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에서 객원 의학자료심의요원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모 제약회사가 제출한 신약 허가 자료에 포함된 통계 분석 중 일부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당시 신약심의분과장이던 스톡브리지 박사에게 해당 제약회사가 제출한 통계 분석용 자료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더니 의아하다는 듯이 필자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한국 의사들은 통계 분석도 직접 실시할 줄 아느냐? 우리는 그런 것은 다 맡긴다." 그에게 한국에서 의사로 살아남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각종 수련 및 교육 과정의 다양함과 거기에 근원한 자긍심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필자는 졸저 <FDA vs. 식약청>(청년의사, 2005)에서 의사들의 임상적, 의학적 전문성이 의약품 허가와 안전관리에 더 많이 반영되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의사 직종이 생명의 신성함을 다룸으로써 은연 중 형성되는 환자 중심적 사고와 거기에 근원한 자긍심이 의약품 관리 행정에 중요함을 일깨워 준 FDA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에 올려진 <PD수첩>의 동영상을 보면서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황우석 교수와 직접 연관된 여러 의혹들이 단순한 의혹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여러 사실이나 정황 등이 보도됐다. 그런데 이는 모두 황우석 교수가 직접 해명할 일이니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의료계의 방조와 거짓, 이번 사태 키웠다**
정녕 더 심각한 문제는 필자를 포함한 의사, 더 나아가 의료계의 방조와 거짓이었다. 하도 많은 국민들이 이 상황에서 윤리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들 하시니 윤리 이야기는 당분간 접도록 하자. 하지만 방송에 보도된 '사실'만으로도 의사 또는 병원이 엄연히 실정법을 위반한 사례가 여럿 있음에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자가 무슨 목적으로 사용되는지 정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난자 제공자가 동의서에 서명하도록 한 것, 연구 계획서에 이름이 올라 있지도 않고 그 내용도 모르는 의사가 난자를 채취한 것, 난자를 채취하는 병원이 어디인지 명시하지 않은 연구 계획서를 심의하고 허가한 것, 해당 연구에 명백히 이해관계가 있는 모 교수가 심의에 관여한 것, 기관윤리위원회가 이러한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중간 실태 조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실정법인 임상시험관리기준을 위반한 범법 사항들이다.
FDA는 이 경우 위반 행위에 관련된 의사를 일정 기간 동안 (어떠한 경우에는 평생) 임상연구에 참여할 수 없게 한다. 만일 해당 의사가 제약회사나 생명공학업체의 요청으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임상시험이 있다면 이는 당장 중단되고 거기에서 얻어진 모든 결과는 무효화된다. 당연히 이러한 의사가 소속된 병원이 회사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배상(범죄 행위에 의한 손해이므로 보상이 아니라 '배상'이다)을 청구 받는다. 특정 병원을 거론하는 것이 죄송하지만 미국 같았으면 한양대병원과 미즈메디병원은 벌써 고액의 수임료를 줘야 하는 전문 소송 변호사를 고용하느라 한바탕 난리를 쳐야 할 때다.
그뿐만 아니라 위반 행위를 묵인 또는 감독하지 못한 병원도 제재를 받는다. 연구비 지원은 중단되고 병원은 길고 지루한 감사를 받아야 한다. 자체적인 임상연구 교육 프로그램과 하부 제도를 정비하고 소속 교수(의사)들이 모두 이 과정에 적극 참여해 병원 자체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 입증된 이후에야 다시 연구비 신청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에 보통 2년 정도 걸린다.
***'특허 지분' 따기 위해 난자 공급한 노성일 이사장**
필자가 또 경악했던 것은 미즈메디병원의 노성일 이사장이 관련 기술의 특허에 황우석 교수와 더불어 공동 출연자가 됨으로써 40%의 지분을 받기로 예정됐다는 사실이다. 이 분은 분명 하루 전 모든 일은 '국익'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 상황에서 국익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지만, 필자는 적어도 같은 의업에 계시는 노 이사장의 진심만큼은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국익이 아니라, 연구를 조기에 종료해 특허를 출원함으로써 거기에서 생기는 사익을 챙기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모든 연구에서 가장 금기시 되는 이 엄청난 이해상충의 모순 앞에 필자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의과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겨울 필자를 아끼시던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의사를 포함해 모든 전문직이 차별화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임을 기억하라. 먼저 전문직 별도의 행동윤리가 있고 이는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보다 더 엄정하다. 둘째 졸업 후 직업 훈련 과정은 평생 수행되는 것이니 배움의 끈을 놓지 말라.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전문직이 전문직일 수 있는 이유는 자정 기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황우석 교수가 직접 해명해야 하는 의혹과는 별도로 필자는 이 음울하고 불쾌한 사태의 이면에 의사와 의료계의 방조 또는 심지어 협조가 자리해 있다는 사실에 머리 숙여 사죄한다. 더불어 의사와 의료계에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동료여, 우리의 자긍심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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