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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이데올로기'는 '광기'를 부른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22> 파울 첼란 두 번째 이야기

***티에의 묘지**

1947년 12월, 첼란은 비인을 향했으며 반 년 후 파리에 정착했다.

그때 첼란에게는 물론 프랑스인으로서의 시민권은 없었다. 그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것은 1955년이었다. 1952년 그는 프랑스 귀족 가계에 속하는 판화가 지젤 드레스트랑쥬와 결혼하는데, 그것도 지젤의 집안의 반대로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프랑스 국적도, 정해진 직업도 없고, 어디 사는 뭔지도 모르는 동구에서 온 방랑자, 그것도 유대인과의 결혼에 가족이 반대하는 것은 세간의 상식적 판단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지젤과의 결혼을 실현하고 1959년에는 에콜 노르말에 취직했으나 생활은 안정되지 않았으며 그 무렵부터 정신 질환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62년의 첫 발작으로부터 1970년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첼란은 적어도 다섯 차례의 입원을 경험하고 두 차례의 자살 미수를 실행하고 있다.

첼란에게 모어란 언어의 정확한 의미에 있어 '모친으로부터 주어진 말'이었다. 시인이 생활했던 망명지 파리에는 그의 모어를 이해하는 독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그와 같은 모어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독일이라는 나라는 신경을 소모시키는 장소일 뿐이었다.

첼란은 1952년에 전후 처음으로 (당시의) 서독에 입국해, 1954년부터는 매년 독일 국내를 방문한다. 1957년에 브레멘에서의 낭송회에서는 청중으로부터의 질문에 '반유대주의'적인 느낌을 받고 혼란을 일으킨 그가 회장을 뛰쳐나오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1958년 첼란은 브레멘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시를 '투담통신(投壜通信)'에 비유하고 있다. 편지를 넣은 병을 바다 속에 던지듯이 낯선 땅의 미래의 독자에게 전달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담은 통신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것을 바꿔 말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독일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가 받아들여질 것은 거의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된다. 이처럼 그는 '수신자'가 없는 시인이었다.

독일어는 그에게 있어 하나의 단일국가의 국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모어의 공동체'는 국어를 공유하는 국민공동체가 아니라, 다언어, 다문화의 영역에서의 문자 그대로 언어를 공유하는 자들의 정신적인 연결 끈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의 '모어의 공동체'는 파괴돼 소멸했다. 바로 어머니가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듯이.

그의 '광기'는, 어떤 언어를 특정한 국민이나 국가와 단순하게 묶으려는 사상, 즉 '국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거부였다고 하겠다. 태어나 자란 다언어·다문화의 영역이 여러 국가에 폭력에 의해 파괴되어, 정신적 연결 끈으로서의 '모어의 공동체'가 소멸한 후에도 시인은 모어 그 자체를 자신의 '모국'으로 삼아, 또한 시를 쓰는 행위 그 자체를 '모국'으로 삼아, 끝없는 방랑을 계속했다. 근대 국민국가 시대의 머나먼 피안에 내던져진 것 같은 첼란의 언어 행위, 그 시야말로, 바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귀향'이라는 작품을 보자.

점점 촘촘히 내리는 강설
어제마냥 비둘기 빛으로
네가 아직까지 잠자듯 내리는 강설.

드넓게 깔린 흰 빛
그 너머 한없이
잃어진 자의 썰매자국

그 아래로 감추어져
두 눈을 그리도 아프게 하는 것이
비져나온다
보이지 않는
무덤, 또 무덤

무덤마다
오늘이라는 고향으로 되돌아와
무언으로 미끄러진 자아
나무 비목 하나.

그 곳에 얼음바람에 실려 온
느낌 하나,
그 비둘기 빛, 눈빛
깃발을 꼭 달고.

* * *

더위에 모든 것이 타버릴 것만 같던 1998년 여름의 어느 오후, 나는 티에의 공동묘지에 갔다. 지하철 7호선의 종점 뷔르쥬이프에서 버스로 10분쯤 걸리는 곳이었다. 광대한 부지가 정연하게 구획 정리돼 있었다. 첼란의 무덤은 31구획 12열 39번이었다. 이렇다 할 특징은 없었으나 누가 뿌렸는지 묘석 위에 선명한 블루의 라피즈석이 흩어져 있었다.

평평한 묘석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일 위가 프랑소와 첼란, 1953년에 태어나 곧 죽은 아들이다. 가운데가 파울 첼란. 아래가 아내인 지젤 첼란.

첼란(Celan)이라는 성(姓)은 아메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성인 안첼(Antschel)의 철자를 본인이 수정해 만든 것이다. 묘비에 새겨져 있는 것은 그 만든 성이었다. 그것을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덤에는 고인의 계보를 기록해 남기는 기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첼란의 그것은 성조차 만들어진 것이다. 계보로부터 차단된 존재에 어울리게 어제도 내일도 없이 소속한 공동체도 없는 뚝 떨어져 고립된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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