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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에 드리운 맹목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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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에 드리운 맹목의 그림자

[한미FTA 뜯어보기 128 : 창비 주간논평] 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할 때

참여정부를 자칭하는 정부의 FTA 홍보책임자에게서 한미 FTA 협상개시가 '고도의 통치행위'였다는 자평을 듣는 것은 거북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온 국민의 현재와 장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한미 경제통합 협상은 별다른 국민적 동의절차 없이 '도둑처럼' 시작됐고, 일사천리로 4차 협상까지 강행되고 있다. 정부의 강한 드라이브에 반신반의하며 협상을 지켜보던 이들도 있었지만, 4차 협상이 마무리된 지금 정부가 약속한 개방의 장밋빛 미래는 그리 명쾌하지 않다. 도리어 미국의 양보가 가능해 보이는 분야는 매우 적은 반면, 한국은 체계적인 개방압력에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다.

협상개시 선결조건의 하나로 수입재개에 합의했던 쇠고기가 광우병 위험에서 전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보도가 불안을 키운다. 상품 분야만 보더라도 핵심쟁점인 미국의 비관세장벽 해소와 반덤핑제도 적용 유보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반면, 농수산물 분야의 추가개방을 약속하고도 추가적 개방압력에 직면해 있다. 자동차 세제, 섬유 원산지 표시 등의 문제에서도 수세적인 협상쟁점이 바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투자, 전자상거래, 지적재산권 분야에서도 부처간 이견이 뒤늦게 표출되거나 협상주체들조차 미국 측 공세에 대응논리를 마련하지 못해 허둥거리는 모습도 드러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협상태도에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 혹은 '관철되지 않으면 협상을 접을 그 무엇'이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협상전략의 일환'이라기에는 협상대표단의 뒤가 너무 허전하다. 협상개시 전에 각계각층과의 대내협상을 통해 사전조율된 정교한 공격목표나 방어목표가 없는 것이다. 부처 간의 이견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5차 협상부터 이루어질 이른바 '빅딜'이 걱정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정부가 내년 상반기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그렇지만 모든 조항이 국내법적 효력을 갖는 책 서너권 분량의 최종타결안을 가져와 '예' 혹은 '아니오' 중 하나만을 택하라고 강요하는 상황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경험대로라면 정부는 "만약 이 협상안이 거부된다면 한미동맹에 치명적 균열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국회와 국민에게 양단간 선택을 종용할 것이다.

정부의 고삐 풀린 질주에 대해 국회는 헌법에 부여된 역할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임의 절반은 정부에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국회 자신의 몫이다. 지난 7월 이후 뒤늦게 구성된 국회 내 '한미FTA체결지원특위'는 이미 협상의 일정과 내용을 통제할 능력과 권한을 상당히 포기한 채로 만들어진 논의틀이다. 제대로라면 이 특위는 협상개시 수개월 아니 수년 전에 만들어져야 했다. 유보안 외의 모든 것이 자동개방되는 포괄주의(negative) 방식의 서비스투자협상에 대비하려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소수의 특위위원을 제외한 상임위의 활동은 대개 쟁점을 따라잡기에 급급한 수준이다.

현재의 한미 FTA 협상은 '대의제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독주가) 도대체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지난 봄 보수언론들은 한 진보학자가 한미 FTA 추진을 비판하는 글에서 "공화국의 민주주의와 주권을 지키자"고 주장한 것을 지목해, 북한식 표현을 사용하여 친북적 입장에서 반미를 선동한다고 호도했다. 그러나 독단적인 한미 FTA 추진이 '대한민국 헌법 1조에 표시된 민주공화국'의 근본을 위협하는 위헌적 행위라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당대와 후대까지 미칠,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선택권의 박탈은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권리의 침해인 까닭이다. 헌법이 부여한 국민저항권은 바로 이런 사태를 위해 마련된 민주적 권리 개념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하다.

한미 FTA 협상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무언의 자동 동의장치'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미국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미 FTA는 경제협상이지만 철저히 '안보담론'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 미국문제는 정치·군사적 의미에서든 경제적 의미에서든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민주주의의 후퇴, 경제적 손실쯤은 '안보'의 이름으로 생략해도 괜찮다고 치부된다. 그리고 안보를 위해 지불해야 할 불가피한 권리침해와 손실은 '개방'이라는 또다른 미국식 마법장치가 자동으로 해결 혹은 보상해줄 것으로 간주한다. 오죽하면 미국의 한 싱크탱크가 한국 내 안보불안을 활용하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는 분석보고서를 냈겠는가! 북한 핵실험은 맹목의 미국추종 이데올로기를 더욱 거칠게 작동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한미 FTA를 이데올로기나 신경안정제가 아닌, 현실의 경제협상 문제, 민주주의 문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 지식사회와 국회의 역할이 막중하다. 입장을 분명히 밝힐 때다. 협상진행을 더 두고보자는 주장은 한미 간에 예정된 협상 일정이나 방식의 역진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지적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표현일 뿐이다. 한미 FTA에 반신반의하고 있는 국민여론 앞에 국회와 전문가들이 책임 있는 태도로 거래의 한계, 협상의 레드라인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이미 선을 넘어버린 무책임한 한미 FTA 협상의 위험성을 적극 지적하고 고발해야 한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운동진영의 실천전략도 더욱 현실화하고 연대의 폭을 유연하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미 FTA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여러 갈래와 편차가 있어 왔다. FTA 자체를 신자유주의의 일환으로 보고 모든 FTA에 반대하는 입장, 한미 FTA가 가져올 총체적 대미종속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입장, FTA를 경제정책의 한 수단으로 보지만 한미 FTA가 추구하는 높고 포괄적인 개방에는 반대하는 입장, 졸속추진과 준비부족으로는 원하는 협상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념적 선명성이나 입장차이를 앞세우기에 한미 FTA는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다. 무작정 신중히 대응하기에는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타결해야 한다는 맹목론의 확산이 예사롭지 않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반대론과 신중론, 사회단체와 개인들이 폭넓은 유기적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단일한 기구, 단일한 깃발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서로가 다양한 위치에서 개방의 신앙이 초래할 양극화의 위험을 지적하고, 막연한 안보 대신 민주주의를 요구함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지켜내야 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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