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사옥 앞에 가면 1인시위를 벌이는 한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이 할머니는 올해 1월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현대차 사옥 앞에서 '정몽구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며 시위를 해 왔다. 1인시위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시위방법이래야 별 것 없다. 그저 현대차 사옥에 드나드는 현대차 직원들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는 정도다.
올해로 70세인 이인애 씨가 이처럼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씨가 대표로 있었던 정신산업이 지난 1999년 현대정공(주)(현 현대모비스)에 납품한 물건의 값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모비스는 이 거래가 계약서 상 로템(한국철도차량)과 이뤄졌던 것인만큼 정신산업은 이 문제를 로템 측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계약서 상으로만 그렇게 돼 있을 뿐 실제 모든 거래는 현대정공과 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로템은 국내 최대의 종합 철도사업 회사로 1999년 재벌기업 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에 따라 현대(40%), 대우(40%), 한진중공업(20%)의 철도차량 사업부분을 통합해 출범했다.
잘 나갔던 중소기업…대기업 '현대'를 만나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이인애 씨에 따르면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화물열차 등에 부속되는 부품이나 시설을 생산했던 정신산업은 1990년대 후반 다른 중소기업들이 IMF 외환위기로 휘청거릴 때도 적자 한 번 내본 적 없는 우량한 중소기업이었다. 그러나 정신산업이 1999년 7월 오스트리아에 수출할 카캐리어(화물열차)에 부착될 리프팅 장치를 만들어주는 하도급 계약을 현대정공과 체결하면서 '악몽'이 시작됐다고 한다.
현대정공은 계약을 체결하기 전 하도급 가격을 시가보다 아래로 낮춰달라고 요구했고, 정신산업이 계약을 거부하자 '추가로 발주를 해준다'와 같은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해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현대정공의 이런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고, 정신산업은 10억 원 상당의 손해를 보며 납품을 강행해야 했다는 것이 이 씨의 주장이다.
그렇게 납품한 제품들 중에는 현대정공 측이 제공한 도면에 하자가 있어 손을 보거나 아예 새로 만든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신산업은 '도면 하자로 인해 추가로 든 비용은 나중에 정산해주겠다'는 현대정공 측의 말을 믿고 새로 제품을 만들어 납품했지만 현대정공은 약 36억 원에 이르는 추가비용을 아직까지도 지불하지 않고 있다고 이인애 씨는 주장했다.
게다가 원래 계약대금이었던 29억 원도 제때 지급받지 못해 정신산업은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인애 씨가 '현대'라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행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기막힌 일들"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에 낯설지 않다.
◇부당한 하도급 가격 인하 요구=당시 정신산업과 현대정공이 맺었던 하도급 계약은 정신산업이 현대정공으로부터 받은 설계도면에 따라 카캐리어 리프팅 장치 300단위를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었다. 정신산업은 애초 계약금액으로 리프팅 장치 한 단위당 1488만 원을 제시했는데 현대정공은 가격을 1311만 원, 1200만 원, 1180만 원으로 깍더니, 급기야는 1080만 원으로 낮췄다. 정신산업이 '이 가격에는 계약을 할 수 없다'며 계약체결을 거부하자 다급해진 현대정공은 '추가로 300단위의 리프팅 장치를 발주해줄 것이고, 1차 물량에 대해서는 나중에 실비로 정산을 해주겠다'는 조건을 달아 결국 단위당 1080만 원에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이인애 씨는 주장했다.
