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노태우가 훈장을 박탈 당한다니…**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하여 1980년 신군부의 핵심인물들이 받았던 훈장을 모두 박탈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들은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피로 물들인 공로로 태극무공훈장 등을 한 사람마다 많게는 열 개씩 가슴에 주렁주렁 달았다. 당시의 상황이야 말할 것도 없이 저희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던 시절인지라 마치 아이들 병정놀이 하듯 훈장을 나눠 줬을 터이다. 군복을 벗어 던지고는 그 훈장의 수에 따라 또 권좌도 나눠 가졌다. 훈장을 제일 많이 가진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고 그 밑으로 누가 뭐를 하고….
그들의 가슴을 빛나게 한 훈장은 곧 민중의 한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힌 80년 4월, 강원도 태백의 광산노동자들, 하얀 찔레꽃도 붉게 변한 광주의 5월, 그 거리에서 목숨을 잃거나 사랑하는 이를 여읜 사람들.
그해 여름은 장마가 길었다. 가난한 동네는 더 후줄근했다. 물기 먹은 '브로크'에서 굵은 모래알이 떨어질 것 같던 담벼락. 사는 게 딱 그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점착력없는 날림 시멘트 벽돌이 긴 장마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곤하게 자는 사람을 덮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변두리 판자촌에선 그런 일이 더 많았다. 느닷없이 동네에 나타난 무장한 헌병과 경찰에게 끌려가는 이웃을 보며 사람들은 저 한국전쟁 때 수 틀리면 아무나 '공산당'으로 몰아 죽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광주에서 수천 명이 죽었다더라 하는 흉흉한 소문도 있으니….
1982년이던가, 흥사단의 대중강연에서 함석헌 선생은 전두환을 일컬어 '한국전쟁 때 죽은 국군, 미군 등의 원혼이 똘똘 뭉쳐 살인마로 나타난 자'라고 쇳소리로 일갈 하셨다. 선한 백성을 죽인 원흉에 대한 선생의 노기에 공연히 내가 다 가슴이 조였다.
***'법난'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한 짓이라고?**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할 터이지만, 그해 가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불교계, 특히 조계종이 쑥대밭이 된 사건이었다.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악독한 탄압이었고, 그래서 불교계는 '법난'이라고 규정한다. 전두환과 그 휘하의 졸개들이 내세운 구실은 이러했다.
"(…) 불교는 우리 민족의 전통 종교로서 민족정기와 주체의식을 함양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여 국민의 정신영역을 계도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부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무 발호하는 비리지대로 화하여 뜻있는 성직자와 신도들은 물론 일반 국민의 지탄과 빈축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에 계엄당국은 정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 대해 과감한 숙정과 정화 조치를 단행하면서도 종교가 지니는 특수성과 독자성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불교계 자체의 자율적 정화와 숙정이 있기를 기대하여 왔던 것이나 상당한 기간이 경과하여도 아무런 자체 정화의 움직임이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뿐 아니라 자력으로는 도저히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 부득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철퇴를 가하게 된 것이다."(1980년 10월 28일 계엄사령부 발표문)
사회정화 차원에서 불교계에 철퇴를 가한다고? 살인마들이! 정말이었다. 전두환 일당은 실로 광주학살에 버금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을 틈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비롯한 전국의 지도급 스님을 강제 연행해 그 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동안 감금하고 구타와 고문을 하였다. 좌우지간 이로 인해 당시 강원도 낙산사 주지였던 원철 스님은 풀려난 뒤 시름시름 앓다가 이승을 떠났다. 망나니나 다름없던 당시의 계엄사에 끌려간 스님들이 어떻게 당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대략 짐작이 간다.
