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초록빛이 짙어지는 산에서 초여름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5일, 지율스님을 만나기 위해 경상남도 양산의 천성산을 찾았다. 천성산 자락의 안적암에서 만난 지율스님은 늘 그렇듯이 해맑은 미소로 기자를 반겼다. 천성산의 기운을 받은 탓인지 지율스님은 1백일 단식 후 가진 몇 차례 만남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기운이 넘쳐 보였다.
4~5월 내내 천성산 환경영향 공동조사 준비와 각종 강연으로 바빴던 지율스님은 바로 전날에도 동국대 '에코포럼'이 천성산을 주제로 연 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왔다. '천성산 지킴이' 지율스님과 산행을 해보고 싶은 기자의 욕심 때문에 몇 주 전부터 등반 약속을 해놓긴 했지만 스님의 건강이 내심 걱정이었는데 우선 안심이 됐다.
***"언론들, 지율 겨냥한 관심 반만 지역 주민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지율스님은 해맑은 미소와는 달리 처음부터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미 발걸음은 안적암을 떠나 열두 개의 천성산 계곡 가운데 하나를 따라 내원사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어제(4일) 아침에 <조선일보>를 보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인해보니 전날 <동아일보>에 똑같은 기사가 먼저 났다고 하더라. 내가 제주도 화순항 군항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의 편에 선 것 때문에 네티즌들이 '발끈'했다는 내용인데…. 정작 제주도에서 주민들과 행진을 한 것은 24일인데 그 때는 보도도 하지 않다가 열흘이 지나서야 악의적인 제목으로 날 흠집 내려고 기사를 쓴 것이다.
그 신문들이 날 겨냥해 이러는 것도 안쓰럽지만 더 한심한 것은 보도 태도다. 언론이라면 도대체 왜 주민들이 제주도 군항 설치에 반대하는지에 대해서 좀 심도 깊게 다뤄야 하지 않을까? 세상일에 무지한 나지만 얼른 생각해봐도 제주도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 설치되는 이 군항이 군사적인 목적이라기보다는 미군의 이해관계와 깊이 연관돼 있다는 걸 알겠던데…. 하긴 그 신문들이 나를 겨냥해 비난한 덕택에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군항 설치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알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웃음)"
지율스님 지적대로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3일, 4일 일제히 "또, 지율…" 등의 기사를 통해 열흘 전 제주도에서 지율스님의 행적을 문제 삼았다. 지율스님이 지난 24일 제주도를 방문해 강연을 하고 '생명ㆍ평화 걷기 대회'에 참가하면서 제주도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것을 익명의 네티즌 의견을 이용해 비난한 것이다.
***"지율스님이 우리 할 일 대신해…"**
지율스님 말대로 영남에서 그 신문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하루 종일 천성산 산행을 하면서 만난 등산객들은 '천성산의 상징' 지율스님을 만난 것을 반가워하면서 "스님 제주도에 계신다더니…"라는 얘기를 연발했다. 언론의 부정적 영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율스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상당수인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지율스님을 겨냥한 신문들의 의도와는 달리 등산객들은 지율스님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천성산을 찾는 대다수 등산객이 부산에서 온 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동안 부산의 지역 언론에서는 "경부고속철도 조기 개통이 안 돼 부산 지역 경제가 못 살고 있다"며 그 원인으로 지율스님을 지목해 왔었다. 등산객들이 평균적인 시민보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서일까? 한 등산객은 지율스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지율스님이 정말 장한 일을 했다. 대구 팔공산을 봐라. 그 좋은 산이 엉망이 됐다. 이젠 아예 그 산은 오르기도 싫다. 천성산이 이 정도라도 유지된 게 다 지율스님 탓 아니냐. 여러 사람들이 자연 환경의 가치를 모를 때 먼저 깨달은 스님이라도 나서 준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지율스님이 우리가 할 일까지 대신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 등산객 같지는 않았다. 지율스님이 들고 있던 사진기를 못 마땅하게 보던 부산의 한 등산객은 같이 가던 일행에게 "저 스님 때문에 부산 지역 경제가 못 살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의 이런 불평은 즉각 동행하던 여자 등산객에게 반박됐다. "그게 왜 지율스님 탓이냐. 처음부터 절차를 무시하고 엉터리로 고속철도를 뚫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문제지. 이렇게 엉터리로 추진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걸 지율스님이 미리 지적해준 걸 우리가 고마워해야 한다." 부부 사이로 보이던 두 사람의 날선 공방은 자칫 부부 싸움으로 번질 태세였다.
산행을 하면서 등산객의 반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남성보다 여성이 지율스님에 대한 공감대가 훨씬 더 컸다는 사실이다. 천성산과 환경을 아끼는 지율스님의 모성애적 헌신이 여성의 공감을 산 탓일까? 여성들과 함께 아이들 역시 지율스님을 반가워했다. '도롱뇽 소송'이 아직까지 법원을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미래 세대인 아이들에게는 큰 공감대를 형성했던 모양이다.
"가끔 아이들을 만나면 반응이 두 가지다. '와, 지율스님이다!', 하고 반기는 애들에게 '나를 아느냐'고 물으면 반응이 두 가지야. '그럼요, 스님이 도롱뇽 지킴이잖아요', 이런 반응과 ' 스님이 '단식 짱'이잖아요!', 이런 반응." (웃음)
하지만 한 가지 우려스러운 일도 있었다. 아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등산객이 "지율스님 맞나? 맞네!", 하면서 지율스님을 알아보는 데 반해 아홉 시간의 산행 동안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지율스님에게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인터넷 공간에 글을 남기는 상당수가 그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기이한 일이다. 이런 무관심과 인터넷 공간에 넘쳐나는 지율스님 또 환경단체에 대한 적대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계에 자랑할 만한 생명ㆍ평화의 정신 축적할 때"**
안적암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내원사 입구 주차장까지 온 뒤 내원사까지는 지율스님 지인의 승용차를 얻어 탔다. 하루에 천성산을 다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지율스님에게 승용차를 타자고 제안한 기자는 이내 후회를 하고 말았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원사를 향하는 내내 차 앞에 탄 지율스님을 알아본 등산객들의 수군거림이 들렸기 때문이다. 지율스님은 고속철도는 물론 자동차도 마음대로 못 타는 상태였다.
