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의 시선이 축구공에 모아져 있는 이 때 축구 종주국 스코틀랜드에서 책 한 권이 건너왔다. 이 책은 여전히 영국 국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꼽는 존 레논의 '이매진'과 인연이 깊다. <이매진>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존 레논의 '이매진'을 인용하며 책을 시작하고 있다. 더구나 책을 출간한 출판사 이름 역시 '이매진'이니 시선이 안 갈 수 없다.
<이매진>의 내용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부제를 살펴봐야 한다. 이 책의 부제는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이다. 부제를 듣고 "21세기에도 '사회주의' 타령이냐고?"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이 책의 저자들에게 또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사회주의'는 과거의 구닥다리 유산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예고하는 '희망의 낱말'이다.
동료 앨런 맥쿰즈와 함께 이 책을 쓴 토미 셰리단은 바로 '희망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스코틀랜드의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자이자, 토니 블레어만큼이나 (물론 정반대의) 화제를 몰고 다니는 기성 정치인이다. 물론 동료 정치인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지만 말이다.
스코틀랜드사회주의당을 아십니까?
<이매진>(김현우 옮김, 이매진 펴냄)은 1998년에 창당한 스코틀랜드사회주의당(SSP)이 만들고자 하는 미래를 펼쳐보인 책이다. SSP는 1990년대 아예 "오른쪽 깜빡이를 켜면서 우향우" 하고 있는 노동당에 환멸을 느낀 좌파들과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로 기우는 스코틀랜드 독자 의회의 제1당 스코틀랜드국민당(SNP)에 회의적인 이들이 합심해 만든 신생정당이다.
하지만 이 SSP가 영국 사회에 준 충격은 비슷한 나이의 국내 민주노동당과 비교할 게 못 된다. 이 책의 저자인 셰리단은 창당 직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비례대표 21.5%의 지지를 얻어 국회의원이 됐다. 이어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SSP는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4.3%를 얻어 일약 영국 전역에서 '노동당을 대신할' 좌파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셰리단과 그의 동료 맥쿰즈는 <이매진>에서 SSP가 지금 세계를 또 영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SSP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책은 여러 가지 필요에 따라 읽을 수 있다. 우선 노무현 정부가 선망하는 세계화와 그 구체적인 예인 토니 블레어의 영국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세계화 비판서'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애초 저자들의 의도대로 <이매진>을 읽을 수도 있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사회주의자 켄 로치의 지적처럼 미래사회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필요한 가이드로 이 책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맞서 싸우는지를 알기는 쉽지만,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 훌륭한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그곳으로 갈 것인가? 이 책을 읽고 찾아보자!"
풀뿌리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새로운 사회
<이매진>의 '사회주의'에서 20세기 사회주의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철저하게 풀뿌리 민주주의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이매진>이 꿈꾸는 사회에서 모든 작업장은 노동자 평의회를 선출함으로써 운영된다. 노동자 평의회에서는 임금, 노동조건,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 생산 목표, 투자에 대한 주요 결정들을 재가한다.
"그건 유토피아적이야, 그건 시행될 수 없다고, 그건 대혼란을 낳을 거야." 이런 반응을 예상하기로도 한 듯 <이매진>은 그런 작업장의 예를 역사에서 찾는다. 클리이드사이드 조선소도 그 중 하나다. "1970년대 초반, 대량 해고에 직면한 수천 명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주문 장부를 접수하고 네 개의 클리이드사이드 조선소를 1년 동안 운영했다. 모든 중요한 결정들은 전체 노동자들이 모인 대중 회합에서 나왔고, 조정위원회가 공장을 운영했다."
'사회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 일부는 사회적 평등에 기반을 둔 사회는 단조롭고 순응적인 사회가 돼 개인주의는 환영받지 못하고 재능이나 다양성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매진>은 그렇다면 과연 자본주의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과연 '자유'와 '다양성'을 고무하는 사회인지 되묻는다.
"세계의 어느 곳으로 여행 가든, 당신은 똑같이 재미없는 식품을 파는 똑같은 패스트푸드 식당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은 똑같은 디자이너의 상표가 붙은 똑같은 옷을 입는다. 술집에 가면 똑같은 맥주에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똑같은 음악을 듣는다. 극장에 가면 아마 그 지역의 언어로 더빙되거나 자막을 붙인 똑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볼 것이다."
<이매진>은 노동시간의 점진적 단축을 통해 '자유'와 '다양성'이 무한히 고무하는 사회를 꿈꾼다. 이런 사회에서 예술가들은 사회 전체한테서 생계 소득을 지급받게 될 것이다. 더 궁극적으로는 예술가와 나머지 사회 사이의 구분도 희미해질 것이다. 누구나 이 영역 저 영역에서 저마다의 재능과 개성을 뽐내는 것이 권장되고 그림과 조각들이 고급 상가 구석의 미술관으로 숨는 대신 주변 어디서나 보게 될 것이다.
꿈을 꾸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그렇다고 셰리단 등이 <이매진>에서 개진된 생각을 '교리'처럼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스코틀랜드 이 곳 저 곳, 그리고 더 멀리까지 광범한 이데올로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세세한 주장들 중 일부는 생선 가시처럼 뽑아낼 필요도 있고 틀림없이 비판될 것이다."
이런 저자들의 바람에 응답해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대개의 좌파들이 그렇듯이 <이매진> 역시 과학기술에 대한 강한 낙관론을 견지하고 있다. 정보통신의 획기적인 발달로 전국 규모의 계획 경제가 오류 없이 가능하다는 확신이나 직접 민주주의의 공간으로서 인터넷 공간의 가능성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은 그 한 예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미 과학기술이 자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현실을 염두에 두면 이런 <이매진>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이런 <이매진>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한 세기 전에 출간된 영국의 선배 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국내에도 번역된 <에코토피아 뉴스>(박홍규 옮김, 필맥 펴냄)에서 모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지 200년 후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과학기술 유토피아가 대세이던 당시 분위기에서는 특이하게도) '하이테크' 사회와 거리가 먼 자연과 이웃을 배려하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매진>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을 되씹으면서 셰리던이나 모리스처럼 각자가 그리는 미래사회를 꿈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구성원들이 꿈을 꾸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이매진>은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사적인 탐욕인가 사회적 필요인가? 이윤인가 인간인가? 불평등인가 공정성인가? 위계제인가 민주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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