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기도 평택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에서 미군기지 터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강제집행을 저지하다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박래군 씨와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조백기 씨가 구속됐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 편에서 활발한 인권운동을 펼쳐온 두 사람의 구속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특히 당국이 인권활동가를 상대로 '증거인멸'과 '도주'를 우려해 구속 조치를 취한 데 대해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박래군 씨는 1988년 '광주학살 원흉처단'을 외치며 분신한 박래전 열사(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의 친형이다. 박래군 씨는 그 뒤 인권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해 왔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을 역임했다.
최근 박래군 씨의 처 정종숙 씨가 법원에 탄원서를 보냈다. 이 땅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박래군 씨의 삶을 담담히 짚으며 그에 대한 구속 조치의 부당함을 강조하고 있는 정종숙 씨의 탄원서 전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아이들 아빠를 풀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판사 님,
이 사건의 판결을 맡으신 판사 님께서는 판사 님의 가치관이나 삶과 퍽 다르게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일지라도 가슴에 담아 읽으실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길 바라면서 탄원서를 씁니다.
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다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된 인권활동가 박래군의 아내입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딸을 키우는 평범한 엄마지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과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알고 한마음으로 더불어 한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저희 남편은 평생을 낮은 곳에서 인권을 일궈내고 정의와 진실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 왔습니다.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외치다 억울한 옥살이를 1년이나 했고, 부모님도 모르는 사이에 군대에 강제 징집을 당했고, 자기 몸에 불을 붙여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 항거했던 동생의 시커멓게 탄 몸뚱이를, 꺼져가는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숱한 슬픔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 고난의 길을 피해 따뜻한 안식처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아 온 것은 내가 편안하고 배부르게 살 때, 내 곁에서 힘들게 고통 받고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는 착하고 올곧은 심성의 소유자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가난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한 삶**
남편은 어릴 적 아주 가난하게 살았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이 머슴살이로 시작해 농토를 일구어 삼형제를 가르쳐야 했던 집안이었으니까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점심시간이면 집까지 뛰어와 끼니를 때우고, 등잔불도 아끼시는 할머니 때문에 밤에는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도 읽을 수 없었답니다.
악착같이 농사일을 하셨던 부모님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과일이며 채소를 장에 내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는 뻥튀기 수레를 끌고 다니며 장바닥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삼형제는 너무도 착해 학교에서 돌아와 밤늦도록 농사일을 돕고 그 추운 겨울에도 뻥튀기 수레를 따라나서 하루 종일 시커먼 연기를 뒤집어쓰고 부모님을 도왔답니다.
가슴 절절한 시를 많이 썼던 동생이 남긴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자갈논 한 자리나마 가지고 싶다
밤낮없이 새경을 모으고
살 에이는 겨울길
뻥튀기 구르마를 끌던 아버지
국민학교 6학년 어린 나이로
구르마 쫓아다니던
큰 형님이 가여워
밤마다 베갯닢을 적시던 엄니
양회포 한 포대 얻자고
이장한테 삿대질하다가
퍼렇게 멍든 아버지 얼굴 보고
여보
우리도 한번 보란듯이 삽시다
울며울며
자식새끼들 끌어안으시던
엄니
시에 나오는, 등골이 휘도록 힘들게 살아온 부모님을, 부모님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남편은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잊지 않았습니다. 연세대 국문과를 나온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귀를 막고 쳐다보지 않고 살았으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처럼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슬픔과 어려움과 시련의 길**
남편은 인권의 불모지인 이 땅에 인권의 싹을 심고 키웠습니다. 장애인, 이주 노동자, 성적 소수자, 노숙자, 양심수, 구속 수감자, 복지시설 수용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당하고, 멸시받고, 차별받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찾고 고민하고, 그들이 일어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갔습니다.
반인권과 부패로 얼룩진 사회복지시설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을 정상화하기 위한 싸움에선 비리재단 측에서 퍼부은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말 못하는 이들의 귀와 입이 되어 주는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고문후유증을 앓던 선배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했고, 폭력적인 수용시설에 억울하게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았던 수용자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수용시설에서 나왔던 한 사람은 10년이나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는 고아여서 가족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그의 형제나 되는 듯 그 사람이 이사를 하면 이삿짐을 손수 날라 주고,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교도소에 있는데 얼마 전 석방 날짜가 연기된 줄도 모르고 사무실 총회를 밤 새워 하고 새벽에 춘천까지 차를 몰아 그를 맞이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가는 길엔 왜 이렇게 슬픔과 어려움과 시련이 많을까요.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 가진 자들과의 싸움, 폭력과의 싸움, 권력과의 싸움, 불의와의 싸움, 편견과의 싸움…. 끝도 없는 싸움이 계속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늘 씩씩하게 웃고 다닙니다. 우울하거나 비관하는 법이 없고, 좌절하지도 않고, 고난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갑니다.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리고,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남의 말을 들어 주었던 그의 곁엔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박래군이 자랑스럽습니다**
남편은 바깥 일로 늘 바쁘게 살지만 가정에도 충실한 책임감 있는 가장입니다. 아내를 존중하고 아낄 줄 아는 남편이고, 아이들로부터는 정신적 지주란 믿음을 얻고 있는 아빠입니다.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원고를 쓰거나 이런저런 일을 하여 가정의 경제도 책임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무책임하게 돌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는 시간이라도 쪼개어 가족들을 보살핍니다.
