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하는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는가
<대한민국을 멈춰라>에 실린 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노라면 암담해진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 만 5년 이상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명백히 '폭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성익 주간은 이라크 파병, 새만금 간척 사업, 부안 사태, 지율 스님의 단식, 청계천 복원 사업, 황우석 사태에서 이런 '폭주'의 징후를 발견한다.
"아마도 지율이 죽어서라도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온통 휩쓸고 있는 '죽음의 향연', 곧 모든 자연과 사람과 생명을 끝도 없이 파괴와 멸절과 타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개발과 성장의 광풍을 멈추라는 것이 아닐까? (…) 오로지 경제 발전과 물질의 풍요에 대한 우상 숭배 속에서 (…) 사람도 자연도 사회 공동체도 갈수록 황폐해져가는 이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끝내라는 것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는 폭압적인 군부 파시즘과 개발 독재의 깃발 아래 초고속으로 진행돼 온 맹목적인 산업화·근대화와 초고속 양적 경제 성장의 음습한 그늘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들의 총화이자 그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물질적 부의 축적과 팽창만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떠받들면서 단세포적이고 근시안적인 사회 발전 기획과 국가 운영 전략에만 몰두해 온 결과가 이번 황우석 사태에 고스란히 각인돼 있다는 것이다."
"청계천은 생태·역사·문화의 복원이기는커녕 정반대로 복원을 사칭한 또 다른 '개발'과 '파괴' 사업일 뿐이며, 화려한 스펙터클로 치장된 인공 하천이자 도심의 조경 공원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특정 개인의 대권욕에 따른 정치적 기획과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포획된, 천박한 신개발주의의 기형적 산물일 뿐이다. (…) 지금의 청계천은, 아무리 자연과 생태의 이미지를 덕지덕지 덧칠한다 해도, 본질적으로 '틀면 나오고 잠그면 바로 멈출 수밖에 없는' 차디찬 인공의 구조물일 뿐이다. 어느 논자가 비꼬았듯이, 어항에 물고기만 담아놓고서 생태계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
누가 지금 '환경'을 말하는가
정작 세상은 이렇게 생명, 환경, 평화를 짓밟고 폭주하고 있는 데도 한국 사회는 빙하를 향해 돌진하는 타이타닉 호에 탑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서 한국 사회는 더 큰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장성익 주간은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수 년 전부터 <환경과생명> 지면을 통해 가다듬어 온 '신개발주의'를 든다.
"최근 들어서는 특히 이른바 '신개발주의' 문제가 도드라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전의 개발주의가 국가 주도로 환경을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파괴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작금의 개발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맞물린 시장 지배 사회의 가속화를 배경으로 환경을 더욱 유기적이고 전면적이고 내재적으로 결딴내고 있다는 것이다. (…) 신개발주의는 절차적 정당성과 그럴 듯한 명분을 확보하기도 하고, 개발에 대한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환경에 대한 고려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한다."
"신개발주의는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이미지를 만들어 장소 자체도 상품으로 바꾸어 버리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전의 개발주의가 '필요'를 위해 개발을 양산했다면, 신개발주의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발을 고안해낸다. (…) 자연 환경을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가치나 개발 이익을 창출하는 대상으로 간주하여 더욱 깊숙이 시장과 자본의 메커니즘으로 포섭함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세련되고 교활하고 악랄하게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개발주의다."
"'참여 정부'가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는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것의 실상이 '지역 균형 파괴'인 데에서 보듯이 오늘날 신개발주의는 국가 정책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지배적인 담론과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고, 개인의 의식과 행태 또한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진정한 '참살이'라기보다는 계층적으로 차별화된 소비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특성을 강하게 내포하는 최근의 '웰빙 열풍'도 이러한 시각에서 조명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기로에 선 환경운동, 과연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위기 상황에 대해서 환경운동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장성익 주간은 이 책의 5분의 1을 할애해서 환경운동에 대한 날선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장 주간은 이 책에도 재수록된 '환경 귀족은 가라'와 같은 글을 통해 2004년부터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해 큰 관심을 모으며 환경운동 안팎의 자기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냈다.
"세상은 환경운동에 불리한 쪽으로 빠르게 변해 왔음에도 우리 환경운동은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과거 '잘 나가던 시절'의 영광과 명성과 도덕적 우월의식 등에 관성적으로 안주해 온 것은 아닌가. (…) 환경운동이 짧은 기간에 이룩한 빛나는 양적 성장에 도취해 치열한 자기 반성과 성찰, 그리고 변화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쇄신과 질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고, 이런 문제에 대한 냉철한 자각과 그에 따른 실천을 추동할 만한 운동 내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환경운동은 언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많이 보이고 있다. (…) 언론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논리와 이해 관계에 따르는 속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환경이 마치 유행 상품처럼 '잘 나갈' 때에는 환경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다. (…) 이제 환경운동은 더 긴 호흡으로 언론을 지나치게 의식하기보다는 자기 갈 길을 묵묵하게 가고자 하는 의연한 태도를 갖춰야 한다. (…) 이제 언론을 통해 '보여주는 운동'이 아니라 시민 대중과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결합과 소통을 통해 풀뿌리와 현장과 생활 속으로 '스며드는 운동'으로 가야 한다."
"환경운동 진영의 이른바 '상층 명망가'들 중에, 노동운동 본연의 운동성과 진정성과 계급성을 잃어버리고 자본과 타협함으로써 변질과 오염의 길을 걸은 '노동 귀족'에 빗댈 만한 사람이 있다. (이들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때깔 나는' 자리만 찾아다닌다든가, (…) 환경운동의 커진 영향력과 높아진 지명도를 기업의 후원이나 정부의 예산 지원을 확보하는 데 사용한다든가 (…) 따위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들을 보인다. (…) 환경운동의 건강하고도 성숙한 발전을 위해서는 (…) 개별 단체 차원이든 환경운동 전체 차원이든 환경운동 지도부의 '물갈이'와 '세대 교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얼치기 희망'보다 '정직한 절망'을 온 몸으로 떠안자
한국 사회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 장성익 주간은 이제 '얼치기 희망'을 말하기보다는 '정직한 절망'을 온 몸으로 떠안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 사회 곳곳의 '절망의 현장'을 온전히 직시할 때 '새로운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희망이 정치인들의 입 발린 '희망'과 다름은 물론이다.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을 훨씬 더 압도적으로 옭아매고 있는 것은 도저한 절망의 현장들이다. 지율의 저 지독한 슬픔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또 다른 '지율들'을 요구하고 있고, 저 치욕스러운 황우석 사태를 겪은 이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황우석들'이 들끓고 있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 절망의 구렁텅이에 더욱 깊이 빠져보아야만, 그때라야 비로소, 그 상처투성이 절망을 가로질러 마침내 희망의 쟁기질을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개인이든 사회든 (…)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에 길들여질 때 거기에는 오로지 노예의 굴종만이 있을 뿐 내일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어떠한 인간적 가치와 존엄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 슬픔도 힘이 되듯,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자. 동시에 현실의 엄중한 진상은 그것대로 날카롭게 직시하되, 그 현실을 돌파하는 진정한 힘은 외진 골방보다는 더불어 어깨 걸고 전진하는 광장에서 온전히 확보되고 분출된다는 사실을 깊이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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