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6자 회담 복귀를 선언한 직후인 지난 7일 서해 직항을 통해 평양을 방문했다. 남북 합작으로 2년간에 걸쳐 준비된 평양 정성수액공장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개성이나 금강산이 아닌 평양에 가는 것인데다, 2004년 7월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에 접어든 이후 첫 최대 규모(1백48명)의 방북단의 일원으로 가는 것이어서 평양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장한 마음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15분 후에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들렸다. 인천 국제공항을 떠난 지 채 4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서울과 평양 간의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멀다는 것이 실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와, 평양이 밝아졌다", 지난 1~2년 새 상황 많이 호전돼**
걱정했던 것보다 아주 간소한 입국 수속을 밟은 뒤 약 30분 동안 버스를 타고 평양 시내에 진입했다. "와, 평양이 밝아졌다." 수차례 평양을 방문한 한 남측 관계자가 탄성을 질렀다. 생각했던 것보다 건물들이 더 낡아 내심 북한의 열악한 경제 상황을 가늠하고 있었던 기자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실제로 평양은 2000년대초와는 눈에 띄게 상황이 호전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2003년에 평양을 방문했던 한 남측 인사는 "평양 거리가 더 활기가 있어졌고, 건물들도 페인트칠을 다 새로 했는지 그 때와 비교하면 거리 자체가 훨씬 밝아졌다"고 전했다. 실제로 거리 곳곳은 건축 개보수 공사와 페인트칠이 한창이었다.
평양 시내 아파트를 비롯한 건물의 창마다 하얀색 새시를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북한 주민에게 하얀색 새시에 대해서 물어보니 "1년 전부터 정부 차원에서 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일부는 알루미늄으로 덧창문(새시)을 달았고, 지금은 나무를 하얀색으로 칠한 뒤 설치하고 있다"며 "외관상 보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먼지가 덜 들어오고 겨울에 따뜻해 아주 좋다"고 설명했다.
달라진 평양의 모습은 밤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밤에 숙소인 양각도 호텔의 꼭대기를 올라가서 본 평양 거리 곳곳에서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서울처럼 가로등과 다리의 불빛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야광은 볼 수 없었지만, 열악한 북한의 전기 공급 상황을 염두에 두면 아파트에서 보이는 불빛도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농촌은 여전히 '고난의 행군', "농업 생산성 떨어지는 게 제일 큰 문제"**
밝아진 평양과는 달리 북한의 농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해 보였다. 북한 인구의 약 3분의 1은 농촌 거주자이다.
순안공항에 내리기 전 비행기에서 보이는 북한의 산들은 황토색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무가 주민들의 중요한 땔감으로 쓰이는 현실을 감안하면 북한에서 초록빛 짙어지는 초여름 산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잔인한 일일 것이다.
평양까지 가는 길에서 본 논들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스쳐지나가듯이 보이는 농민들의 행색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농업과 관련해 수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농촌에도 수시로 들어가는 한 남측 관계자는 "지금 북한의 농촌 현실은 1960년대 남한의 농촌을 생각하면 된다"며 한 마디로 북한 농촌 현실을 설명했다. 그는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도 않고 도로 역시 비포장 도로"라며 "특히 비료와 농기계 보급이 제대로 안 돼 농업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게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화학비료도 없는 이런 북한 농업 사정은 친환경 농업이 화두가 되고 있는 남한과 비교가 된다. 북한을 방문한 환경운동가의 고민도 깊어진다. 이번에 같이 방북한 한 환경운동가는 "북한의 심각한 농업 현실을 염두에 두면 화학비료를 북한에 공급하는 것을 마냥 비판적으로 볼 수도 없다"며 "당장의 식량 위기를 극복하면서도 중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북한 농업을 만들기 위한 남북의 고민이 좀더 필요할 것 같다"고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또 다른 인상적인 풍경은 곳곳에 텃밭이 조성돼 있는 것이다. 북한은 각 세대마다 1백㎡(30평)의 텃밭을 조성해 각자 처분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일종의 도농 복합 도시인 평양에서도 외곽으로 갈수록 텃밭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볼 수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협동 농장보다 텃밭에서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많은 이들은 이것을 이기심과 같은 '인간 본성'으로 설명하는데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북한 주민들이 텃밭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은 식량이 부족한 현실에서 그곳에서 생산한 채소들이 당장 1차적인 가족의 먹을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1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IT 엘리트 교육,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챙겨**
북한의 극심한 도농 격차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했을 때 또 한번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종의 '방과 후 학교'인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는 하루 5천명의 평양 인근 학생들이 특기 교육을 받고 취미 활동을 하는 곳이다. 1989년에 건설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경우에는 시설만을 놓고 보면 남쪽의 웬만한 학교나 어린이 회관보다 훨씬 더 좋다. '평양특별시'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인 셈이다.
북측 학생들은 이곳에서 정규 수업을 끝낸 후 두세 시간 정도 과학, 예능, 체육, 컴퓨터 등 네 개 분야로 나뉘어 특기 교육을 받는다. 9일 이 곳을 방문했을 때도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그림, 무용, 바둑, 서예, 성악, 수영, 피아노, 태권도, 컴퓨터 등의 교육을 받고 있었다.
