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역사가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 부담스러운 역사라 해서 무한정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한의원, 심지어 총독부의원과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의 역사조차 한국 의료계 전체가 반성적으로 공유해야 할 경험적 자산이다. 서울대병원의 기념사업 등을 무슨 '가공할 역사인식'을 만들고 유포하려는 술책으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서울대병원 전우용 연구팀장)
서울대병원이 13억75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추진하고 있는 '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광혜원) 122주년' 기념사업이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일제가 식민 지배를 목적으로 세운 대한의원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역사인식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국 의학의 미래상에 건설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란이 차분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그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식민지시대 보건의료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아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에 논란의 초점이 된 대한의원은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1907년 설립돼 내년 3월 15일로 100주년이 된다. 서울대병원은 2005년 기념사업단과 병원사연구실의 출범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준비해 왔다. 이 사업에는 기념식과 관련 심포지엄, 기념 조형물 제작,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가 포함된다.
연세대병원 "대한의원 기념은 일제 식민지배 기념과 다를 바 없다"
순조롭게 준비되어 오던 기념사업에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 것은 연세대의대 여인석 교수(의사학·醫史學)가 지난 6월 7일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이 계기였다.
여 교수는 이 기고문에서 "대한의원은 일제가 보건의료를 장악하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견이 없다"며 "서울대병원이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주체적으로 설립한 기관이라고 강변한다면 을사늑약이나 경술국치도 대한제국이 주체적으로 일제에 나라를 헌납한 것이라는 궤변이 가능할 것"이라고 이 기념사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여 교수는 "대한의원이 설립된 1907년은 조선이 을사늑약으로 실질적 주권을 상실하고 통감부의 지배를 받던 때였다"며 "대한의원은 바로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와 이완용의 찬동으로 설립된 곳"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한의원의 초대 원장은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지용이었으며, 당시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은 1909년 이 병원에 입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 교수는 더 나아가 "서울대병원이 대한의원을 국가중앙의료기관의 효시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기념하겠다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일제 통감부나 총독부 설립 100주년을 '근대국가 100주년'으로 기념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서울대병원의 처신을 강하게 비판했다. 대한의원을 기념하는 것은 일제의 한국 지배를 기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여 교수는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총독부 건물을 청사로 사용했고,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들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관료로 일했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조선총독부를 계승한 정부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다"며 "(이 대한의원 기념사업은) 서울대병원 측이 '국가권력'의 그늘에 자신들 기관의 연속성만 보장받는다면 그 국가권력의 주체가 일본제국이건 대한민국이건 관계없다는 '가공할 역사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 교수는 "이는 단절해야 할 역사이지 애써 연결하거나 더구나 기념할 역사는 결코 아니다"고 덧붙였다.
서울대병원 "식민지 역사 부담스럽다고 회피해선 안 돼"
이런 여인석 교수의 지적에 대해 정작 기념사업을 진행해 온 서울대병원 측은 한동안 공식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 교수의 기고문이 발표된 뒤 2개월 여가 지나 최근 발행된 <신동아> 9월호는 서울대병원 측이 내부적으로 준비해 두었던 반박문을 제공받아 이를 공개했다. 서울대병원의 반박문은 요약하자면 여 교수의 비판이 "일면적이고 단편적"이라는 것.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전우용 연구팀장은 '타성이 빚은 예단에 대한 유감'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에서 "서울대병원이 대한의원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식민지 의료기관이라는 대한의원의 이미지 뒤에 숨은 의료근대화 사업의 주체적 성과들"이라며 "우리가 그 역사를 완전히 묻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대한의원 기념사업의 의미를 밝혔다.
전 팀장은 "역사에 완전한 단절은 없다"며 "식민지 시대의 역사가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 부담스러운 역사라 해서 무한정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여 교수의 역사인식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전 팀장은 "대한의원, 심지어 총독부의원과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의 역사조차 한국 의료계 전체가 반성적으로 공유해야 할 경험적 자산"이라며 "(연구의 대상을 이렇게 확장할 때) 청산해야 할 대상과 관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팀장은 마지막으로 "근대 이후 사람들이 자기 삶을 조직하는 데에 의학, 의료가 미친 지대한 영향에도 아직껏 이 땅의 의료사, 병원사 연구는 척박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이런 마당에 함께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상대가 하나 더 늘어난 일을 기꺼워 하지는 못할망정, 지레짐작만으로 서울대병원의 기념사업 등을 무슨 '가공할 역사인식'을 만들고 유포하려는 술책으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여 교수를 공박했다.
전 팀장은 <신동아>와의 별도의 인터뷰에서도 "한 기구나 기관의 역사에 대해 어떠면 그렇게도 일면적이고 단편적인 분석을 할 수 있느냐"며 "대한의원은 조선 후기 개항기 이래의 내재적이고 자력적인 의료개혁 사업의 성과를 기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근대 의료개혁 사업의 내적 성과와 식민지성의 결합체 또는 혼합체로 봐야 한다"고 여 교수의 인식의 한계를 짚었다.
