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재판장 이인재 부장판사)는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에 대해 회사돈 286억 원을 가로채고 2838억 원을 분식회계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이 죄목은 특별경제가중처벌법에 의해 최저 법정형이 징역 5년 이상이나 되는 중범죄다. 하지만, 재판부는 박 전 회장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80억 원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이날 박 전 회장은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면서 대법원 상소를 포기했다.
박용성 씨가 대법원 상소를 포기한 이유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를 고용한 박 전 회장이 상소를 포기하자 법조계와 재계 안팎에서는 그가 8·15 사면을 노렸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형이 확정되고 재판이 끝나야 사면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재판을 서둘러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경제인'으로서의 업적과 더불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지원을 내세워 8·15 사면을 받으려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후문도 뒤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7월 27일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5단체장 명의로 청와대에 제출된 '사면복권 청원대상 기업인 명단'에는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지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박용성 전 회장의 이름도 버젓이 포함되었다.
8월 들어 박 전 회장에 대한 사면 논의는 열린우리당과 경제5단체의 이른바 '뉴딜' 논의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8월 9일 여의도 63빌딩 고급 식당에는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비롯한 경제단체 대표들과 열린우리당 김근태 당의장, 원혜영 사무총장을 비롯한 여당 대표들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만들어진 '열린우리당-경제5단체 합의문'을 보면 "경제계는 국민 대화합 차원에서 기업인들의 사면을 요청하고,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도 이들 문제가 해결되도록 전향적으로 노력한다"고 되어 있다. 이제 청와대만 결심한다면 8·15 특별사면자에 박용성 전 회장도 포함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재계와 열린우리당의 기대와 달리 8월 11일 뚜껑이 열린 사면자 명단에 재벌 총수는 한 명도 끼지 못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내세운 두산그룹의 반발
사정이 이렇게 되자 경제단체와 해당 재벌그룹이 반발했다. 대한상의는 공식 논평을 내고 "경제5단체가 건의한 기업인 사면 요구가 이번 광복절 사면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며 "특히 그동안 경제성장과 기업경영에 공이 큰 기업인들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고 말했다(<문화일보>가 보도한 이 공식논평은 어찌 된 영문인지 대한상의 홈페이지에서는 찾을 수 없다).
전경련은 공식 논평을 내지는 않고 '관계자'의 입을 빌어 "실질적으로 기업활동에 종사하고 투자에 영향을 미칠 만한 경제인은 사실상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면서 "기업들의 투자의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역시 '관계자'의 입을 빌어 "여당이 서민경제 회복을 위해 투자 활성화를 하고 기업에 힘을 보태겠다면서 경제인 사면도 적극 말해 왔는데 반영이 미흡한 것 같아 아쉽다"고 평했다.
박용성 씨가 지배주주로 있는 두산그룹은 "사면을 통해 박 전 회장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여기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까지 나서 "국내 IOC위원이 2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유치를 위해서 박 위원의 사면이 절박했었으나 제외돼 안타깝다. 연말 사면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거들었다.
박용성 씨의 IOC 위원 자격은 이미 정지된 상태
박용성 전 회장이 법원의 재판을 받게 되자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2005년 11월 박씨를 IOC 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2006년 2월 8일 서울지방법원이 박 씨의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에 벌금 80억 원을 선고하자, 바로 그날 박 전 회장은 IOC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항고할 의사를 밝히면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윤리위원회의 결정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006년 2월 9일 박 전 회장은 IOC 윤리위원회에 소명서를 보내 자신이 회사의 책임자여서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 개인적으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2006년 2월 11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IOC 윤리위 회의에는 박 씨의 대리인 자격으로 제프리 존스 전 주한 미상공회의소 회장이 참석해 상고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윤리위 결정을 연기해달라고 재차 요청했다. 제프리 존스가 (주)두산의 회장으로 영입된다는 이야기가 나돈 게 이즈음이다.
같은 날 IOC 윤리위원회는 제출된 모든 자료를 검토한 결과 '박 씨 스스로 기소된 사실을 인정했으며, 관련 증거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박 씨가 사적인 비용을 처리하기 위해 불법적인 기금을 받아 썼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후회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IOC 윤리위는 "2006년 2월 8일 서울지방법원이 (회사 책임자로서가 아닌) 박 씨 개인에 대한 유죄를 인정하면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과 벌금 80억 원을 선고했으며, 박씨는 판결에 반발해 즉각 항고했으나 인신 구속되지는 않았고, 자신에 대한 기소 사실을 인정하나 스스로가 유죄라고 여기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IOC 윤리위 "올림픽 운동의 명성을 더럽힌 행동"
IOC 윤리위는 "박 씨가 상급법원에 상소를 했다고 해서 윤리위원회가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면서 "유죄로 밝혀진 박 씨의 행위는 '올림픽 관련자들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솔선수범해야 하며, 올림픽운동의 명성을 더럽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IOC 윤리규범 B장 5조의 적용을 받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IOC 윤리위는 "△IOC 위원인 박용성 씨의 사건에 대한 사법당국의 최종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윤리위의 조사활동이 계속될 것이며 △조사기간 동안 박씨에 대해 IOC회원으로서의 권리·특전·역할을 정지시킬 것을 IOC집행위에 권고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006년 3월 15일 IOC 집행위는 윤리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박용성 씨의 IOC 위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이를 취재한 <AP>는 박 씨에 대해 조사해 온 IOC 윤리위원회가 한국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후 박 씨에 대한 제명을 권고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박 씨의 상소 포기로 2심으로 끝난 최종판결에서 유죄판결이 났기 때문에 이 통신의 전망은 더욱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77만 원 횡령은 실형 10개월, 286억 원 횡령은 집행유예