역시 이곳에서 무용 특기 교육을 받은 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거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조모(25)씨는 "이곳에서 학생들은 최고 수준의 교사들에게 본인이 원하는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며 "평양 각 지역마다 이곳보다 규모는 작지만 시설 면에서는 비슷한 소년회관이 있어서 비슷한 기능을 수행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처우 수준은 일반 학교의 교원과 대학 교수의 중간 수준이다.
이곳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정보기술(IT)에 대한 북한 정부 차원의 관심이다. 조씨는 "이곳의 모든 과정은 비전문가 과정이지만 컴퓨터 교육만은 전문가 양성 과정"이라며 "전국에서 선발된 학생들이 여섯 단계의 컴퓨터 교육을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방 학생의 경우는 평양에서 숙식이 제공되며, 이곳 교육 과정을 모두 이수한 학생은 4년 과정의 전문대학 2학년에 편입할 자격이 주어진다. IT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엘리트 교육 코스인 셈이다.
실제로 9일 만난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은 최고의 시설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연습을 하고 있었다. 조씨는 "이곳에서 IT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은 김정일 장군도 직접 챙길 정도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남이 전화 돼 소식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취재와 사진 촬영 등이 매우 제한되기는 했지만 북쪽에서 보낸 3박4일 동안 '주적' 또는 '직접적 군사위협'으로 국방백서에 명시된 나라의 수도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거의 매일 밤 평양을 방문한 사람들과 북측 관계자들 사이에 삼삼오오 술자리가 벌어졌다. 공사를 넘나드는 대화들이 늦게까지 이어졌고 또 그만큼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다. 특히 북측 젊은이들과의 대화는 인상 깊었다.
한 북측 관계자(34)는 남쪽의 인터넷 신문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보이면서 "기회가 된다면 인터넷을 통해 <프레시안>에서 꼭 기사를 읽어보겠다"고 말했다. 북측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종종 남한을 비롯한 세계 소식을 접하고 있다는 것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다른 북쪽 젊은이(26) 역시 남쪽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무섭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는데 자주 접하다보니 말이 잘 통해 꼭 오랫동안 지내던 사이 같다"고 남측 사람들을 대하는 심정을 얘기했다. 최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이성 친구를 만나고 있는 그는 자기 연애 얘기를 잠깐 한 뒤 "북남이 전화가 되거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이런 얘기를 가끔 나눌 수 있을 텐데, 남쪽처럼 손전화(휴대전화)가 있으면 참 편리할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대북 관계에 정통한 한 정부 관계자 역시 "매일 금강산과 개성을 제외한 평양과 같은 북한 지역에 남한 사람이 얼마나 가 있는지 관계 당국에서 확인을 한다"며 "2004년처럼 남북관계가 경색된 시점에도 매일 30~70명은 북한에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북한을 이렇게 찾은 남한 사람들의 규모는 연인원 1만5천명 정도는 될 것"이라며 "사실상 남한과 북한은 한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평양의 유명한 냉면집 옥류관에서는 식사 때마다 전혀 다른 경로로 평양을 찾은 남측 인사들이 서로 만나는 일이 빈번할 정도라고 한다.
***"북남이 힘 모아서 미국 눈치 안 보는 게 가능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렇게 가까워지는 남북 사이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알'과 같다는 것 역시 이번 여정으로 실감이 됐다. 그 핵심에는 바로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이 있었다.
우선 3박4일 여정 내내 북측 관계자들은 미국의 북한 폭격 가능성에 대한 강한 불안감을 보였다. 한 북측 관계자(36)는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겠다고 위협을 하는 현실에서 북남 관계 개선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남한 정부가 미국에 끌려가는 것이 갑갑하다"고 불안감과 남쪽 정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남북관계나 대북관계의 현황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정보가 제한적인 다른 주민(25)은 "북한에게는 충분히 미국과 맞설 힘이 있다"며 "남한의 경제력과 북한의 군사력을 합하면 우리 민족이 충분히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데 왜 남한은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
북측의 체제 논리에 기반을 둔 지적이지만 그 진정성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또 미국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남북의 현실에 답답해졌다.
***"자기가 발 딛고 선 곳에서 노력하다보면 북남 다 살기 좋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날 밤, 유난히 친절하게 대해준 한 북측 관계자에게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남측 인사 한 사람이 국가정보원 관계자라도 옆에 있었으면 큰 일 날 말을 한 마디 던졌다. "○○○ 선생님이 너무 잘 해줘서 계속 평양에 있고 싶다."
비교적 젊은 북측 관계자의 대답은 거리낌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가 속한 나라를 배신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자본주의 밑에서 살아가는 게 힘들어도, 자기가 발 딛고 선 곳에서 바꾸도록 노력해야지요. 그렇게 서로 노력하다보면 북남 다 살기 좋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문현답이었다.
평양은 수년 전과 비교해 다소 밝아졌지만 앞날이 더 밝아질지 아니면 한없는 어둠이 평양은 물론 한반도 전체를 휘감을지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 젊은이의 말대로 남북한 민중들이 '더 나은 한반도,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노력한다면 좀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평양을 떠나 순안공항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북쪽에서 만난 사람들을 하나둘 떠올리며 어느 새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가까워진 3박4일간의 일정을 정리하며 결론을 내렸다.
현재의 남북한 분단 체제는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최근 독일의 시인 볼프 비어만은 한국을 방문해 "통일은 미친 짓이지만 통일을 안 하는 것은 더 미친 짓이다"라는 말을 했다. 평양을 방문하면서 온몸으로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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