 다 높다. 스위스도 한국처럼 수출대상국 2위가 미국이다. 스위스도 한국처럼 농업이 취약한 G10(농업협상 때 같은 목소리를 내는 주요 농산물 수입 10개국)에 속해 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우리나라는 스위스와 다르다"는 주장만 되풀이 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5월 박원화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의 말을 인용해 "스위스는 2005년 투명도지수에서 노동표준 1위, 경제자유도 3위, 투명도지수 3위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수준이 높아 미국과의 FTA 체결을 통해 질적 성장을 도모할 소지가 별로 없지만, 우리나라는 경제수준이 뒤떨어지는 만큼 한미 FTA를 통해 경제, 사회 각 분야를 선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스위스-미국 FTA 협상이 중단된 후 스위스와 미국의 관계는, 특히 통상관계는 악화됐을까? 그렇지 않다. 스위스는 현재 미국과 농업 부문을 배제한, FTA가 아닌 다른 형태의 경제협력에 대한 협상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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