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8일 오후 제물포(現 인천)에서 뤼순으로 향하던 러시아 군함 카레예츠 호를 향해 일본 함대가 3정의 어뢰를 발사했다. 예고 없이 자행된 이 공격에 카레예츠 호에 승선 중이던 러시아 군인들은 크게 놀랐지만 본격적인 대응 사격은 자제했다. 러시아 군에 대한 공격 의사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될 때까지는 전쟁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동북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 러일전쟁(1904~1905)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100여 년 전 인천 앞 바다에서 이틀에 걸쳐 러시아와 일본 함대가 맞붙은 '제물포 해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는 르포르타주가 102년 만에 발굴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더구나 이 책,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Ar. 요한슨 그림, 이주영 옮김, 작가들 펴냄)은 〈오페라의 유령〉(성귀수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으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소설가 가스통 르루가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쓴 것이라 더욱더 관심을 끈다. 르루는 본격적인 소설가로 나서기 전 프랑스의 일간지 〈르 마탱〉의 베테랑 기자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이 책은 가스통 르루가 제물포 해전에 참여한 군인들이 러시아로 귀환하는 길에 닷새 동안 동행하면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이 100년 만에 바다를 건너온 사연도 눈길을 끈다. 인천의 옛 자료를 찾는 데 이골이 난 인천도시환경연대회의 이희환 집행위원장은 한 인터넷 고서점에서 화려한 삽화가 곁들여진 이 책을 처음 발견한다. 어렵게 구매를 대행해 프랑스에서 구입한 이 책은 1904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출간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반도 운명 가른 100년 전 제물포 해전의 기록**
제물포 해전은 1904년 2월 8~9일 이틀간 제물포 앞 바다에서 벌어진 러시아 함선 카레예츠 호, 바랴크 호와 일본 함대 사이의 전투를 가리킨다.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점했던 일본 함대에 의해 러시아 군함은 침몰하고 참전한 수병 700여 명 가운데 최소한 4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다쳤다. 제물포 해전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일본 함대는 랴오뚱 반도의 뤼순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의 발발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제물포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을 연결하는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의 연결 고리를 차단해 양분함으로써 2년간 계속될 전쟁의 승기를 잡는다. 러시아는 그 뒤 황해해전(1904년 8월 10일), 만주전투(1905년 3월 1일)에서 대패한 뒤, 1905년 5월 27~28일 북유럽의 발틱 해에서 8개월을 돌아 동해까지 온 발틱 함대마저 패함으로써 패색이 짙어진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영향력 하에 완전히 들어간다.
가스통 르루는 수에즈 운하에서 제물포 해전에 참여했던 러시아 군인들의 귀국선 오스트랄리앵 호에 탑승해 이들을 닷새 동안 심층 인터뷰 한다. 르루는 비록 패배자였지만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 함대에 끝까지 맞서 싸웠던 러시아 군인들의 영웅적인 면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실제로 이 제물포 해전이 끝난 뒤 귀국한 군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신화화되었으며 20세기 내내 체제에 관계 없이 러시아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 르루는 이 책에서 후일담 형식을 빌려 그들이 신화화되는 과정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책 전체에 한국 언급은 단 한 곳…제국주의 전쟁은 현재진행형**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의 해설을 덧붙인 이영호 인하대학교 교수(사학과)는 "이 책은 러일전쟁의 실질적인 개전을 가져온 제물포 해전에 대한 자세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며 "일본군의 입장이나 정보가 전혀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물포 해전에 대해 이만큼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 책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이 책의 가치를 평가했다.
특히 일본 함대와 당시 제물포에 정박 중이던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함대 간에 오간 편지는 사료 가치도 높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함대의 반응이다. 당시 일본 쪽이 이들에게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이유로 제물포를 떠날 것을 요구하자 이들은 일본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러시아 측이 호위 요청을 해 오더라도 이를 '거부할' 것임을 밝혔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당시 서양인들이 제물포 해전의 러시아 군인들에 열광했던 것은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일삼는 '비겁한 일본군', 즉 '비겁한 동양인'과 대비해서 서양인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서양인들의 심리 상태는 러시아 군인들이 일본 군인들을 '황인종', '황색 난쟁이'라고 경멸한 것과 대동소이했다.
100년 전 인천 앞 바다를 무대로 한 르포르타주이건만 책 전체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대한 언급은 딱 한 대목이 나올 뿐이다. "제물포는 오두막집들이 즐비한 작은 도시였고 정박지의 막다른 길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심이 얕고 수로가 좁으며 물이 깊지 않은 곳이 여러 군데 있는 까닭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도시 그 자체로는 전혀 매력이 없었기 때문에 경비정을 타고 이곳 제물포로 온 장교들은 몇 달씩 포구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의 책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기록돼 있다. "지난 2004년 2월 8일,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러일전쟁의 서막을 알린 제물포 해전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을 맞는 날, 인천의 친수공원에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러일전쟁 100주년 추모비'가 세워졌다. '순양함 바랴그 호와 카레예츠 호 러시아 선원들의 희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감사드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그날 기념식장 주변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일 간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의 기념물 건립을 반대하는 인천 시민단체들의 격렬한 항의시위가 전개되었다."
100여 년이 지났건만 제국주의 전쟁은 여전히 형태를 바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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