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다시 '기업별 노조'로 전환"하고 있다는 기사가 <문화일보> 6월 27일자 5면에 실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거짓말이다. 유럽 노조들이 기업별 노조로 돌아가고 있다는 내용의 이 기사는 <문화일보>의 김순환 기자가 서강대 남성일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남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들어 산별노조에 대한 요구와 결성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지만 유럽 등 선진국은 기업별 노조로 다시 가고 있다며 우리나라 노조들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김 기자나 남 교수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유럽의 노동조합은 산별노조 같은 초(超)기업 노조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유럽의 노사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노조들 가운데 다시 기업별 노조로 전환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해마다 노조가 임금협상이나 단체협상을 진행할 때가 되면 한국의 보수언론은 노조 때리기에 나선다. '노조 때리기'를 통해 기업과 자본을 편드는 습관은 1987년 민주화, 아니 한국 땅에 노사관계가 등장한 일제시대 때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 온 한국 보수언론의 고유한 전통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닌데, 레퍼토리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해들과 차이를 보인다. 바로 '산별노조' 때리기가 그것이다. 물론 결론은 똑같다. "기업별노조든 산별노조든 노조는 회사를 어렵게 하고, 나라 경제를 망친다"는 것이다.
구미에서 '기업별 노조'는 '어용노조'를 뜻해
한국 노동조합의 조직 형태는 기업별 노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 유럽이나 북미의 선진국 가운데 기업별 노조 체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유럽이나 북미의 노동조합은 산업별노조, 즉 산별노조가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직종별 혹은 지역별 노조가 공존하는 형태다. 유럽과 북미에서 기업별 노조(company union)는 조합원의 이익을 보호하는 노조 본연의 목적을 상실한 어용노조를 뜻한다.
한국을 뺀다면 선진국 가운데 기업별 노조 체계가 노동조합운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모든 노조가 기업별 노조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업종별, 직종별 형태로 초기업 단위의 노조가 활발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본 지자체 공무원들의 노조로 조합원 100만 명을 거느린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을 들 수 있다), 건설업이나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지역별 노조가 건설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 정부나 기업들이 열렬히 닮기 원하는 미국도 노동조합은 산업별 체계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노동관계나 노동조합의 국제 비교에서 기업별 노조 체계는 예외적이고 변태적인 형태로 구미 선진국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 정치적 행위자(political actor)로서의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온 측면이 크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산별노조 유지
사실 우리나라의 노동조합도 전두환 정권 출범 전까지는 직업노조나 산별노조 체계를 띠었다. 일제시대의 노조는 (기업별 노조가 일부 존재하기도 했으나) 피복, 인쇄, 섬유, 신발, 금속, 전기, 운수, 통신 따위의 직업별 노조들이 지역을 토대로 활동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인 1945년 11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총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조직되었는데 금속, 화학, 섬유, 출판, 운수, 철도, 해운, 광산 등 십수 개의 산별노조가 주축을 이뤘다.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전평의 활동에 위기의식을 느낀 친일파 중심의 우파인사들이 1946년 3월 (지금의 한국노총의 모태인) 대한노총을 조직했는데, 이 역시 오늘날과 같은 기업별노조 체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기업별 노조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5.16 쿠데타 이후 국가권력에 철저히 종속된 노동조합이기는 했으나 박정희 정권 하의 한국노총은 십수 개의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한 명실상부한 단일 노총이었다.
한국에서 기업별 노조 체계가 뿌리내린 것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후다. 광주민중항쟁을 유혈진압한 신군부는 사회의 '숙정(肅正)'과 '정화(淨化)'를 명분으로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등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 와중인 1980년 12월 31일 신군부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노동운동을 거세할 목적으로 노조결성, 조직형태, 조직운영, 단체교섭, 노동쟁의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그 결과 노조 결성과 운영 및 노동쟁의와 관련한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 신설되었고, 기업별 노조체계(!)가 강제되었으며, 단체교섭의 상급단체 위임이 금지되었고,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되었으며, 직권중재 대상이 무한정 확장되었다.
기업별 노조 체계야 말로 대기업 노동력 경직의 주범
<문화일보>의 김순환 기자와 서강대의 남성일 교수는 산별노조 체제 하에서는 △ 노동시장 경직화에 따른 일자리 감소 △ 임금과 근로조건을 맞추지 못하는 중소기업의 폐업 △ 대기업 인력 경직성 심화 △ 채용 감소에 따른 청년 실업 심화 △ 상시적인 총파업 분위기에 따른 국민경제 잠재력 하락 △ 산별노조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따른 경제의 의사결정 시스템 변질 △ 개별 근로자의 입장 전달 어려움 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대부분의 주장들도 근거 없는 것들이다. 기업별노조 체계가 20년 넘게 유지되어 온 지금에도 대기업 정규직 '노사'의 경직화는 세계적 수준이며,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는 여전히 크게 부족하다. 산별노조와 노동시장 경직화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오히려 대기업 노동시장의 경직화는 기업별 노조체계의 유지, 그리고 이것과 동전의 양면인 기업별 수준의 노사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재계와 언론과 정부는 입만 열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시장이 대단히 경직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대기업노조의 전투성과 정치성, 그리고 대기업노조 이기주의를 거론한다. 이것을 노조 조직 형태의 측면에서 말하면 기업별 노조 체계가 된다. 사회나 산업과는 유리된 채 기업의 울타리 안에서만 형성되어 온 정규직 노사 간의 '담합'이 대기업 노동시장을 경직적으로 만들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맥락을 고려할 때, 대기업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대기업 노조만의 잘못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노조의 잘못이 10이라면 기업 수준의 노사관계를 고착화하고 이를 부추겨 온 사용자의 잘못은 40이고, 그 나머지는 초기업 수준의 노사관계 정책을 고민하지 않은 채 노사관계가 기업별 수준으로 고착되는 것을 방치해 온 정부의 잘못이다.
