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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생환 , 자학과 자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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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생환 , 자학과 자만 사이

[화제의 책] 권태준의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왜 성난 얼굴로 뒤돌아보는 것에만 그토록 열중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한국 근현대사의 재인식'과 관련한 논쟁에 불을 지핀 책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권태준 지음, 나남출판 펴냄, 2006)가 출간된 지 한 달이 넘었다.

저자인 권태준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정책학)는 6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서구에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한두 세대 안에 이뤄낸 한국의 근현대사를 발전국가론, 식민지근대화론 등과 같은 서구이론의 잣대를 들이대 폄하한다고 비판했다.

권태준 교수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의 '나라 만들기'는 독재정치가 아니라 한국 국민들에게 국가라는 개념을 인식시키는 과정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도 분단의 상처로 신음하는 가난한 나라를 강하고 부유한 국가로 키우기 위한 중화학공업 추진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재벌은 '중상적 부관'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맡았을 뿐이었다.

권태준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는 20세기 세계화 논리에 서구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이전의 중상주의를 적용한 '의제(擬制) 자본주의'의 역사라고 결론 내린다.

참여사회연구소장인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가 이 책의 서평을 보내왔다. <편집자>


근래 우리 근현대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자는 논의들이 활발하다. 여러 요인들이 겹쳐 이런 현상을 낳았다. 무엇보다 지난 2005년 해방 60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한일조약 40주년, 그리고 5월 민중항쟁 25주년 등 가히 '역사의 해'라 할 만큼 시대의 마디를 구획한 굵직한 사건들이 중첩되면서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그 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포괄적 과거청산'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정부가 본격적 과거청산 작업에 착수한 것이 우리 근현대사를 둘러싼 '기억투쟁'을 불러일으켰다.

또 참여정부의 무능과 실정, 특히 사회경제 정책에서의 실패가 불행히도 현 정부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약속과 전망에 대한 대중의 실망으로까지 번지면서 이런 정치적 상황이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과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나아가 '민주개혁의 전환적 위기'라는 이런 틈을 비집고 근현대사에 대한 보수적 시각의 새로운 연구가 공세를 펴고 있다. 이른바 '좌편향' 현대사 인식을 비판하면서 '뉴라이트=신우익'판 현대사 인식을 제시했다고 일컬어지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박지향 외 지음, 책세상 펴냄, 2006)은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자학사관'과의 대척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무반성적 성공사관'이 제시되고 있다.

"보수(保守)도 보수(補修)해야 하지만 진보도 진보해야 하는 시대"

그러나 최근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 전환을 뉴라이트적 현상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보수(保守)도 보수(補修)해야 하지만 진보도 새롭게 진보해야 하는 시대, 그리하여 양자 모두 거듭나면서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재인식'에 대해 '해전사(해방전후사의 인식)'를 그대로 고수하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이는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구진보를 대표했던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라는 이념적 깃발은 이제 빛이 바랬으며 원판 그대로는 결코 생명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시대가 변했고, 역사를 보는 눈도 변했으며,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우리 학계가 이같은 새로운 전환시대의 요청에 얼마나 학문적으로 잘, 진지하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논의는 여러 갈래로 분분하고 정치적 선정성은 강한데 학술적 성취는 아직 빈약한 것이 우리 실정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권태준 교수의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라는 묵직한 저작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분량이 방대할 뿐 아니라 완성도가 매우 높은 체계적인 저서이다. 수 년 동안 일념으로 매진해야 겨우 나올 수 있는 저서다. 이런 역작을 내놓은 저자의 노고를 높이 사고 싶다. 나는 이 저서가 '한국 근현대 발전사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지금까지 이 주제에 대해 이 정도로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서는 없었다고 본다. 이 점만으로도 권 교수의 저서는 큰 성과이며, 연구사적으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할 것이다.
▲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 (나남출판 펴냄, 2006)(좌) 권태준 서울대 교수(우)ⓒ프레시안

주연배우는 '국가', 주 무대는 '산업화 시기'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듯 민주정부가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역사적 기반, 즉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성취한 바를 몰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강한 비판적 문제의식에 입각해 쓰여졌다. 그리하여 이 책은 대한민국이 지난날 거둔 성공을 보여주고 그 요인을 밝히는 것을 중심과제로 삼는다.

민족해방, 민중민주로 대표되는 구진보 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것도 이 못지않게 중요한 이 책의 과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은 한국사회의 새로운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민운동 진영을 포함해 민주화 시기에 성장한 이른바 '운동권 엘리트'의 논리와 행태 전반에 대해 시종일관 쉼 없이 비판의 화살을 쏟아붓고 있다.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민중적, 시민적 비판행동과 담론은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 작업'과 '세계화 시대 국력 강화'의 걸림돌로서, 거대담론이나 고담준론을 일삼는 부질없는 짓으로서 가차 없이 비판된다.

