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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아이-가정-사회 파괴하는 '흡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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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아이-가정-사회 파괴하는 '흡혈귀'"

[화제의신간] "학교는 어떻게 아이들을 망치고 있는가"

최근 서울대학교 2008학년도 입시안을 둘러싼 논란은 다시 한번 실타래처럼 얽힌 교육문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가? 30여 년간 미국의 교단을 지킨 존 테일러 개토는 도발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바로 '학교 교육'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1994년 국내에 처음 소개됐던 개토의 <바보 만들기>(Dumbing Us Down, 김기협 옮김, 민들레)가 10여 년 만에 다시 출간됐다.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1992년 미국에서 나오자마자 학교 교육에 대한 종언을 선포하는 대표적인 책으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책을 쓴 개토는 30여 년 가까이 뉴욕 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온 현직 교사다. 학교 교육의 심장부에서 그 조종을 울리는 도발적인 주장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 이 책의 주요 내용은 그가 뉴욕 주 '올해의 교사' 상을 받은 자리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쓴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개토가 학교 교육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 것은 바로 학생들과 수십 년간 교류를 하면서 얻은 통찰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그는 대학에서 지능과 재능은 종 모양 곡선에 따라 분포한다고 배웠으나 정작 통찰력, 지혜, 정의감, 너그러움, 용기, 창의성과 같은 인간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특징들은 열등하다고 생각돼온 엉뚱한 학생들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결국 인간은 누구나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로서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바로 학교 교육이 그 천재성이 발현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자마자 그 동안 통상적으로 받아들여 온 가설들('글 읽기를 배우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또는 '아이들은 근본적으로 공부하기를 싫어한다')은 그 근본부터 의심돼야 했다.

***교사들이 범하는 일곱 가지 죄…점점 더 망가지는 아이들**

개토에 따르면 학교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을 상대로 일곱 가지 죄를 범하고 있다. 우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온갖 것들을 가르치지만 정작 그것들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오히려 학생들에게 '혼란'을 줄 뿐이다.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치고 세상을 파편화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사가 범하는 첫 번째 죄이다.

학생들은 또 끊임없이 교실 안에 구속돼 있다. 아이들이 갇혀 있는 상태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 혹 좋아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별 말썽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교사들이 하는 일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교사들은 "더 우월한 반을 선망하고 두려워하도록, 더 열등한 반을 경멸하도록 또 아이들이 서로를 견제해가며 행진의 보조를 잘 맞출 수 있도록" 가르친다.

학교 교육에서 정작 호기심을 갖는 것이 억압돼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수업 시간 종소리에 맞춰서 교사가 가르치는 것 외에는 호기심을 갖는 것을 금지 당한다. 학교생활이 반복될수록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것 말고는 완전한 경험이라는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 개개인의 개성이 파괴되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교사에 의해 주어지고 박탈된다. 자신의 개성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권리를 주장하는 아이들은 곧바로 교사들에 의해 징벌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각각의 개인으로 거듭나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도 없다.

학교 교육을 잘 받은 학생일수록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돼 있는 것도 교사가 범한 죄의 결과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중요한 선택을 강요하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든 중요한 선택은 전문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식의 통념을 체화한다.

이런 전문가 의존성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수많은 (대부분은 아주 무성의한) 평가들에 의해 더욱더 심화된다. 대부분 학생들은 더욱더 자신감을 상실하고 결국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주어야만 자각할 수 있는 상태에 빠져든다.

마지막으로 교사는 끊임없이 학생을 감시함으로써 상시적으로 감시당하는 상태에 아이들이 익숙하도록 만든다. 학교에서 이런 개인의 영역의 박탈은 결국 공동체의 파괴로 연결된다. 개인의 영역을 박탈한 이들은 상호 연대할 잠재력마저 잃기 때문이다. 대신 권력에 의한 집단주의에는 쉽게 동화된다. 독일 작가 에리카 만이 "1000만 명의 나치 아이들이 학교에서 태어났다"고 회고했던 것이 오늘날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정하더라도 학교 교육이 읽기, 쓰기, 셈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한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개토는 한 마디로 일축한다. 국가가 독점하는 지금과 같은 학교 교육이 확립되기 전, 예를 들어 독립전쟁 당시 토머스 페인의 <상식>(박홍규 옮김, 필맥)이 60만 부나 팔린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시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했고 그 중 70%는 계약제 하인 또는 노예였다.

***지금의 학교 교육, 민주주의와 부합하나?**

미국의 학교 교육 현실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개토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19세기 초반 프로이센에서 그 초기 모습이 형성된 학교 교육이 미국,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됐기 때문이다.

1806년 프로이센의 정예군이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패배하면서 그 필요성이 제기된 프로이센의 학교 교육은 그 태동부터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 전쟁을 준비하는 기관이던 학교 교육의 역사성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학교 교육이 어울리는 것일까?

개토의 대답은 단순명료하다. "학교 교육은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게 만들어져 있다. 대량 교육은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엉터리 경쟁과 억압 그리고 강박을 통해 빈부를 막론한 모든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비물질적 가치에 대한 가르침을 얻지 못하도록 한다. 학교 교육은 인간의 다양성을 제거하고 다양성의 원천인 가정을 억압함으로써 국가적 통일성을 조작해 내는 수단이다."

***"학교를 해체하자, 교육을 삶 속으로 되돌려 놓자"**

개토는 "교육을 삶 속으로 되돌려 놓자"고 주장한다.

"우리들이 아껴 온 개별성, 다양성 그리고 개인을 보호하는 이념들을 지키는 요체는 우리 아이들을 키워내는 방법에 달려 있다. 아이들은 살아가는 내용을 그대로 배운다. 아이들을 교실 안에 묶어둘 경우,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우리 안에서 사회성을 익힐 기회를 잃은 채 살아가게 된다. 아이들이 못하는 것이 있다고 웃음거리를 만들 경우, 그들은 인간관계에서 움츠러들 것이다. 아이들의 실수를 수치스럽게 만들 경우, 그들은 복수를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대규모 조직에서 아이들에게 습득시키는 습관은 끔찍스러운 것들이다. 제도적 학교를 해체하자. 교사 자격 제도를 없애자."

개토는 제도적 학교를 해체하는 대신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재주껏 가르치게 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개토는 17세기 뉴잉글랜드 세일럼의 청교도 교회를 그 본보기로 든다. 목사가 따로 없었던 이 교회에서는 평신도 간의 토론을 통해 교육문제든, 경제문제든, 교리문제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나가고 그 과정에서 공동의 배움의 길을 닦았다.

이런 개토의 제안은 시대착오적인 뜬금없는 제안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교육을 담당해 왔던 마을 공동체의 교육 기능을 학교와 결합한 '작은 학교 운동' 또는 '마을 학교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고 있다. 당장 홈스쿨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어떤가? 개토의 표현대로 가정과 사회를 취약하게 만들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활발한 접촉을 막고, 건전한 가정을 이루는 데 필요한 시간을 빨아먹는 '흡혈귀' 학교 교육이 강한 햇빛에 재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개토의 고민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를 보려면 <프레시안>의 '산골 아이들' 연재나 홈스쿨링을 직접 하고 있는 부모들의 고민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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