산별노조와 경영상 이유로 인한 폐업은 무관
김 기자나 남 교수가 말하는 "산별노조가 생기면 임금과 근로조건을 맞추지 못하는 중소기업이 문을 닫는다"는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외국의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1998년 우리나라 최초로 산별노조로 전환한 병원노조들의 산별조직인 전국보건의료노조는 2004년부터 전국에 산재해 있는 100여 병원들과 산별교섭을 진행해 오고 있는데, 산별노조가 요구하는 수준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맞추지 못해 문을 닫은 중소병원은 여태껏 한 군데도 없었다.
그리고 그 동안 재계가 주장해 온 바에 따르더라도,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맞추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할 정도의 중소기업이라면 경쟁력과 생산성이 형편없는 게 분명한데, 이런 기업들이 하루 빨리 문을 닫는 것(이것을 구조조정과 산업구조 합리화라 부른다)이야말로 나라 경제에 이로운 게 아닐까.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아 청년실업이 심화된다"는 지적도 산별노조와 별 상관이 없다. 기업별 노조체계인 지금도 사측은 신규채용을 하지 않고, 기업 안팎으로 고용을 하청화하거나 외주화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의 급속한 악화가 이를 증명한다.
산별노조 전환은 총파업 선언 남발을 줄일 것
산별노조로 인해 "상시적인 총파업 분위기"가 강화될 것이라는 주장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현행 노동법상 파업을 하려면 재적(在籍) 조합원 과반의 찬성이 필요하다. 기업별 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되어 노조의 규모가 커지면, 그에 따라 재적 조합원 수도 커진다. 산별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 그 영향력은 개별 기업노조의 파업보다 훨씬 강력하겠지만, 커진 규모만큼 파업의 조직화도 비례해 어렵기 때문에 파업의 조직과 실행에 그만큼 더 신중하게 된다.
기업별 노조 체계에서는 노조의 권력과 자원이 기업 차원에 집중되어 있다. 권력과 자원이 있는 곳에 권한과 책임도 있기 마련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총파업 선언 남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산별노조 전환으로 권력과 자원이 기업 수준에서 초(超)기업 수준으로 분산될 경우, 그러한 체계에 기반을 둔 양대 노총의 책임의식도 그만큼 증대될 것이다.
산별노조는 국민경제 발전에 순기능
산별노조, 즉 산업별 수준의 노조는 산업별 수준의 교섭을 전제한다. 기업별 노조 체계와 기업 수준의 노사관계는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임금과 노동조건, 특히 고용과 복지는 개별 기업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산업 혹은 전국 차원의 문제로 발전한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도 부담스러운 고용 문제와 복지 문제를 중소기업이 떠안을 순 없다. 하지만,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는 이 모든 문제를 기업 수준에서 해결토록 강요했으며,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난 산업 혹은 전국 수준의 해결책 모색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만큼의 지불능력이 없는 기업이나 고용안정과 복지를 제공할 여건이 안 되는 기업에서는 노사가 극렬하게 대립하면서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뿐 별다른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현재 한국 사회가 봉착한 복지문제나 고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로소득에 대한 조세강화, 대기업의 고통분담(초과이윤 혹은 독점이윤의 사회적 분배),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임금동결 혹은 삭감), 노사정 3자간 대화를 통한 산업정책의 개발과 실행, 지역사회 및 지역정부의 개입 따위의 종합적인 처방이 필요한데, 이게 기업 수준의 노사관계와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가능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산별노조, 경제적 의사결정 시스템의 민주화
김순환 기자와 남 교수는 "산별노조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따른 경제의 의사결정 시스템 변질"을 우려한다. 이 말은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거짓을 담고 있다. 산별노조가 노조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산별노조가 경제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변질'을 가하려는 것임도 분명하다.
여기서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변질'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산별노조로의 전환이 기업의 성장과 국민경제 발전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사정은 정반대가 될 것이다.
산별노조로의 전환과 이에 따른 산별교섭의 정착은 기업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산업 혹은 전국 수준에서 해결할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노사관계의 측면에서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의 교섭 비용과 갈등 부담을 줄여줄 것이다.
김순환 기자와 남성일 교수는 "이제 노조도 정치적 힘보다는 일자리 창출로 초점을 옮겨 공동의 미래를 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자리 창출은 마음 좋고 능력 있는 사용자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 창출은 산업적 문제이며, 사회적 문제이며, 전국적 문제이며, 정치적 문제다.
일자리 창출과 복지확충의 책임을 더 이상 개별 기업의 노사에게 떠맡겨선 안 된다.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 산업 차원에서, 사회 차원에서, 그리고 전국 차원에서 노사정 3자와 지역사회가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그걸 되게 하는 게 산별노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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