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지난 97년 대선 당시 불법정치자금 제공을 논의한 소위 'X파일' 전모의 공개 여부가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X파일'의 내용이 속속들이 공개될 경우 '바람직하지 않은 과거사'로 '현재의 한국 사회'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X파일'의 공개는 삼성그룹에 치명타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삼성이 위기에 처하면 결국 한국경제가 흔들린다는 '신화'도 삼성그룹 안팎에서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이런 시각은, 삼성그룹 스스로 제기하는 것이든 아니든, 일반인들이 'X파일'의 내용 공개 문제를 접할 때 암암리에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대목이다. 바로 이 대목은 'X파일' 내용 공개 문제에서 '법적인 논란' 이상으로 중요한 대목일 수도 있다.
재벌개혁론자로 '삼성공화국' 현상을 질타해 온 한국방송통신대 김기원 교수가 이같은 '근거없는 위기론'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삼성의 거듭나기를 촉구하는 고언을 5일 <프레시안>에 긴급 기고해 왔다. <편집자>
***"삼성은 구멍가게가 아니다"**
삼성게이트로 나라가 어지럽다. 총수의 지시 하에 저질러진 온갖 불법적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그런 범죄와 관련된 당사자들의 도덕불감증과 뻔뻔스런 행태는 우리를 어이없게 만들고 있다.
중앙일보를 보자. 반성문 달랑 한 장 발표하고는 이슈 바꿔치기에 혈안이다. 한국 사회를 총체적으로 오염시킨 삼성권력 문제에는 눈감고, 불법도청 문제만 집중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언론사는 깨끗하냐면서 은근한 협박도 곁들인다.
물론 불법도청 문제도 심각한 범죄다. 이건 이것대로 엄중히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죄 없는 자 돌로 치라"는 것은 예수가 하실 말씀이고, 죄인 자신은 "내 탓이요" 하면서 가슴을 계속 쳐야 마땅하지 않을까. 가해자가 나도 피해자라고 자꾸 큰소리 쳐선 꼴이 우습다.
사주가 현금박스 나르는 조폭 똘마니 신세로 전락한 데 대해 중앙일보 기자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외부의 음모로 돌리고 있을까. 재수 더럽다고 치부할까.
삼성의 경우는 또 어떤가. 여기선 반성문이 더 불량하다. 반성하는 체 하면서 두고 보자는 식이다. 이런 반성문이라면 학교에선 새로 쓰게 한다. 그런데 삼성을 가르칠 학교는 없다. 대통령이 말했듯이 권력이 이미 시장, 아니 삼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요즘 삼성 간부들은 삼성을 흔들면 재미없다고 기자들에게 윽박지르는 모양이다. 광고를 끊겠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거야 옛날부터 해 오던 수법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아가 삼성이 흔들리면 나라경제가 흔들린다는 엄살인지 공갈인지까지 등장한다.
중앙일보 사장이 조폭 똘마니 같이 행동하는데, 혹시 삼성도 자해 공갈단처럼 일부러 기업을 망치면 어떡할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투자를 위축시킬지도 모르겠다. 노동자만 파업하는 게 아니라 자본의 파업도 있는 법이다. 사자 수염을 함부로 건드린 게 아닐까.
'삼성게이트'가 밝혀지면서 나라경제를 걱정하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수출과 주가총액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이 잘못되면 물론 큰일이다. 영향력 면에서 삼성에 못 미치는 대우가 망했을 때도 나라경제가 피멍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삼성게이트를 그만 덮어야 하나. 지난 1995년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뇌물공여죄로 재벌총수들이 줄줄이 조사받았을 때도 바로 이런 논리에 따라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고 말았다.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말에 법과 정의가 스르르 무너진 셈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바로 IMF사태였다. 시장과 법질서를 바로잡지 않으니, 재벌들이 장부를 속이면서 돈을 빼돌리고 함부로 사업을 벌여 줄초상을 맞았다. 그리하여 나라가 부도사태까지 이르렀다.
삼성사태를 두루뭉실 넘어가려는 것은 이런 과거의 참담한 교훈을 무시하는 처사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더라도 10년도 안 된 과오를 반복해서야 되겠는가. 나라경제를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이번 삼성게이트는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과거와 달리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는다면, 삼성은 각계각층에 로비하느라 돈과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 마음이 다시는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그런 자원을 기업의 기술력 향상과 시장 개척에 더 쏟을 수 있으니 기업도 좋아지고 나라경제도 좋아질 수 있다. 이게 삼성개혁이고 나라개혁이다.
지금 삼성의 수많은 일반직원들은 따가운 비판여론이 불편할 것이다. 우리가 무슨 범죄 집단인가, 나라를 이끌고 가는 경제역군이 아닌가 하고 볼멘 항변을 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총수와 가신 탓에 애꿎게 덤터기를 쓰고 있다. 이들은 현재도 묵묵히 일하고 있으며, 삼성이 개혁되면 더 기분 좋게 일하게 된다.
일부 가신들은 이번 사태를 처리하느라 한 동안 정신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엄정한 처리가 이루어지면 앞으로는 이들도 오히려 사업에 전념할 수 있다. 조폭집단 같은 일에서 해방되니 마음은 또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총수의 경우는 어떨까. 1995년 뇌물사태 이후 이건희 회장은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 왔다. 그런데 이번엔 만약 검찰이 제 구실을 한다면 소환당하고 처벌받을지 모른다. 그러면 삼성이 흔들리고 나라경제가 흔들리는가.