8·15 특별사면이 발표되던 날, 한 국회의원이 무전유죄(無錢有罪)의 실상에 대한 자료를 발표했다. 중국집에서 77만 원의 음식대금을 가로챈 배달원은 실형 10개월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300억 원 가까운 회사돈을 가로챈 박용성 회장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소를 포기함으로써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거액의 회사돈을 횡령하고 이중장부를 만들어 국민경제를 어지럽힌 박 씨의 행위가, 재계에서 재벌총수 사면의 이유로 드는 '서민경제 회복을 위한 경제성장 및 기업경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 회사 돈과 개인 돈도 구분 못하는 수준의 윤리의식을 가진 IOC 위원이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에 어떤 도움이 될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번 사건으로 IOC로부터 위원으로서의 권리·특전·기능 모두를 박탈당한 박 씨가 비정상적이고 비공개적인 로비 말고 평창 올림픽 유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재계가 요청하고 열린우리당이 사면을 건의한 인사는 모두 5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7명만 사면되었다. 재미난 점은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기업인들에 대한 사면을 요청한" 대한상의·전경련·경총을 비롯한 경제5단체 홈페이지와 이를 받아 "국민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사면을 건의한 열린우리당 홈페이지 어디를 찾아보아도 사면을 요청한 재계 인사 55명의 명단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불법을 저지른 재계인사에 대한 사면복권이 '국민대화합'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면 국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그 명단을 공개하고 과정을 투명하게 처리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련 단체들의 홈페이지는 물론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도 55명 명단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튼 한국의 재계를 대표한다는 대한상의·전경련·경총이 사익을 취하려 공익을 저버린 기업인들을 옹호하고 한국의 정치를 대표한다는 여당이 재계의 부도덕한 요구에 맞장구를 치는 한 서민경제 활성화를 위한 경제성장과 기업경영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페어플레이'라는 올림픽정신 저버린 박용성 씨
올림픽 헌장에는 "올림픽 정신은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윤리 원칙들에 대한 모범과 존중이라는 교육적 가치에 토대를 둔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 노력한다. 스포츠의 실천은 인권이다. 모든 사람은 아무런 차별 없이 올림픽 정신에 따라 운동을 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올림픽 정신은 우정, 연대, 그리고 공정한 경기(fair play)의 정신과 함께 상호 이해를 요구한다"고 나와 있다.
IOC는 쿠베르탱을 비롯한 올림픽 운동의 선구자들이 주창해 오늘의 올림픽 헌장에 반영된 윤리, 인권의 원칙과 페어플레이 정신은 운동경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방식에서 실천하고 적용해야 하는 푯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올림픽 헌장에는 IOC위원이 취임식에서 하는 선서문이 나와 있다. "나는 올림픽 운동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올림픽 헌장의 모든 조항과 IOC의 결정을 존중하며, IOC 윤리규범을 준수하고, 어떠한 정치적·상업적 영향 그리고 인종적·종교적 고려에서도 자유로울 것이며,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IOC와 올림픽 운동의 이익을 증진할 것이다."
법원도 유죄로 판결한 박 전 회장의 행태는 '페어플레이'를 강조한 올림픽 정신을 더럽힌 것임에 틀림없다. 8·15사면을 의식해 고액을 지불한 변호사와 짜고 대법원 상소를 포기한 행위도 어떠한 정치적 상업적 영향도 배제한다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이 지배주주로 있는 재벌그룹과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치위원회를 내세워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악영향" 운운하는 태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판 '드루'가 되고 싶은가?
염치라는 말이 있다. '체면을 차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일컫는다. 박 전 회장이 염치가 있었다면 검찰의 조사를 받았을 때 이미 IOC 위원을 자진사퇴했어야 했다.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이고,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대법원 상소를 포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2심 법원의 유죄 판결을 스스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IOC에 의해 자격이 정지된) IOC 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면을 위해 정치권과 재계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이것도 모자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를 통해 다음 사면에는 꼭 포함되어야 한다는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
8·15 사면을 기대하면서 박용성 전 회장은 프랑스의 IOC 위원인 귀 드루(Guy Drut)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드루는 공공기관 신축 및 재건축과 관련하여 정·관계를 상대로 불법적인 로비를 하며 사회적 자산(social assets)을 남용한 죄목으로 파리 형사재판소로부터 징역 15개월에 5만 유로(약 6000만 원)의 벌금을 선고받아 박 씨와 비슷한 무렵인 2005년 10월 IOC 윤리위에 회부되었다. 2006년 5월 22일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그를 사면했고, 이를 근거로 드루는 자신의 범죄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IOC 위원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제명'되기 전에 자진사퇴해야
대통령의 사면장 때문이었는지 2006년 6월 15일 IOC 윤리위는 드루가 올림픽 헌장의 윤리규정과 IOC 윤리규범을 위반해 올림픽 운동의 정신을 더럽혔음을 인정하면서도 견책(reprimand)이라는 가벼운 징계와 더불어 향후 5년 동안 IOC 위원회에서 사회를 맡을 권리를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통령의 사면장을 얻어 IOC 위원직 박탈을 면한 드루에 대한 IOC 윤리위의 결정이 박용성 씨가 대법원 상소를 포기하면서까지 사면에 매달린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박 씨는 이번에 사면되지 못했고, 공은 IOC로 넘어갔다. IOC 윤리위로부터 '제명'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받기 전에 자진사퇴라는 절차를 밟는 게 훨씬 명예스러워 보이건만 그동안 악착스럽게 두산그룹을 키워 온 박 전회장의 행태를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IOC 헌장에 따르면, IOC 위원은 위원장에게 서면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언제나 그의 위원직을 그만둘 수 있다. 박용성 씨의 결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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