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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지율 스님을 지켜야 하는가"

[기고] 다시 지율 스님의 단식을 보면서

지난 해 1월 〈프레시안〉에 '한 스님의 단식을 보며-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되돌아보자'라는 글을 기고한 이후 근 1년이 지났다. 그 글에서 필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이 사회의 관계들을 어떻게 단절, 파편화시키고 있는지,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남아 있는 생기(生氣)를 어떻게 고갈시키고 있는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한 스님의 단식'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중요한 성찰의 계기라는 차원에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문제의식을 절감할 때 '더불어 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을 피력한 바 있다.

물론 '사회'라고 할 때 그것은 '역사적 사회관계들'을 내용으로 하기에 그 구성원 또한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어떤 사회정치 세력, 개인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부차적인 소리로, 혹은 '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대상들을 거론해 보자면, 거기에는 생산력주의와 성장주의를 신조로 삼는 국가권력 및 기술관료, 그리고 거대자본과 그들의 이데올로그들, 또한 그들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아래에서 삶의 희망을 잃고 좌절과 분노를 퇴영적으로 분출하는 일부 대중이 포함될 수 있다.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인데 무슨 환경, 생태냐?"**

그런데 지난해의 상황과 사뭇 다른 것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핵심 세력인 권력과 기술관료, 자본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식 100일이 넘어 이 스님의 몸무게가 30킬로그램이 채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최소한의 애정이 담긴 인간적 발언' 한마디 하지 않는다. 특히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산다는 정치인들조차 그 가볍게 나풀거리던 입술을 떼지 않는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정치는 예술'이라는 수사(修辭)는 이 지점에 이르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의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그것을 합리화시켜주는 단순한 기술적 언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조용히 이 사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왜 이들이 말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들이 비워둔 침묵의 빈 공간은 일상적 삶에 고단한 일부 대중의 즉자적 목소리, 혹은 기술관료주의를 신봉하는 '이데올로그들'의 이런저런 목소리에 의해 대신 메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해 천성산 터널 공사의 중단은 지금까지 들어간 국민혈세를 낭비하는 것이라는 주장, 그것은 향후 나타날 막대한 물류비용의 절감 등 경제효과를 생각하지 않는 극단적 환경·생태론자들의 이기주의의 발로라는 것, 또한 무한경쟁의 시대에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반국가적 발상과 행태'라는 것 등 너무도 익숙하여 외울 정도가 되어버린 '홍보 내용'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지금 삶의 고통이 너무 심하기에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인데, 무슨 환경, 생태냐"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런데 더욱 안타깝고 섬뜩한 것은 이 낯익은 논리들이 이제 인간의 이성조차 마비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부류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필요도 없지만, 삶의 기로에 서 있는 이 스님에게 걸러지지 않은 채 배출되는 격한 감정의 배설물들은 그것을 반증해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아니 인간이기에 가능한 이 썩은 감정과 적대의 배설물로 인해 이 사태의 본질을 알면서도, 그것이 더러워 잠시 비껴 있는 많은 사람들 또한 지금은 침묵으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와 지율이 닮았다는 '진보 정론지'의 논설위원**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무엇보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진보 정론지'임을 자처하는 한 일간지의 논설은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여 장외투쟁을 하는 야당의 '여성 대표'와 이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스님'을 싸잡아 '근본주의자'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다른 지역의 환경파괴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하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천성산'에만 집착하느냐는, 이 또한 '님비(NIMBY)' 아니냐는 투의 단세포적 비판을 쏟아낸다. 거기에서 수구 언론과 구별되는, 나아가 진보에 상응하는 어떤 진정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이러한 비교로 인해 그 야당 대표의 '품격'은 높아졌으며, 이 논설은 그 대가로 분절되고 파편화된 사회관계들을 성찰해야 하는 '진보정론의 펜'을 스스로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권력과 기술관료, 그리고 공화국을 압도하는 거대자본들은 자신들의 '대국민 홍보자료'를 그대로 읊어주는 행위주체들에게 그저 박수만 치면 된다. 이제 굳이 앞에 나서서 말할 필요가 없다. 지난 학습의 경험이 확인해주듯 말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자신들의 반민주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실체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은 성공적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처럼 비용이 저렴한 '생산성의 정치'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구조와 정치 지형은 이 스님의 죽음을 넘나드는 오랜 단식과 무관하게 환경, 생태문제가 기존의 사회관계들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어디 이 문제들뿐이겠는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 비대칭적 사회관계들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농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소수자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에 규정된 삶 자체의 고통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포기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이 파편화된 사회는 이런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조차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냉혹함을 보이고 있다.

***누가 지율 스님을 외롭게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자본을 넘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했던, 무엇인가 대안의 사회관계들을 찾고자 했던 그 과거의 열정마저 거의 소진되어버린 지금 환경, 생태 문제의 해소, 극복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이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장벽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 질문이 가하는 중압감은 거대한 장벽 앞에서 계속되는 이 스님의 외침이 널리 공명되지 않는 가시적인 현재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외침을 강요하는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이 그 어떤 브레이크 장치도 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기에 더욱 심대하게 다가오고 있다.