이에 대해 로템 측은 "가격 변동이 있었던 것만 가지고 '압력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가격이 안 맞았으면 계약서에 서명을 안 했으면 그만 아니냐"고 반박했다. 또 로템 측은 "계약서에는 '수주 확정시 추가로 발주를 해주겠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며 "그러나 나중에 수주를 못 받아 추가 발주를 안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 거래법)'은 '부당한 하도급 대금의 결정 금지' 조항(4조)에서 "원사업자는 수급사업자에게 제조 등의 위탁을 한 경우에 부당한 방법을 이용해 목적물과 동종 또는 유사한 것에 대해 통상 지급되는 댓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수준으로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거나 하도급 받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계약금 미지급 및 위조서류 날인 강요=이인애 씨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정공은 '오스트리아에서 수출 계약금을 받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정신산업에 계약금을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 씨는 나중에 직접 확인해본 결과 현대정공이 오스트리아에서 수출 계약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도급 거래법은 계약자가 하도급업체에 "계약금의 10%를 선급금으로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이 씨에 따르면 현대정공은 약속했던 정기결제일이 다가오자 '현대정공이 선급금을 지급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가짜 서류를 꾸민 후 정신산업에 이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한 결제를 해줄 수 없다고 우겼다. 계약금을 받지 못하고 자사의 자본금을 들여 하도급 제품을 만드느라 자금사정이 악화됐던 정신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서류에 도장을 찍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이 씨는 주장했다.
◇설계변경으로 인한 추가비용의 정산 거부=이인애 씨의 주장에 따르면 정신산업은 현대정공 측이 준비한 설계도면대로 리프팅 장치를 만들어 제 납기일에 납품을 마쳤다. 그러나 설계도면에 하자가 있어 현대정공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설계의 변경을 요구했다. 수백 차례에 걸친 설계변경으로 이미 만든 리프팅 장치를 폐기하고 새로 제작해야 하는 일이 이어졌고, 그 결과 35억7640만 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했다. 현대정공은 '설계변경으로 인해 발생한 추가비용은 나중에 모두 정산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납품이 완료되자 이 추가비용에 대한 결제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고 이 씨는 주장했다.
이에 대해 로템 측은 "정신산업이 제대로 만든 리프팅 장치는 몇 개 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실비로 정산해 줬다"며 "또한 나중에 이인애 씨로부터 추가 비용 발생이나 추가 가격 인상은 없다는 내용의 확약서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씨는 "모든 리프팅 장치들을 제대로 만들었다"며 "확약서도 날조된 것"이라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하도급비의 고의적인 연체=설계도면의 잦은 변경으로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정신산업의 자금사정은 날로 악화됐다. 그런 상황에서 현대정공의 담당 직원은 정기결제일이던 2000년 7월 15일에 대금을 결제해주겠다는 약속을 해놓고는 잠적해 버렸고 "제 날짜에 받을 돈을 받지 못한 정신산업은 그날로 부도가 났다"고 이인애 씨는 주장했다.
이에 대해 로템 측은 "자금 사정이 악화된 정신산업 측에 대금을 미리 지불한 적도 있었다"며 "한국신용평가에 조회해 본 결과 정신산업은 그 당시 이미 부실기업이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정신산업은 주거래 은행이었던 중소기업은행 구로중앙지점이 "당점과 여신거래를 신용도 있게 성실히 이행해 신용대출도 지원"했을 만큼 신용이 좋은 기업이었다.
◇서류 위조=한편 이인애 씨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정공 측은 계약 당시 '현대 내부의 거래를 이용하면 납품할 제품에 들어갈 부품의 가격을 단위당 50만 원씩 낮출 수 있다'며 정신산업으로부터 1억5000만 원을 선어음으로 받아갔다. 그러나 현대는 부품을 더 싼 가격에 공급해주지 않았다.
이에 이인애 씨가 1억5000만 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당시 현대정공 이사 ㄱ씨는 이 씨에게 탄원서를 써오라고 했다. 이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 씨가 탄원서를 써 오자 현대정공 측은 탄원서의 내용을 조작해 이 씨가 1억5000만 원의 커미션(뇌물 수수료)을 현대정공 직원에게 준 것처럼 꾸민 후 오히려 이인애 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이에 대해 로템 측은 "이 씨가 이런 일들을 둘러싼 정확한 사정을 잘 몰랐을 수 있다"며 "이 씨가 이 일과 관련된 회사 내부 직원과 법적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현대모비스 "법대로"…이인애 씨 "받을 돈 받겠다는데 왜 법정 가야 하나"
이인애 씨는 당시의 거래 계약서, 거래 명세표, 설계변경 지시서, 추가 부품제작 통보서 등 관련 서류들을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씨는 아직 현대모비스(구 현대정공(주))를 고소하지 않았다. "대금 정산을 명시하고 있는 서류가 엄연히 눈 앞에 있는데 왜 소송까지 가야 하냐"는 것이 이 씨의 생각이다.
