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로 눈을 돌리는 금융회사가 늘어나고 있다. 중국, 베트남, 인도 같이 잠재력 있는 아시아 금융시장에서 우리도 론스타나 칼라일, 골드만삭스가 돼 보자는 것이다. IMF 금융위기를 극복하며 기술도 늘고 체력도 좋아졌으니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워 보자'는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한국 금융은 아직도 '내수산업', 아시아 시장이 기다린다**
은행들 전체의 올해 순이익은 10조 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계대출에 치중하거나 수수료를 인상해 그 많은 돈을 벌었다는 눈총을 받고 있다. 은행뿐 아니라 보험사, 증권사, 자산운용사 할 것 없이 금융은 여전히 '내수산업'이다. 이 때문에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은 최근 연설에서 "국내 금융회사들이 새로운 도전과 수익창출의 기회인 아시아 금융시장에 진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증권연구원 김형태 부원장은 금융의 '서북공정'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한다면 금융이라도 중국을 장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정치, 군사, 외교의 측면에서는 경쟁이 안 되니 금융이라도 중국보다 앞서가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며 "지금처럼 직접투자만 하지 말고 인수합병(M&A)을 하거나 지분투자를 해 중국기업이 성장하는 데 따른 과실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특히 중국은 선진 금융회사들에게는 기회의 땅이다. 지난해 10월 중국건설은행(기업가치 92억 달러)처럼 수십억 달러짜리 국유기업 상장이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고도성장의 외길을 달려온 중국의 중견기업들이 미국의 나스닥이나 홍콩 증시나 한국 증시 등 해외 증권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비효율적인 은행 시스템에 지친 기업들은 채권에 눈을 돌리면서 고수익(High Yield) 채권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중국 금융회사들이 안고 있는 엄청난 부실채권의 처리도 시급한 과제다.
베트남도 34개 기업만 증시에 상장돼 있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장외에서 대기상태다. 내년으로 예정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앞두고 베트남 정부는 국영기업의 민영화, 은행의 정상화 및 부실채권 처리를 위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올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기업공개(IPO) 규모는 지난해보다 50%나 증가한 424억 달러를 기록해, 증가율에서 전세계 평균인 23%를 크게 웃돌았다. 중국의 IPO 규모는 전년보다 88% 늘어난 188억 달러로, 일본을 제외한 아태지역 전체의 44%를 차지했다.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와 리서치 업체인 딜로직은 국제 투자은행들이 올해 일본과 호주를 포함한 아시아시장에서 M&A 자문, 기업공개(IPO) 주선, 채권 발행 등으로 벌어들인 수수료가 73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아시아 지역의 M&A도 활발하다. 올해 아시아 지역의 M&A 규모는 지난해보다 70% 증가한 4200억 달러로 최대를 기록했다. 스트라츠하임 어소시에이츠의 도날드 스트라츠하임 회장은 11월 뉴욕에서 열린 로이터 금융 서미트에서 "중국 기업들이 민영화되고 현대화되면서 향후 10년 간 중국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큰 M&A 붐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증권, KTB, LG벤처투자의 도전과 성과…"해외 블루오션을 찾자"**
국내 금융회사들은 최근 아시아 시장에 조심스럽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현대증권은 지난주 중국의 '심천시보덕과기유한공사'와 국내 유가증권시장 상장을 위한 주간사 계약을 처음으로 맺었다. 현대증권은 7월에는 2억 달러 규모의 중국 부실채권을 인수해 660만 달러의 자산담보부증권(ABS)을 발행하는 등 중국 금융시장에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주익수 현대증권 국제영업본부장은 "중국 기업들이 그동안은 한국증시의 저평가 때문에 상장을 망설였으나 최근 주가상승과 정보기술(IT) 산업 발달로 이런 인식이 바뀌고 있다"며 "중국의 우량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유가증권시장에 30~50개의 외국기업부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실채권 처리기술을 중국, 베트남, 인도 등에 지속적으로 전수해온 자산관리공사도 공사법이 개정됨에 따라 내년에는 중국 부실채권에 직접 투자할 예정이다.
올해 KTB네트워크와 LG벤처투자는 각각 자사가 투자한 중국기업을 홍콩과 싱가포르 증시에 상장해 상당한 수익을 냈다. 은행들은 대체로 발걸음은 느리지만, 하나은행은 11월 말 중국 칭다오 시와 부실여신 매각 등에 대한 투자업무 관련 협약을 국내 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맺었다. 베트남과는 브리지증권이 지난달 말 자산관리공사 격인 DATC와 부실채권 처리와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투증권과 현대증권도 베트남 금융시장 진출을 추진 중이다.
금융의 해외진출은 반가운 움직임이지만 서두르지 말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엄청난 자금과 정보, 경험을 가진 세계적 투자은행이나 펀드들과 정면으로 겨루기는 어렵다. 특히 진출하려는 나라가 제도적 인프라의 미흡으로 생각만큼 이익을 내지 못하고 고생만 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많다. 따라서 자신 있는 분야를 찾고, 약한 분야는 국내외 파트너와 공동보조를 맞추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브리지증권 이상준 사장은 "금융이 해외에서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맞지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유행처럼 나가는 것"이라며 "나가야 한다는 명분에 쫓겨 진출했다가는 자칫 모기업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증권연구원 김형태 부원장은 "IMF 위기 이후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험을 쌓아와서 CRC(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 CRV(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 등 기업구조조정 분야에서는 국내 금융계가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윤증현 금감위원장은 "상품의 다양성과 구조설계 측면에서 우리의 ABS도 아시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외진출의 주력부대가 될 사모투자펀드(PEF)나 투자은행(IB) 분야는 경쟁력을 더 키워야 한다. 박철준 베인앤컴퍼니 코리아 공동대표는 "전세계 펀드 가운데 상위 25%만 시장평균을 상회하는 수익성을 낸다"며 "경쟁이 심하고 수익의 변동성도 심하므로 해외 파트너와 함께 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까지 시중은행장을 지낸 한 금융당국자는 "국내은행은 외국에 나가서 돈을 벌 수 있는 실력의 경계선쯤에 온 것 같다"며 "IPO나 컨설팅 같은 투자은행 업무는 아시아 정상권이지만 미국, 유럽에 비하면 아직 뒤진다"고 말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