그해 11월 14일 발표한 계엄사의 중간발표에 따르면 "비리승려 및 관련 민간인 55명을 연행하고 98명의 참고인을 불러 모두 153명을 조사하였고 이중 승려 10명, 민간인 8명을 구속하고 32명은 불교정화중흥회의에 회부시켜 승적 박탈 또는 종직 사퇴토록 위임했으며 수사과정에서 200억6000만 원의 부정 착복액을 적발했는데 이를 불교종단에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계엄사는 향후 불교정화를 위해 5년간 계속 수사를 진행해 불교계의 부정부패를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하였다.
***'요정사장'으로 몰리고 '체탈도첩' 당하고…**
발표에 나오는 공식 연행자 외에 훨씬 많은 불제자가 연행되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음은 뻔한 사실이다. 이 당시 피해자 가운데 몇 분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혜성 스님은 그때 서울 우이동 도선사의 주지로 있었다. 10월 27일 새벽, 무장한 군인들이 절에 들이닥쳐 스님을 끌고 갔다. 도무지 연행되어야 할 까닭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서울 중심가 무교동, 계엄사가 주축이 된 합동수사본부 수사실이었다. 이곳에 온 직후 스님은 강제로 승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새파란 군인들에게 다짜고짜 온갖 폭행을 당했다. 스님의 표현대로 '죽지 않을 만큼 매일 맞았다'. 스님이 연행된 혐의는 도선사 주지로 있으면서 신도의 시주를 착복, 횡령하였다는 것이었다. 합수부가 미리 작성한 혐의 내용을 시인하지 않으면 '완전히 이 세상에서 격리'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스님은 청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래 참으로 고지식할 정도로 절집 일에만 몰두한 분이다. 세상 돌아가는 형국에 신경쓰다보면 출가수행자로서 해야 할 본분을 다하지 못하니 그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인연이 다할 때까지 절집 살림만 충실히 하리라 다짐한 분이다. 당연히 개인재산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다. 합수부가 스님을 보름 넘게 가둬놓고 닦달을 해도 이 점은 분명했다. 스님은 고문으로 장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고 풀려났다. 즉시 서울 필동 중앙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장기간의 요양에 들어갔다. 하지만, 10월 28일자 각 신문은, 계엄사의 보도지침에 따라 혜성 스님을 거액을 횡령하고 수행자를 가장한 파렴치한 스님으로 보도했다. 심지어 당시 동아일보는 다른 신문보다 더 악랄하게 혜성 스님을 지목하여 '낮에는 주지, 밤에는 요정사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다뤘다. 풀려나서야 이 사실을 안 스님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입었다. 설상가상, 합수부의 조종을 받은 종단 집행부는 스님에게 제적이라는 중형을 내렸다.
강화도 보문사 주지로 있던 정수 스님 역시 '10.27 법난'의 대표적인 피해자다. 정수 스님에게는 여성연예인, 여신도들과 놀아났다는 혐의가 들씌워졌다. 보문사를 찾아 온 어느 여가수가 기념을 남기고 싶다고 하여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김포 해병대 부대의 어느 수사실에 끌려간 스님은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돌아온 것은 지옥에서나 겪음직한 고문이었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번갈아 당했다. 스님이 전하는 고문 장면은 이렇다. 철제책상에 눕힌 채 머리는 책상 밖으로 떨어뜨리고 물수건으로 코 위쪽을 덮고는 고춧가루와 후추가루를 탄 물을 입에 부어 넣었다. 또 가는 전기줄을 사지에 테이프로 감고는 전기를 넣어 사람을 새우처럼 오그라들게 하였다. 이런 고문으로 두 번을 혼절하였다고 한다.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리기도 했다. 하다하다 안되니까, 나중엔 사병을 시켜 스님의 머리에 총을 대고 있다가 졸면 방아쇠를 당기게 하였다. 물론 실탄이 들지 않은 총으로. 5일을 그렇게 했다.