서울대병원-연세대병원, '역사 전쟁'으로 비화할 듯
서울대병원 측의 이같은 반박으로 이번 논란은 한단계 확산할 조짐이다. 이번 논란은 서울대병원과 연세대병원(세브란스병원) 사이의 '역사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두 병원 사이의 '역사 전쟁'은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연세대의대 의사학과 관계자는 "여인석 교수의 기고는 연세대의대 의사학과 전체 교수가 뜻을 같이해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여 교수의 기고가 개인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연세대병원의 공식적인 문제제기의 성격이 짙다는 것.
이런 점을 염두에 둔 탓인지 전우영 연구팀장의 반박문에서도 연세대병원을 겨냥한 가시 돋친 표현이 보인다. 전 팀장은 그간 국내 의사학계에 주체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미흡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설령 에비슨(제중원 의학교 교장, 세브란스병원 초대 원장)은 천사요 사토(통감부 육군군의총감)는 악마라는 이분법적 기준을 설정할지라도 능동성이 빠져 있다면 누구 중심의 역사든 타자의 역사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대한의원 개원을 일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만 해석한다면 세브란스병원도 기독교 포교를 확대하고 제국주의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한의원의 정체성의 한 면만을 강조한다면 연세대병원도 마찬가지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연세대병원이 '뿌리 찾기' 논쟁을 재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해다. '뿌리 찾기' 논쟁이란 서울대병원과 연세대병원이 지난 25년간 광혜원을 두고 서로 자기네 병원의 효시라며 벌여 온 논쟁이다. 서울대병원은 광혜원이 국립 의료기관이었다는 점을 들어 자기네가 맥을 잇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연세대병원은 광혜원의 의료기술과 인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실질적인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의사학계 "이 참에 제대로 논쟁해 보자"
이런 논쟁을 지켜보는 국내 의사학계는 "이 참에 제대로 된 논쟁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한 의사학계 관계자는 "개인적으로는 대한의원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본다"며 "그러나 대한제국 시절 일제가 주도했던 근대화의 공과를 학문적 대상으로 진지하게 논의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은 여인석 교수의 글에 대한 짧은 논평에서 신재의 박사(한국근대의학사)가 지적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는 "대한의원 100주년이 결코 기념할 일은 아니지만 버려둘 수만도 없다"며 "현대가 근대에 연이은 역사라면 정리는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성과 회한을 기반으로 내일을 위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라고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연세대의대 의사학과는 뒤늦게 공개된 서울대병원의 전우용 팀장의 반박문을 검토한 후 재반박을 통해 제대로 된 논쟁을 진행하기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의대 관계자는 "조만간 여인석 교수 본인이나 다른 의사학 연구자가 반박을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논쟁의 귀추가 주목된다.
대한의원, 이토 히로부미 제안으로 설립돼 그 동안 국내 의사학계에서 진행되어 온 '대한의원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 성과는 대체적으로 연세대병원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쪽이다. 연세대병원은 "대한의원이 비록 대한제국 시기에 세워졌지만 실질적인 설립 주체는 일제 통감부이며, 병원의 운영자·의료진·이용자의 많은 수가 일본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이 가운데 우선 대한의원의 설립주체를 보자면, 통감부가 주도한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1906년 통감부가 발행한 <한국시정일반>의 대한의원 관련 부분을 보자. "의료기관(광제원, 의학교, 대한적십자병원)의 통합을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사토 육군 군의총감에 촉탁하여 그 임무를 맡기기로 하여 동 총감은 천황의 이명을 받아 1906년 7월 3일 경성에 도착한 이후 (…) 대한의원 창립위원회를 조직하여 (…) 경성 동소문 내의 장소를 부지로 하여 명년 중에 낙성할 예정으로 공사에 착수하였고, 통감이 친히 이를 대한의원이라 명명하였다." 연세대병원은 일제가 대한의원을 설립하면서 대한제국이 세운 3개 의료기관을 통폐합한 행위에 대해 "자주적으로 근대적인 보건의료 체계를 확립하려는 주체적인 노력을 말살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들 의료기관의 통폐합은 대한제국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식민지 의료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서울대 출신으로 대한의사학회장을 지낸 기창덕 박사도 자신의 저서 <한국근대의학교육사>에서 이런 연세대병원의 주장과 사실상 동일한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명칭은 대한의원이지만 통감부에 의해 운영돼 왔으며, 외관으로는 한국인을 위한 최신식 의료시설로 선전돼 전시효과에는 한몫 했으나, 실은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 관리 및 그 가족, 그리고 일본인 거류민의 보건을 위한 의료시설에 지나지 않았다"고 적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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