환경, 생태 문제가 중요하다고 이구동성 말하면서도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정면에서 보지 않는, 이 인식과 행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으로 인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저 내면으로부터 더욱 깊은 상처를 받고 있으며 이와 맞물려 있는 인간관계들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듯이 더욱 파편화, 황폐화되고 있다. 이 문제가 특정 계급 및 계층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그리고 특정 국가에 국한될 수 없는 전 인류의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정하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껴안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이 문제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의 사회관계들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물질로, 따라서 먼 미래에 고민해도 될 그런 문제로 방치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이 지배하기에 스님의 묵언이 지니는 의미는 심심상인(心心相印), 염화미소(拈花微笑)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숨을 담보로 한 소영웅주의의 발로'로까지 치부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동맹' 괴물에 파탄 상태에 이른 삶**

그렇다면 지금 진정으로 환경, 생태문제가 계급과 계층을 초월한, 나아가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을 담보하는 국가권력을 넘어서는 전 국민, 전 인류의 문제인지 냉정하게 되물어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너무도 자명한 것처럼 수용되었던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그렇다'라는 긍정적 답변을 할 수 없게 된다. 아쉽게도 지금 당면한 환경, 생태문제는 계급과 계층, 국가를 초월한 문제로서가 아니라 바로 상이한 계급과 계층의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관계가 발생시키는, 이러한 관계들을 담보하는 국가권력을 포함한 상이한 수준의 위계화된 권력들이 맞물려 증폭시키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 사회를, 나아가 이 세계를 극단적인 분열과 대결의 관계로 몰고 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전도사들에 의해 추구된다는 점에서 그 반사회적 파장 및 결과는 단순히 과거의 개발동맹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크다. 지금의 이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의해, 더불어 산다는 것에 주목하는 모든 개별적, 조직적 발상과 실천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반동적 힘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 기획된 조성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상 '초유의 참'이다. '공유재의 종획(enclosure of commons)'을 핵심으로 하는 이 신자유주의 동맹이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기에 지금 이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인간관계의 파탄, 환경파괴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위협과 적대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시장과 자본의 논리가 유일척도로 관철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풀뿌리 삶의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공공재를 보존하고 생산하는 것에 대한 임무를 거의 포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정치의 핵심 주체인 국가권력의 수장은 새삼스레 권력이 시장에 넘어 갔다고 외친다. 농민들이 시위를 한다고 해도 세계화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는 논리를 펴며 그들의 무지함을 탓하면서 그 외침에 귀를 막는다. 거기에서 자본의 전횡을 상징하는 신자유주의는 슬그머니 빠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제기와 저항은 '세계화 반대'로 교묘하게 치환된다. 이렇게 하여 '국가권력은 중립적이다'라고 하는 그 오랜 '불문율'은 고통받는 대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며 대중에 강요하던 이들 동맹자들에 의해 부정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희망'을 위해서 지율 스님을 지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이 지난해 천성산 문제를 두고 합의했던 절차와 내용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 여부와 그것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검증 과정을 뒷전으로 밀어둔 채 스님의 단식 자체를 비난하는 데 온갖 열정을 쏟는 것은 어찌 보면 기이하지 않다. 세금을 축내는 것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국가권력과 다양한 관료기제들, 막대한 세금을 포탈하고도 법 앞에서 눈꺼풀 하나 깜짝거리지 않는 거대자본은 '막대한 국민혈세 낭비' 운운하며 자신들을 비호하는 발언들에 다소 뜨끔해하면서도 이 '우스꽝스럽고 기막힌 상황'을 표정관리하며 즐기고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양식 없는 대중과 언론은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고 그들을 대중의 민주적 권위 아래 복속시키려는 흐름에 참여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를 그 권력과 자본의 욕망이 추동하는 브레이크 없는 전차 속에 밀어 넣은 채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고 있다.

이미 '천성산 문제'는 어느 특정 지역에 터널을 뚫고 말고 하는 문제를 넘어선 지 오래다. 거기에는 각기 상이한 위상과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행위 주체들의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더불어 사는 사회관계를 희망하고 모색하는 세력들'과 '글로벌 신자유주의 동맹'과의 긴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천성산은 이제 '새만금'이 그러하듯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스님의 생명을 건 단식이 지니는 의미에 공감하면서도 다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이 부당한 관계들을 더불어 집요하게 문제시할 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스님의 단식을 바라보며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제하는 현실, 즉 이 사회가 권력과 부를 독점한 소수와 이로부터 배제되어 삶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절대 다수의 대중들로 분열되어 있는 바로 그 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고 모멸감조차 느끼는 이유는 신자유주의동맹과 그들의 이데올로그들이 이 부당한 관계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또한 회피할 수 없는 삶의 양식 그 자체인 양 선전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이 무차별적인 자연 및 생태의 파괴를, 공공재의 사유화를 위한 종획을 권력과 부를 독점한 소수의 이해에 맞추어 진행시키는 것을 마치 자연의 법칙인 양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는 이 부당한 힘들, 관계들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이들이 현재의 고통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박탈하고자 기획,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앙상하게 마른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존재의미, 현존하는 사회관계들에 대해 숙고한다. 이 부당한 관계들을 주어진 것으로서 인종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야만에 대응하여 더불어 사는 새로운 관계들을 구성하기 위한 희망을 모색해야 하는가. 그런데 진정 희망의 빛은 보이는가.

그렇지만 그 탈출구는 어차피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연대하며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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