로템 측이 '법대로 하자'며 대금 결제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이 씨가 대기업의 횡포를 법에 호소하는 것을 저어하게 만드는 이유다. 이 씨는 로템 직원이 '법정에 서면 현대는 법조계와 연이 닿아 있는 최고의 변호사들을 동원할 텐데 당신이 그들을 당해낼 자신이 있느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이 씨가 생각해도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이 씨는 정몽구 회장을 만나기만 하면 이 모든 고난이 일시에 해결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씨는 "나도 사업을 해봐서 잘 알지만 정몽구 회장처럼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정산을 해야 할 서류가 눈 앞에 엄연히 있는 데 정산을 안 해줄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씨의 꿈은 정몽구 회장을 만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씨가 지난 4개월 간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사옥과 정 회장이 구속·수감된 안양구치소를 오가며 1인시위를 해 온 사연이다. 오랫동안 시위를 한 결과 이제는 이 씨의 절에 맞절을 하거나 미소를 건네는 현대 임직원들도 상당히 많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차 직원들은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 사옥을 출입할 때 이인애 씨의 1인시위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배려'한다고 한다. 이 씨는 정 회장이 사옥에 도착하면 현대차 직원들이 이 씨를 에워싸고 이 씨의 머리와 상체를 강제로 수그리게 한다고 설명했다.
로템 측은 "정몽구 회장은 당시 로템의 대주주였던 현대정공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주주였을 뿐인데 정 회장에게 이 사태를 책임지라고 하는 데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우리는 수 차례 이 씨와의 대화를 시도했고 지금도 대화를 할 의향이 있지만 이 씨가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언제든지 만나 대화할 수 있다"며 반박했다. 이 씨는 자신이 실제로 계약을 체결하고 이행했던 주체가 현대정공인 만큼 이 문제를 현대정공, 즉 현대모비스와 푸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지난 4개월 간의 시위로 인해 건강했던 이 씨의 몸은 많이 상했다. 특히 관절의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하지만 이 씨는 "내가 입 닫고 죽으면 중소기업들이 당하는 이런 억울한 일들이 묻히니, 앞으로도 1인시위를 계속할 것이다. 24일에는 '제3차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회의'가 열리는 청와대 앞에 가볼까 한다"며 밝게 웃었다.
이인애 씨는 지난주부터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정몽구 회장 앞으로 직접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래는 이 씨가 정몽구 회장에게 보낸 서신들 가운데 하나다.
접견민원서신 2006년 5월 18일(목) 보내는 사람: 이인애 받는 수용자: 4001번 정몽구 정몽구 회장님, 밤새 편히 주무셨는지요. 저 이인애, 오늘도 회장님 계신 곳에 와 몇 자 글을 올립니다.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남의 빚은 갚고 사는 세상인데… 약비한 여자 몸으로 힘든 제조업을 하여 현대정공(주)의 대표 정몽구 회장님으로부터 오스트리아 카캐리어(화물열차) 리프트 장치 계약금도 하나도 받지 않고 1998년 IMF 외환위기로 힘들었던 시절 1999년 7월 26일에 계약해 납기일을 지켰고 도면에 하자가 있어 다시 만들어 납품하면 추가로 정산해주겠다는 현대정공의 약속을 믿고 추가로 7~8차례 제작을 반복해 현대정공에 납품했던 정신산업 이인애입니다. 그 화물열차는 지금 5년째 오스트리아에서 잘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산업 이인애는 지금도 그 추가로 납품한 장치의 대금을 하나도 못받고 오늘도 현대자동차 사옥 앞에서 새벽 6시부터, 구치소 앞에서 8시부터 대검찰청 앞에서 11시부터 이렇게 회장님 면담을 원하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하루 빨리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이인애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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