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리에 방송되던 한 방송사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최근 1년 만에 종영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읽었다'는 김훈의 베스트셀러 소설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2003)를 토대로 신격화된 '영웅 이순신'을 '인간 이순신'으로 재조명하려는 이 야심찬 시도는 부분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인간 이순신'은 간 데 없고 또 다른 '영웅 이순신'만 남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을 자리매김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영웅 이순신'의 활약을 갈망하는 것이다.
2004년 '대중독재'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최근 출간한 <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권형진·이종훈 엮음, 휴머니스트)는 '영웅 이순신'이 등장한 맥락을 좀더 세심하게 고찰한다. 박정희의 이순신 영웅 만들기는 이순신의 이미지를 박정희 이미지에 덮어씌우려고만 했던 게 아니라 대중을 '근대화 수행의 주체'로 만들어내기 위한 일련의 장치 중 하나였다는 것.
***박정희의 이순신 영웅 만들기 : 박정희식 근대화의 주체로 거듭나기**
이순신은 구한말, 일제시대 심지어 해방 직후 이승만에 의해 계속 민족의 영웅이자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만들어져 왔다. 이런 이순신 영웅 만들기는 박정희 정권기에 본격화된다. 1968년 4월 27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전신 17.4m(좌대 포함)의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은 영웅 만들기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 동안 14번에 걸쳐 '이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참석했으며 1965년 한·일 협정이 '굴욕 외교'로 거센 반대에 직면한 직후인 1966년부터 1977년까지 4차에 걸쳐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시도한다. 심지어 박정희 정권은 이순신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국경일로 법제화하고자 했으나 자문기관 등의 조심스러운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과연 이런 이순신 영웅 만들기는 무엇을 의도했던 것일까? 이순신 영웅 만들기를 분석한 이상록 한양대 강사(한국근현대사)에 따르면 단순한 독재정권 포장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순신 영웅 만들기는 국가가 대중들을 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갈 근대적 주체로 만들어내기 위한 일련의 장치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체제의 이순신 영웅 만들기는 대중들이 그저 멀찍이서 이순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중이 이순신의 정신을 직접 본받아 그 영웅성을 체제의 요구에 맞게 대중 스스로 체현해나가도록 만드는 데 더 치중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충무공과 우리를 연결시켜야 합니다'라고 충무공과 대중의 접속을 강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정희 정권은 실제로 "조국이 처한 현실이 임진왜란 때와 흡사한 점이 많다"며 끊임없이 위기의식과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체제를 유지해나갔고 대중들을 동원했다. "전방은 국군이, 서울은 서울 시민들이, 후방은 각자가 내 고장, 내 가정을 사수해야" 하는 총력전 체제에서 대중들은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자세로 명량해전에 임한 이순신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대중은 '이순신 정신'을 따라서 군인으로, 새마을 운동의 일꾼으로, 산업역군으로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절대적·자발적 복종의 주체로 거듭나야 했던 것이다.
***김일성의 길확실 영웅 만들기 : 위기의 체제를 지키는 '대중 영웅'**
박정희가 '역사 영웅' 이순신을 현재로 불러왔다면 북한의 김일성은 '대중 영웅'을 새롭게 만들었다. 신생 사회주의 사회에 걸 맞는 '노동 영웅' 길확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평안북도 영변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난 길확실은 평양제사공장의 작업반장으로서 빼어난 모범으로 입에 오르내리면서 195~60년대 산업화의 '노동 영웅'으로 탄생한다. 그는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호명을 받아 새로운 주체로 거듭났고 그 후에는 지배 논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1961년 출간된 그의 <천리마 작업반장의 수기>는 북한의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혔으며 체제를 위한 일종의 성서가 됐다. (길확실은 그 후 평양제사공장 지배인을 거쳐 당비서로 승진했다.)
김일성이 길확실을 비롯한 끊임없는 '대중 영웅'들을 요구했던 것은 바로 사회주의 사회의 특성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자기 재생산 혹은 갱신 능력이 취약하고 불안정했던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는 노동 신화나 사회주의 대의를 강조하는 식의 이데올로기와 '관리 체제의 갱신'을 통해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기제들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문석 성균관대 강사(정치학)는 이런 한계를 극복·보완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대중 영웅'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회가 정책의 실패와 경제 위기, 대중들의 불만과 저항과 같은 심층적인 위기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보조기제가 필요했다. 결국 이 체제는 사회를 규율하는 독특한 기제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군중 노선을 통한 대중운동'이라는 기제다. 대중운동은 스펙터클의 형식으로 진행되며 영웅은 그 한가운데서 솟아나온다. 따라서 영웅은 혁명 이후에 수립된 제도들이 정치·경제를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효율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체제의 결정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장의 길'이 불가피해 보이는 북한에서 이제 '영웅 시대'는 지나간 것일까? 북한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적 노동영웅'을 지향하는 대신 개인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려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이제 그들 앞에는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낼 또 다른 영웅이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시장 영웅' 탄생의 예고 : 이순신의 '화려한' 부활**
이상록 강사는 최근 '인간 이순신'의 재조명 바람이 민족주의적 열기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칼의 노래>는 일견 이순신의 영웅 신화를 탈영토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민족 영웅으로서의 이순신을 재영토화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 <칼의 노래>에서는 국왕보다도 더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이순신, 자신의 일에 철두철미한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가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그의 내면세계를 상상하여 인간적인 고뇌로 승화시킴으로써 대중과 이순신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놓았다. 그로 인해 민족 영웅으로서 이순신의 생명력은 더욱 길어졌고 공고해졌다."
그렇다면 새삼 지금 '민족 영웅' 이순신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무한경쟁 시대의 대중이 새로운 '자본주의적 리더십'을 바로 이순신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장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주요 시청자층이 30~40대 남성이라고 하지 않는가. 민족주의와 시장주의가 절묘하게 결합하는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웅'은 조만간 본격적인 '시장의 길'로 들어설 북한의 대중까지 포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연장해서 보자면, 이 책이 안고 있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난다. 역사 속 영웅 만들기의 신화를 해부하는 이 책이 정작 자본주의 '스펙터클 사회'의 영웅들에 대한 분석을 누락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 시대'가 여전히 위력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면 바로 이 대목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철지난 구사회주의 국가의 영웅들을 분석하는 일보다 훨씬 더 시급한 작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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