넓적하고 그을린 투박한 얼굴과는 달리 집에서는 아주 섬세하게 가족을 챙깁니다. 아이들이 엄마인 저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이해해 주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아이들과 놀아 주고, 아빠는 좋은 분이라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희 옆집 아주머니는 저희 집 아이들은 엄마가 오면 엄마하고 큰 소리로 나와 부르지 않는데 아빠가 오면 맨발로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아빠를 반기며 안긴다고 애들이 아빠를 참 좋아한다고, 무슨 아빠가 애들을 그렇게 예뻐하냐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저희 남편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빠로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경기도 화성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늙으신 부모님에겐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여느 농민처럼 당신의 목숨처럼 땅을 아끼시며 한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분이십니다. 제가 결혼하던 해 고관절을 앓으시고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되셔서 목발을 짚고 다니시지만 농사일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래 서 있을 수도 쪼그려 앉을 수도 없으셔서 땅바닥을 기어 다니시고 스티로폼으로 만든 방석을 끌고 다니면서도 밭일을 하십니다.
다들 왜 그렇게 사시냐면서 농사일을 그만두시라고 만류하지만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를 지으시겠답니다. 만류하는 가족도 있지만 저희 남편은 아버님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존중해 드리고, 아버님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드리고,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 농사일을 돕습니다. 토요일도 나가 일하고 돌아와 일요일엔 쉬어야 하는데 달려갑니다. 땅을 갈아 곡식과 채소를 심을 수 있게 해 드리고, 두둑을 만들고, 고추 말뚝을 박고, 거름을 져 나르고, 농약을 주고, 포도를 따고, 포도를 갖다 팔고, 고추를 따고 고구마를 캐고, 깨를 털고, 농기계를 수리하고, 쓰려면 다 쓸 수도 없는 고된 농사일을 불평 없이 하고 돌아옵니다. 막내아들을 그렇게 먼저 보낸 부모님이 찢긴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롭게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어서일 것입니다.
한평생 좋은 일도 없이 자식을 다 떠나보내고 병든 몸으로 외롭게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께 차마 남편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자식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실까, 참 걱정이 많이 됩니다. 아빠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은 몹시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아빠 같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왜 구속시키는지 모르겠다며 엄마와 아빠 모두 힘내시라고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판사 님께 비굴하게 빌지 말고 당당하게 부모님의 뜻을 말씀 드리라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몸부림이 있었기에…**
돌아보면 그와 수많은 인권활동가들의 행동은 이 땅의 소외된 자들의 인간다운 삶, 자유롭고 평등하고 인간의 권리가 존중되는, 존엄한 삶을 위한 고귀한 실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인권활동가의 노력으로 국가인권위원회도 만들어진 것이고 국민들도 인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인권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경찰 대학에 가서 인권 교육을 하고 법조인이 인권 교육을 받기도 하는 세상이니 인권의 싹이 크긴 큰 모양입니다. 그러나 인권은 아직 커다란 나무로 자라지 못했고 숲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인권활동가가 구속되고, 평생 살아온 땅에서 옷이 벗겨진 채 처참하게 끌려가는 농민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는 진실의 편에 서 있었고 그의 외침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지금 구속되어 철창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 또한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외면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었기에 나선 것입니다. 이 땅을 미군에게 내어 주어 전쟁터로 만들고 싶지 않으며 평생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음은 당연한 마음이고 지키려는 싸움은 정당한 싸움입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사업 추진 중 일어난 충돌은 주민과 국민의 충분한 협의와 동의 과정 없이 일부는 돈으로 회유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땅은 강제로 빼앗으려 는 일련의 과정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공무집행방해라는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땅의 평화이고 농민들의 생존권입니다. 농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땅을 강제로 파헤치는 일을 공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했다면 그렇게 반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공무를 방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악이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몸부림 끝에 뒤바뀌었는지 역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전쟁기지로 내어 주고 농민을 내쫓은 일도 부끄러운 역사가 되리라는 것을,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용기 있게 지켜내려 했던 실천이 옳았음을 재판 과정에서 밝힐 것입니다.
***신념에 따라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남편이 왜 구속돼야 합니까?**
제가 길게 저희 남편의 어린 시절이며 살아 온 이야기를 한 것은 저희 남편은 비겁하게 도주하지 않을 것이며, 재판을 성실하게 받고 진실을 밝히려 애쓸 사람이라는 것을 판사님께서 알아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구속이 필요하다고 상당히 의심된다는 '공무집행방해죄'는 검사 님의 소견일 뿐입니다.
이렇게 충돌되는 사안은 양쪽의 주장을 공평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쪽의 주장을 듣고 재판을 통해 진실을 가리면 됩니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불구속 수사와 재판으로도 얼마든지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죄가 있다고 상당히 의심되지도 않거니와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는 인권활동가를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합니다.
현 정부는 형사소송절차에서 피의자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집행해 나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에 따라 공개적으로 활동해 온 저희 남편은 왜 구속되어야 하나요? 아빠의 구속을 아이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판사 님, 부디 불구속수사 원칙이라도 지켜진 속에서 남편이 진실의 법정에 설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판사 님, 아이들 아빠를 풀어 주십시오. 남편이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게, 그가 이 세상 그늘진 곳에서 햇볕을 드리우는 소중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2006년 3월 22일
박래군의 아내 정종숙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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