혹시 삼성이 조금 흔들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삼성은 구멍가게가 아니다. 총수 신변에 변화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기업이 위험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삼성은 "조직이 움직인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다른 재벌에 비해 경영위계제(managerial hierarchy)가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다. 경영권한이 꽤 분산되어 있다는 뜻이다.
삼성에선 이건희 회장의 신화를 많이 퍼뜨렸다. 이 회장 덕분에 삼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 회장이 독자적으로 벌인 사업들은 실패가 많았다. 자동차나 영상사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전자나 생명보험 등 주요사업에선, 돈을 빼가긴 했지만 총수가 무턱대고 개입하진 않았다.
특히 IMF사태 이후엔 이 회장의 개입 폭이 더 줄어진 듯싶다. 삼성이 한보나 대우와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따라서 삼성게이트와 관련된 총수의 신상변동이 삼성그룹에 미칠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 오히려 총수에 대한 엄정한 처리를 통해 경영위계제가 더 선진화될 수 있다. 이는 삼성의 한 단계 도약이다.
***"삼성의 횡포는 총수와 가신들이 저지른다"**
우리는 흔히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을 혼동한다. 재벌이라는 말 자체가 양자를 다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곧 삼성이라는 관념은 "짐이 곧 국가다"라는 왕조적 발상이다. 재벌개혁은 재벌총수와 재벌기업의 분별로부터 출발한다.
삼성은 수많은 임직원과 주주 및 채권자로 이루어진 조직체다. 소유지분도 얼마 안 되는 총수는 그 조직체의 지휘자일 뿐이다. 지휘자에 문제가 있으면, 조직체의 이익을 위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게 선진 대기업이다. 삼성도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점차 '삼성 독재'로 나아가고 있다. 테이프 녹취록이나 참여연대 인맥보고서에서 보듯이 삼성은 우리 사회지도층 곳곳에 지배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옛날엔 정부정책에 재벌이 편승해 특혜와 뇌물을 주고받는 '정부 우위의 정경유착'이 행해졌다면, 근년엔 재벌이 정부의 정책과 인사에 개입하는 '재벌 우위의 정경유착'이 구축되고 있다. 최근엔 재벌 중에서도 삼성이 독주하는 형국이므로, 권력이 삼성에 넘어갔다는 말이 유행하는 것이다.
수구권력의 한 축인 조선일보에 대해선 일전불사를 외친 대통령조차 또 다른 수구권력으로 자리 잡은 삼성의 횡포에 대해선 별로 힘을 못 쓴다. 이 대목에선 도대체 '노무현다움'을 찾기 힘들다.
삼성이 조선일보보다 더 세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삼성이 국가경제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삼성의 공헌은 수많은 일반직원 덕분이고, 삼성의 횡포는 주로 총수와 가신이 저지르고 있다.
예컨대, 회사재산을 빼돌리는 등 불법을 저지르면서 30대의 삼성 3세 총수가 세금을 고작 16억 원만 내고 수조 원의 재산을 불린 현실을 보라. 또 총수의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기 위한 납치, 유령노조와 같은 수법들이 과연 초일류기업이 할 처사인가.
금융관련법을 위반하고 공정거래법에 대해 위헌소송을 낸 것도 총수의 황제적 경영권을 다지기 위해서다. 각계각층에 대한 지배망을 넓히는 일은 총수와 가신의 이런 무리수를 관철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삼성의 일반직원은 억울하게 도매금으로 넘어 간다.
삼성의 문제를 바로잡자는 것이 결코 '삼성 죽이기'는 아니다. 삼성은 계속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삼성의 발전을 위해서도 삼성의 횡포는 사라져야 한다. 삼성이 잘 나가서 총수와 가신이 오만을 부렸던 1990년대 중반을 돌이켜보자. 총수와 가신 멋대로 사업을 벌이면서 위기를 초래해 나중에 그룹직원을 3분의 1이나 잘라내지 않았던가.
군사독재에 비해 삼성독재는 덜 폭력적이다. 하지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기는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삼성의 지위는 소인국의 걸리버와 같다. 다른 소인국과의 싸움에선 큰 도움이 되지만 걸리버가 술에 취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나라가 결딴난다.
삼성이 술 취하지 않게 하는 게 재벌개혁을 통한 시장경제의 정상화다. 이를 위해 삼성은 재벌개혁에 딴죽을 걸게 아니라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총수가 과거의 불법을 참회하고 빼돌린 재산이나 탈세한 부분을 반납해야 한다. 그리고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차단' 원칙에 따라 삼성생명을 계열분리하고, 황제경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한편 삼성이 나쁜 마음 먹지 않게 하는 게 부패청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견제력 회복이다. 달콤한 유혹으로 '삼성의 덫'에 걸려든 정계, 관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가 대오각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역할을 되찾아 삼성에 대한 민주적 견제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균형을 이룬다.
삼성게이트로 삼성이 다소 흔들릴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라경제가 흔들린다고 터무니없는 협박을 해선 안 된다. 그리고 비뚤어진 삼성이 바로 잡히려면 약간 흔들리는 건 오히려 필요하다.
고질병 고치는 데 조금도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성게이트를 엄정 처리하고, 다시금 재벌개혁과 민주화에 박차를 가해 보자. 그 길이 삼성도 잘 되고 나라도 잘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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