이 저작의 전체 얼개에서 한국 근현대 발전사론의 주연배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단연 '국가'다. 개발독재 체제의 '강한 국가', 즉 사회에 대한 국가 권위와 권력의 중심성이 산업화의 성공, 나아가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기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는 중심무대가 되고, 그 이전과 이후 시기는 이 '빛나는' 시기와의 연관성과 비교 속에서 그 특징, 더 정확히 말해서 그 약점과 과제가 제시되고 있다 하겠다. 정치적 근대화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새뮤얼 헌팅턴(S. Huntington)은 이 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인물이다.

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개발독재 이전의 문호개방 시기, 식민지 시기, 나아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 시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 만들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즉 이 시기는 국가라는 중심적 권위와 권력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 시기로 집약된다.

이처럼 '강하고 유능한 국가'라는 국가관에서 '세기 뛰어넘기 역사'를 살피고 있는 까닭에 저자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식민지근대화론에 의한 일제 식민지시대 다시 보기 작업'이나 '이승만 추켜세우기' 같은 작업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문호 개방기에 대해서도 <고종 황제 역사 청문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고종 재평가론 대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있다. 식민지 지배 시기는 물적·인적 자원의 수탈이나 개발의 유산보다는 대중의 집단적 정체성과 정치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시기로 파악된다.

또 저자는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역사에 그대로 역투사하는, 근래 정치권이나 학계에서 널리 유포·선전되고 있는 '쇄국 대 개방'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는다.

'강한 국가'에 대한 지나친 믿음

그렇지만 아무리 '죽은 개'가 되었다 하더라도 민족해방과 민중민주 이념이 밝히고 있는 바대로 지배세력이 외세와 결탁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한편 민중을 억압·수탈하고 나라를 죽였다는,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진실이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에 빠져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근현대에 우리 국가의 능력이 허약했던 것은 단지 일국 수준에서 사회와의 관계가 허약했다는 문제일 뿐 아니라 민중의 민족적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외압에 허약한 국가의 문제이자, 외세와 결탁하면서 '모두를 위한 나라'를 죽이는 길을 택한 무책임한 매국적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개발독재의 시기는 이 책에서 가장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기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종속론, 심지어 저자의 이론 틀에 가장 가깝다고 할, 일본을 준거 모델로 하는 개발국가론까지 비판하면서 '개발독재가 자본주의적이었던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화는 자본주의적이었다기보다 일종의 공동체적 발전, 즉 '함께 잘 살기' 과정이었다. 한국의 자본가는 자본동원 능력, 투자기획 능력, 시장개척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의 협력자라기보다 '국가가 기획·투자하는 사업의 관리자'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 시기에는 노동자들도 계급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으로는 산업화 시기의 개발 체제는 자본주의적 외모는 갖고 있을지 몰라도 실은 자본주의 전 단계에 있는 '의제 자본주의 체제'였다.

'남의 이론을 모방하지 말고 우리 현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개발하자'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최근 활발한 '우리 안의 보편성을 찾자'는 학술운동도 그런 취지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의제 자본주의론은 국가 중심성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박정희 모델은 마치 전시경제적 동원모델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시기에 국가가 우위에 서면서 재벌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지만 국가가 재벌에 의존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는 냉전반공 체제 하의 '강한 국가'가 지닌 억압성의 측면을 일관되게 생략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와 재벌 간의 위계와 더불어 이들 상호 간의 보수적 공생, 결탁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개발독재 체제는 '강한 국가'와 '재벌'이라는 쌍두(雙頭)체제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가 많은 공을 들인 저작임은 분명하나, 나는 이 책에서 권태준 교수가 종래의 개발국가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게다가 권 교수는 개발독재를 서구 중상주의 단계에 비견하는 언급도 하고 있어서 의제 자본주의론이 얼마나 새로운 논의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개발독재 체제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요즘 말로 하면 '괴물')에 비견해, '강한 국가'와 '재벌'이라는 두 개의 머리가 달린 '홉스적 협력체제'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파악이 정치경제적 권위와 그 안에 들어있는 구조적 모순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는 이론 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저자의 의제 자본주의론에서는 개발독재 체제에 내포된 구조적 모순은 주변화돼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의제 자본주의론은 '개발독재=중상주의, 민주화 이후 경쟁시장 자본주의'라는 진화론적 단계론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혐의마저 갖게 된다.