결국 항복한 스님은 무조건 혐의를 인정하고 말았다. 앞서 혜성 스님처럼 정수 스님도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기 이전에 벌써 종단에서는 체탈도첩(遞奪度牒)이라는 '사형'을 내린 상태였다. 꼬박 한 달을 저승사자에 시달리다 풀려난 스님은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 주지로 있던 삼보 스님은 '간첩'으로 몰려 끔찍한 일을 겪었다. 삼보 스님은 해병대 복무 중에 청룡부대원으로 월남에 갔다 온 참전용사였다. 10월 27일 아침 절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물어볼 게 있으니 함께 부대로 가자고 하여 따라나섰다가 그 길로 어느 부대인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사방이 콘크리트로 된 곳에 갇혀 상상도 못할 고문을 당했다. 혐의는 간단했다. 월남 참전 보상비로 은사 스님께 포니 승용차를 사드린 게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해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무조건 공작금으로 자가용을 샀다고 시인하라는 다그침뿐이었다. 만약 시인을 하면 진짜 사형을 당할 것 같아 잔혹한 고문에도 끝까지 부인하였다. 결국 이십일 만에 간첩 혐의는 벗었지만 비리승려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씌워 원주교도소로 보내졌다가 나중엔 삼청교육대로 넘겨져 혹독한 수형생활을 했다. 원주교도소에 있을 때 고문으로 엉망이 된 삼보 스님의 몸을 본 수형자들이 울었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26년 전의 한…스님들도 인간인 고로…**
혜성 스님은 고문의 후유증과 심한 마음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뒷날 다시 도선사 주지로 부임했다. 종단 내에서는 비공식적으로나마 명예회복을 시켜 준 셈이다. 하지만 그 상흔은 점점 도져 몇 차례의 뇌수술을 받아야 했고 최근에는 건강이 더욱 나빠져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며 요양 중이다.
정수 스님의 경우는 더욱 참담하다. 만약 전두환 일당에게 그런 꼴만 당하지 않았다면, 보문사 주지로서 포교와 수행에 전념하며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스님이 되었을 것이다. 진작부터 대도시의 중심에 큰 포교당을 지어 한국불교의 저변을 넓히고자 작정하였던 스님의 뜻한 바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스님은 늙고 병든 몸으로 서울 우이동의 화계사 경내의 작은 방에 누워 있다. 시대의 탓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련하다. 국가권력을 찬탈한 자들에 의해 한 사람이 운명이 이렇듯 망가졌으니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하다.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스님이지만, 스님을 이렇게 만든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얼굴표정이 단박에 변하며 고개를 가로 짓는다. 수행도, 세월도 약이 될 수 없는 아픈 기억이다.
삼보 스님도 당시 겪은 일에 치를 간다. 지금도 반드시 '10.27 법난'을 기획하고 실행한 자들을 가려내어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하리라고 다짐을 한다. 작년 여름에는 법난피해자 증언대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증언을 하다가 할복을 하기까지 하였다. 수행자로서 못할 짓이겠지만 개인의 피해만이 아니라 한국불교가 입은 엄청난 상처를 생각하면 더한 짓도 마다할 일이 아니다.
사실 '10.27법난'으로 한국불교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불교계가 정말 부정과 비리, 부패가 만연한 집단이라고 매도하였다. 광주항쟁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사실을 왜곡하던 현실과 다를 바 없다. 그 탓에 불교계는 민족종교로서 제 위상을 잃고 또 종단 내적으로도 한참 동안을 내홍에 시달려야 했다.
1980년대 중반 민중불교운동이 힘차게 일어나 우리 사회의 민주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편 법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그 성과로 노태우정부가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사과하였지만 정확한 진상규명, 명예회복 등은 아직 요원하다.
근래 조계종은 법난관련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벌써 이십하고도 육년의 세월이 지났다. 피해자스님 다수가 고령에 접어들었다. 돌아가신 분도 있다. 아무리 수행자라지만 가슴에 한이 없을 리 없다.
나랏만신이라 불리는 김금화 선생은 '한은 풀고 복은 나누시게'라 하였다. 올바른 과거청산 역시 억울한 한을 제대로 푸는 굿이리라. 법난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속히 좋은 소식이 들려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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