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이 최근 현대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지분을 대량 매집하면서 '백기사'를 자처한 데 대해 현대그룹이 현대중공업그룹에 대고 '진짜 백기사라면 증명해 보이라'고 공식으로 요구했다.
2일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그룹이 최근 매집한 현대상선 지분 26.68% 중 10%를 즉각 현대그룹에 매각하라고 요구했다.
또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그룹이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현대상선의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며, 추가로 현대상선의 지분을 매입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은 현대그룹에 대한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을 시도하지 않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하라고 촉구했다.
현대그룹은 이날 오후 서울 현대상선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중공업그룹이 사전에 (현대그룹과) 아무런 협의도 하지 않고 현대상선의 지분을 외국 투자자들에게 프리미엄까지 얹어주면서 대량으로 매입한 것은 명백한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인 동시에 외국 투자자들에게만 큰 이익을 안겨준 무책임한 국부유출 행위"라며 위와 같은 3가지 요구사항을 밝혔다.
현대그룹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 매입은 명백한 경영권 위협"
이에 앞서 이날 오전에 현대그룹은 같은 내용의 요구사항을 담은 문서를 현대중공업그룹에 보냈다.
현대그룹의 전인백 기획총괄본부 사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현대그룹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은 현대엘리베이터가 보유한 지분 17.2%과 기타 우호지분을 포함해 35% 수준이며,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 중 16%만 넘겨받아도 우호지분이 절반 이상이 돼 경영권 방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며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중 10%를 현대그룹에 넘기라고 요청했다.
전 사장은 "현대중공업의 적대적 M&A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실망과 심려를 끼쳐 드린 점에 대해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며 "현대중공업은 사전에 (현대그룹과) 아무런 협의 없이 현대상선의 지분을 대량 매입해 시장을 혼란시킨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동시에 현대그룹에 대한 적대적 M&A를 즉각 중단하겠다고 국민 앞에서 공식으로 약속하라"고 촉구했다.
현대그룹 "현대중공업 측의 진짜 의도는 달리 있다"
현대家의 세번째 경영권 분쟁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사태는 지난달 27일 현대중공업그룹이 사전에 현대차그룹과 협의하지 않고 현대차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지분을 대량 매집하면서 시작됐다. 공교롭게도 이날 검찰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당시 현대중공업그룹의 핵심 계열사들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은 노르웨이계 해운회사인 골란LNG의 계열사인 제버란트레이딩, 스타뱅커 등으로부터 현대상선 지분을 각각 18.43%, 8.25% 매입했다. 이로써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상선에 대해 지분 20.73%를 보유한 현대그룹을 제치고 1대 주주 자리를 꿰찼다.
현대중공업그룹은 "골란LNG 쪽에서 먼저 지분 인수를 요청했다"며 "(현대상선의 지분을 매입한 이유는) 적대적 M&A의 위협에 처해 있는 현대상선의 경영권 방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골란LNG는 최근 현대상선의 지분을 꾸준히 매입해 현대상선에 적대적 M&A를 시도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냈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 측의 이같은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백기사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왜 현대그룹과 사전협의를 하지 않았는지 △경영권 방어를 위해 굳이 26.68%나 되는 지분을 전량 매입할 필요가 있었는지 △최근 평균 주가에 20%나 되는 프리미엄을 얹어 주당 1만8000원이라는비싼 가격에 주식을 매입한 이유는 무엇인지 △현대상선의 분식회계, 대북송금에 대한 특별검사, 유동성 위기 등으로 현대그룹이 정말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을 때는 모른 척하다가 왜 이제서야 나서는지 등 현대중공업그룹의 '진의'를 의심하게 할 이유들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형수' 현정은 회장과 '시동생' 정몽준 의원의 악연
재계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최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이 형수인 현정은 회장이 총수로 있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를 '시동생의 난'이라 칭하고 있다. 이는 2000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사이에 벌어진 '왕자의 난', 2003년 정상영 KCC 회장과 고 정몽헌 회장 사이에 벌어진 '숙부의 난'에 이어 세 번째 집안 다툼이다.
현대그룹의 고 정몽헌 회장, 그의 아내인 현정은 회장과 현대중공업그룹의 정몽준 의원은 현대가 분쟁의 핵심 당사자들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최근 한 경제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정몽준 의원이 '왕자의 난'을 부추겨 고 정몽헌 회장을 현대의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으며, '숙부의 난' 때도 정상영 회장 편을 들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지난 2000년에는 이번 사태와는 정반대로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현대그룹이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었다.
'시동생의 난' 본게임은 현대건설의 매각과 함께 시작될 듯
재계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의 지분을 매집한 '진짜' 이유는 현대건설의 매각이 본격화되는 6월에야 드러날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공식적으로는 "현대상선이나 현대건설의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대중공업이 정말로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노리고 있다면 현대건설의 인수에 나서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그룹은 올해 하반기에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이번에 현대상선 지분을 사들이면서 현대그룹의 이같은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이 불가피해진 데다,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의 인수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면 현대그룹에 미칠 타격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데 성공할 경우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의 지분 8.69%를 통해 현대상선에 대한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 현대그룹에 대한 경영권도 넘볼 수 있게 된다.
즉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건설의 인수에 나서는 순간이 바로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그룹에 대한 경영권 공격을 공식화하는 때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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