함께 잘 살기라는 믿음을 해체하는 단계로 넘어가면서 저자는 민주화 이행과 개발독재론에 대한 본인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저자는 민주화 이행의 동력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또 그 동전의 뒷면인, 시스템이 지닌 구조적 모순의 성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저자에 따르면 풀뿌리 민중은 계급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역차별에 항의했고, 운동권 엘리트들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요구했다. 간단히 말하면, 민주화 운동 정치는 지역적 배제세력과 계급적 배제세력 간의 결연(結緣)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가 단순한 진화론적 근대화론에 동의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발독재 대 민주화'로 대치했던 당대의 핵심쟁점, 즉 유신독재, 5월 항쟁, 6월 항쟁 등을 통해 줄기차게 이어졌던 '정치적 독재 대 민주대연합'의 대치구도가 흐릿하게 주변적으로 처리돼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저자가 개발독재를 '개발=국익을 위한 독재'로서, '민족의 길잡이'로서, '대중이 지지한 독재'로만 보고 있는데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각에는 개발독재를 가로지르는 정치경제적인 구조적 모순과 그 정당성의 불안정하고 균열적인 성격, 즉 '쟁투적' 성격이 빠져 있다.

노동자를 비롯하여 근로대중이 지역모순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보는 것도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이는 계급의식과 계급갈등의 내용을 지나치게 좁게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개발독재 폐쇄회로를 너무 좁게 보고 있다. 이 책에서는 경제적 소외와 정치적 소외를 통합하면서 반독재 민주화의 저항적 주체성을 집약하고 있는 당대 민중의 개념이라든지 진보적 지식인과 연대한 민중의 경험 세계와 그 정당한 역사적 자리가 제거돼 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민족주의는 민중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오로지 국가만이 전유할 뿐인 국가 민족주의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가 식민지 지배 시기가 대중의 집단적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때도 그 의식이란 결국 국가민족주의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위로부터의 동원대상에 불과한 수동적 의식일 뿐이다.

'삼성 공화국'이 우리의 대안이란 말인가?

의외로 저자는 개발독재 체제의 공과를 논할 때 박정희의 개인적 지도력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이 체제의 말단 현장에서 억압과 희생을 가장 심하게 당한 계층으로서, 다른 어떤 요인에 못지않게 '세기 뛰어넘기'의 성공에 기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저자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가 대중의 민주적 평등주의 요구에 어떻게 부응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이런 요구를 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관심을 가질 법 하다. 또 권위주의적 권위를 대체하는 새롭고도 강력한 민주적 권위가 형성됐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법 하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산업화 시기 '강한 국가'의 대를 잇는, 세계화 시대의 대안은 이제 '시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거의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가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를 극복하고 이만큼이나 버티고 있는 것도 몇몇 초국적기업의 경쟁력 덕분이 아닌가, 재벌 개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라고 저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삼성 공화국'이 우리의 대안이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저자의 관심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강한 민주주의를 향하기는커녕 세계화 시대에 다른 나라와 경쟁해서 실리를 챙길 수 있는 경쟁국가의 길을 향해 있다. 이를 위해 '협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다.

저자의 민주주의론 또한 이런 시각에 맞춰져 있다. 저자에게 있어 자유민주주의적 정치란 공리적, 개인주의적 시민을 상대로 여러 정파와 정당들이 서로 경쟁해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정치체제다. 이런 시각은 엘리트주의적 최소 민주주의, 집계(集計) 민주주의를 얼마만큼 넘어서고 있는가.

▲ 이병천 강원대 교수ⓒ데일리서프라이즈

'삶의 세계' 노래하다 '시장의 논리' 신봉자로 돌아서


권태준 교수의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는 우리 근현대 발전사에 대한 보수적 담론서라고 간단히 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공이 들어간 저작이다.

그렇지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사람, 에코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에는 너무 현실에 주저앉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겠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주의적, 실용적이 되기 마련이라 하지만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항하여 '삶의 세계', '삶의 지연성 회복'을 주창하고 '분배의 의식화 시대'를 위해 발언해 왔던 지난날의 저자와 강한 국가와 시장의 능력을 추종하는 오늘의 저자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어 보인다.

혹시 어떤 '학문적 영혼의 동요'가 있었던 것일까. 진보와 보수가 어지럽게 넘나들고, 구진보 중 일부가 큰 소리로 뉴라이트의 최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이 혼돈의 시대에 나는 고희를 맞은 이 노학자가 '자학과 자만 사이'에서 더 깊은 성찰적 발언의 자리를 지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었다. 그러기에 못내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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