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오늘(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는 '구국의 결단'을 했다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에 대한 민주화 유공자 심사가 계속 보류되고 있는 가운데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장(성균관대 교수ㆍ사학과)이 10ㆍ26 재평가의 필요성을 제기해 주목된다.
***유신체제 붕괴, 김재규 거사 없이 가능했을까**
서중석 소장은 '10ㆍ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 26일 오후 5시 세종대에서 주최하는 '10ㆍ26 26주년 기념식'에서 '10ㆍ26의 재평가와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의 발표를 할 예정이다. 서중석 소장은 발표문에서 "유신체제 붕괴가 김재규의 거사가 없이도 가능했을까"라는 논쟁적인 질문을 제기할 예정이다.
서 소장은 미리 준비한 발표문에서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김재규의 거사가 없었더라도 과연 유신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에 의해 붕괴될 수 있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학생들의 반유신 운동은 1977년 가을께부터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지만 1979년 서울의 경우에는 강력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10ㆍ26 직전의 '부마항쟁'은 대단히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그 자체가 유신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서 소장은 이어 "(당시 민주화 운동세력의 한계는) 10ㆍ26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지 못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며 "우리는 1980년 서울의 봄이 얼마나 살얼음판에서 조심스럽게 진행됐는지, 예를 들어서 1980년 4월과 5월 초순에 대학가가 얼마나 신중했는지, 또 광주학살에 왜 한동안 전국이 침묵을 지켰는지 냉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김재규가 의로운 거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유신체제는 상당기간 존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마항쟁, 경상도가 아니라 광주에서 일어났더라면…"**
서중석 소장은 이어 10ㆍ26의 역사적 의의를 조목조목 짚었다. 그는 우선 "10ㆍ26이 유신체제에 의한 대규모 학살 등 엄청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 소장은 "유신체제 말기는 사북사태, 광주항쟁과 같은 폭발적인 사태나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시차는 있을 수 있었지만 전개될 소지가 많았다"며 "부마항쟁과 관련해 박정희, 차지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유신체제에 대한 항쟁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신군부의 진압보다도 더 크고 잔혹한 학살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일부 연구자들의 가정은 여러 모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단적으로 "만약 부마항쟁이 경상도가 아니라 광주 등에서 일어났더라면 전혀 다른 사태가 전개됐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서 소장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유신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권력체제였다. 즉 유신체제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유신체제를 수호할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둘째 노령인데다 미국에서 생활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 달리 박정희 전 대통령은 건강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일본 군국주의의 세례를 받은 당사자였다. 결코 이 전 대통령처럼 피의 화요일(4ㆍ19)에 놀랄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 교수는 마지막으로 "박정희는 유신 말기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며 "박정희, 차지철 등에게는 언제든지 흉기를 휘두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비정상적인 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10ㆍ26으로 민주화의 큰 혈로 뚫린 것 인정하자"**
서중석 교수는 더 나아가 "유신체제 붕괴가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민주화 운동의 태동으로 이어진 점도 10ㆍ26의 역사적 의의"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신군부 정권을 유신체제의 잔당 또는 사생아로 얘기하지만 그것은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이완되고 취약한 권력체제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군부 체제의 권력은 빈 구멍이 많았고 2ㆍ12 총선이 말해주듯 여론에 떠밀릴 수 있었던 체제였다"며 "가장 중요하게는 10ㆍ26 이후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언제든지 신군부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서 교수는 "10ㆍ26으로 민주화의 큰 혈로가 뚫려 광주항쟁을 거쳐 6월항쟁으로 가게 되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이 과정에서 10ㆍ26이 남북관계를 변화시키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킨 것도 의미심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단적으로 유신체제에서는 항상 전쟁이 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상태에서 살아야 했던 반면 신군부 정권은 정권안보 차원에서라도 새로운 대북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며 "1983년 KBS의 남남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대규모 보도, 1985년 8월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유신체제에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10ㆍ26이 지역감정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철저한 지역주의에 기반을 뒀던 박정희 정권과 달리 신군부 정권은 광주항쟁과 국민의 비판적 시선을 의식해 호남 등 다른 지역에 신경을 쓰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며 "고위 공무원 임명에 지역적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광양제철소를 준공한 것 등이 그 예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사에서 '온건파' 역할 중요…김재규는 롬멜과 같은 용기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서중석 교수는 역사에 있어서 '온건파'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제안했다.
서 교수는 "역사에서는 진보 세력 또는 민주주의 세력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며 "때로는 극우적인 수구정권 내의 온건파가 중대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극단적인 권력 내부에서 극단적인 권력의 횡포를 저지시키려던 활동으로 우리는 롬멜 등이 관여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자주 인용한다"며 "그들은 독일에서 흉기를 제거하려 했던 용기 있는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대만에서도 장개석은 크게 비판받는 반면 그의 아들 장경국은 계엄령을 해제해 민주화의 길을 열고 양안교류를 부분적으로 허용한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도 4ㆍ19 당시 김정렬이 국방부장관 직을 맡았던 점이나 6월항쟁 때 이한기가 국무총리를 맡고 있었던 점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끝으로 "일정 기간 더 연장될 수 있었고 엄청난 희생이 뒤따를 수 있었던 유신체제를 종식시킨 김재규는 이들보다도 훨씬 용기 있는 거사를 했다는 점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자기사 시작>
***김재규 '민주화 유공자' 판단은 서랍 속**
10ㆍ26을 일으킨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민주화 유공자' 판단 여부가 쉽게 결론 나지 못한 채 한동안 '보류' 상태를 유지할 전망이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는 작년 8월 김재규 씨에 대한 심의를 열어 '인정' 혹은 '기각'이 아닌 '보류 및 계속 조사'라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렸다. 사회적으로 찬반논란이 거센 만큼 최종 판단의 시기를 늦춘 것이다.
10ㆍ26 자체에 대해서는 이를 계기로 유신체제가 종식될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주장과, 김재규의 행위가 권력투쟁 과정에서 나온 '오발'이라는 주장이 사건 발생 20년이 훨씬 넘도록 여전히 평행선을 긋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김 씨를 1심부터 3심까지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는 <10ㆍ26은 아직도 살아 있다>(랜덤하우스중앙, 2005)를 펴내 "당시 군 검찰의 주장과 달리 김재규는 '우발범'이 아니라 '박정희가 있는 한 민주화는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10ㆍ26을 준비했다"고 주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씨를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10ㆍ26 이후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고,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 발족 이듬해인 2001년에 김 씨의 5촌 조카 김진백 씨가 김 씨를 '민주화 유공자'로 판정해줄 것을 신청하면서 심의가 본격화됐다.
<상자기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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