"고속철도는 아예 탈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서울 가는 일 때문에 고속철도를 타면 서울까지 가는 내내 시달려야 한다. 자동차를 마음대로 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장 저렇게 웅성거리니까. 물론 나는 지금처럼 진행되는 개발에 아주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런 식의 불편은 감수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정부에게 요구해온 것은 개발 자체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이왕에 하는 거면 합리적인 절차를 갖춰 하자는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는 환경영향평가를 한번 해보자고 계속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 이걸 가지고 '옛날로 돌아가는 거냐'고 비난하면 난감하다.
지금까지 개발의 성과를 다 무시하고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만 개발만 강조해오면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 동안에 소홀히 했던 것들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래서 요즘엔 '겨우 도롱뇽 살리려고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하느냐'는 비판에도 떳떳하게 '만약 그렇게 전 국민의 합의로 한 생명을 살린다면 그것 자체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역량이다'라고 답하곤 한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그래서 지구를 구하는 생명ㆍ평화의 정신을 축적하는 게 우리한테 정말 필요한 게 아닐까."
지율스님의 얘기를 듣고 보니 예전의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흉물스런 임도 뚫리기 전 아름다운 모습 눈에 선해"**
산행을 시작한 지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원효대사가 1천명의 승려에게 화엄경을 강설했다는 화엄벌에 도착했다. 초여름 화엄벌은 아름답고 또 평화로웠다. 이 평화로움이 바로 원효대사가 화엄경 강설 장소로 이곳을 택한 이유였을지 모른다. 산행 내내 지율스님의 천성산 자랑이 계속됐다.
"천성산은 특히 물이 많은 산이다. 화엄늪, 무제치늪, 밀밭늪 등 희귀 고층 습지가 바로 그 단적인 증거다. 특히 등산객의 출입이 통제된 화엄늪 밑쪽으로는 노루, 멧돼지 등이 밀렵꾼을 피해 서식하고 있다. 늪에 있는 희귀 동ㆍ식물은 아직 제대로 파악도 안 된 게 많다. 만약 천성산 관통터널이 건설돼 늪의 생태계가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가 큰 재앙이 될 것이다."
스님 말대로 천성산은 산 전체가 금방 목욕을 한 듯 온 몸에 물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땅도 꼭 양탄자 위를 걷듯이 푹신푹신해 오랜 산행에도 다리 통증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천성산 봉우리를 지나 다시 안적암으로 향하는 임도를 걸으려니 발바닥부터 아파오기 시작했다. 임도를 닦다만 곳곳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노출돼 있는 게 보기 좋지 않았다.
지율스님은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관통 터널 반대 운동을 하기 전 2000년부터 '천성산 지킴이'로서 무분별한 임도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해왔다. 지율스님의 노력 탓에 천성산을 횡단하는 임도 계획이 철회됐고, 천성산 정상 인근까지 오고가던 자동차들의 출입도 통제됐다. 하지만 지율스님은 요즘도 복원되지 못한 흉물스러운 임도를 걷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
"천성산을 지켜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나서서 임도 건설은 막아냈지. 하지만 여전히 이 길은 못 걷겠어. 임도가 이렇게 뚫리기 전 모습이 눈에 선하거든. 앞으로 상황이 좀 정리되면 계획을 세워서 생태계가 자연 복원되도록 해볼 생각이야."
***"공동조사 삐거덕거려, 한 달 정도 천성산과 같이 한 시간 정리하고파"**
지율스님은 서울로 떠나는 기자를 배웅한 뒤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지율스님은 요즘 환경영향 공동조사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해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단식 1백일로 얻은 겨우 이 정도의 성과마저도 정부나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아주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최근에 한국철도시설공단 등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제안을 해서 많이 속상하다. 하지만 다행히 어리석은 내 주변에 많은 지혜로운 분들이 있으니 잘 해결되리라고 본다. 나는 이제 한 걸음 물러나서 한 달 정도 조용히 천성산과 같이 해온 시간을 돌이켜 볼 생각도 가지고 있다."
지율스님은 최근 천성산 조계암 무문관에서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가 스님들이 부럽기만 하다. 자물쇠로 문을 잠근 방에 들어간 이 스님들은 하루 한 끼 공양을 제외하고는 '고독한 수행'을 정진한다. 지율스님 역시 그런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하지만 지율스님은 다음 주말에 또 서울을 찾게 됐다. 지율스님이 단식하는 동안 애를 썼던 동료가 결혼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결혼식에는 안 가려고 했다. 남은 죽을 각오를 하고 단식을 하고 있는데 아니 그 옆에서 둘이 눈이 맞아서 연애를 했다지 뭐야. 너무 괘씸해서 안 가려고 했는데 하도 와야 된다고 해서 가는 거야. 하긴 어쩌면 내 단식의 가장 큰 성과가 이 노총각, 노처녀 결혼 시킨 건지도 모르겠네." (웃음)
지율스님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어둠이 내리는 천성산 깊이 울려 퍼졌다. 지율스님이 왜 수많은 사람들에게 '초록의 공명'을 불러일으키는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