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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김재순의 '93년도 친일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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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태우-김재순의 '93년도 친일 발언'

盧 "약한자가 큰소리 내는 법", 金 "공식석상서 日가요는 내가 최초"

한승조, 지만원, 조갑제의 친일 발언에 이어 이번엔 "2차대전의 A급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일본총리의 신사참배를 우리가 문제삼아서는 안된다"는 국내 우익인사들의 발언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일본의 극우잡지인 <문예춘추> 3월호에 실린 한승조를 비롯한 김문수 한나라당의원,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공동대표 등의 발언이 그것이다. 김 의원과 신 대표 등은 <문예춘추>의 악의적 인터뷰 왜곡보도라고 항변하고 있으나, <문예춘추>가 어떤 성격의 잡지인지를 모르고 인터뷰를 해 왜곡의 빌미를 제공했다면 그 또한 한심한 일이다.

이처럼 연일 터져나오는 국내인사들의 친일 발언에 국민 다수는 분노를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이른바 '지도층인사'들 사이에 친일 뿌리가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가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국내에선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망언이나, 일본에서는 이런 한국 지도층인사들의 친일 발언이 그다지 낯선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동안 일본 언론매체를 통해 한국의 내로라하는 지도층 인사들의 친일발언이 잇따라 소개됐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국의 대통령, 국회의장 등 최고위급 인사들까지 포함돼 있다.

일본극우의 반한감정 표출 및 역사왜곡은 '북핵위기' 발발 시기와 일치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북핵위기를 계기로 일본국민 사이에 형성된 '위기감'을 기화로, 자신들의 발언권을 확장하려는 의도에서다. 실제로 1차 북핵위기가 터진 지난 1993년 일본 극우들은 맹위를 떨쳤고, 2차 북핵위기가 진행중인 지금 또다시 대거 준동하고 있다. 문제는 이럴 때마다 일본 극우언론들은 한국의 친일 지도층인사들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한승조가 일본 극우잡지 <정론(正論)>과의 인터뷰에서 망언을 서슴치 않았듯, 1993년에도 많은 국내 친일인사들이 일본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친일'을 외쳤다. 그런 대표적 예가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와 전직 국회의장이던 김재순이었다.

***노태우 "약한 사람일수록 큰 소리 내는 법이니, 큰나라가 여유 보여야"**

1993년 2월의 일이다. 퇴임을 눈앞에 두고 있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극단 <사계(四季)>의 아사리 게이타(淺利慶太) 대표와 만나 인터뷰를 했다. 일본의 극우잡지인 <문예춘추>가 노태우대통령 이임을 계기로 마련한 대담이었다. 아사리는 노태우대통령 재임 기간중 청와대를 세번이나 방문했던 자칭 '지한파'. 그는 지난해에는 한국에 극단 <사계>를 진출시키려다가 국내 연극계의 거센 반발로 계획을 일단 보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문예춘추> 1993년 3월호에는 노태우 당시대통령과 아사리의 대담이 '일한(日韓)마찰, 한국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부제는 노대통령 말을 인용한 "일한 마찰은 우리 쪽에도 반성할 일이 있다"였다. 아무리 퇴임을 앞두고 있는 대통령이라 할 지라도, 일국 대통령과의 인터뷰 제목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제목이었다. 그러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니, <문예춘추>가 이런 제목을 붙인 것도 무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노태우와 아사리의 대담 내용이다.

Q: 최근 일본에서는 전후 48년간 한국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일감정이 없어지지 않아 혐한(嫌韓)감정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데...

노태우: 한일 양국 문화 속에는 유교사상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한국 유교는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논리를 인정하고 함께 발전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명분론'이 우세한 셈이지요. 반면 일본 유교는 다릅니다. 주자학뿐 아니라 양명학 같이 상대방을 인정,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사상도 존재해 왔습니다.

명분론적 사상이 강한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올바르게 반성한다고 생각되면 철저히 협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이 안 서면 목숨이 위태로와도 '예' 하지 않습니다.

Q: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사과했음에도 천황에게까지 사과 요구를 해 일본 국민들의 혐한 감정이 높은데...

노태우: 정신대 문제는 일본언론이 먼저 문제를 제기, 우리 국민을 격분케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도 일본이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규탄하며 일본에 대해 강한 대응을 하지 않는 정부가 못마땅하다는 식의 감정론으로 여론을 부채질했지요. 이같은 양국 언론의 태도는 한층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으로, 결코 옳지 않습니다.

두 나라가 대립할 때는 '보다 큰 나라가 여유를 보여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약한 사람일수록 큰 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대립이 생겨 커질 때는 내가 국내정치를 할 때 그렇게 했듯이 보다 큰 나라,여유있는 나라가 양보를 하는 게 요령있게 문제를 푸는 방식입니다. 일본이 그런 여유를 보인다면 '한국민은 감격을 잘 하는 만큼 대단히 감사해 하며 진정한 우정으로 응할 것'입니다.

Q: 한국은 전후 일본이 힘 닿는 데까지 행한 협력의 실태를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노태우: 전후 일본이 행한 협력에 대한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 충분치 않다는 견해에 일리가 있습니다. 조만간 일본의 협력이 한국경제 재건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한국인들이 알게 될 겁니다. 나 자신도 전후 일본의 협력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Q: 저는 곧 불행한 역사 속에서 비극적 접촉을 하게 된 두 사람을 다룬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이란 소설을 극화, 일한 양국에서 공연하고 싶습니다.

노태우: 좋은 착상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서 원흉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어지러움'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선생의 소설을 좋아해서 월남전 시절에도 <료마(龍馬)가 간다>와 다카스키 신사쿠(高彬普作)의 일대기를 다룬 <세상에 머무는 나날>을 촛불 아래 밤새워 읽었습니다.

특히 다카스키는 내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삼는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으나 메이지(明治) 유신의 위업을 달성했고, 게다가 정치에 손을 담그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이었지요.

일본과의 역사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으나, 동시에 나는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생애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일본인 선생과 일본 책에서 얻은 것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이론인이 갖고 있는 미덕인 '의리와 인정'은 나에게 큰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라는 큰 자리에 앉게 된 자질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고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김재순, "공식석상에서 일본노래 부른 건 한국요인들 중 내가 최초일 걸"**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친일성 대담 기사가 나간 지 불과 며칠 뒤인 1993년 2월16일 이번에는 노태우정권시절 국회의장이던 김재순과의 인터뷰 기사가 일본 극우신문 <산케이 신문>에 실렸다. 그는 당시 김영삼과의 정쟁으로 강제로 옷을 벗은 박태준 전 포철회장의 뒤를 이어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직을 맡게 됐고, 그의 회장 취임을 기념해 인터뷰가 성사된 것이다. 인터뷰를 한 <산케이> 신문기자는 이런 기사를 썼다.

이번의 한일의원연맹 회장 취임에 앞서 지난해 한일 친선협회장이 되었을 때 그는 일본에서 온 대표단들을 위해 베푼 친선 파티장에서 기타하라 와쿠슈(北原白秋)가 작사한 <이 길은 언젠가 내가 왔던 길>을 불렀다. "공식석상에서 한국의 요인이 일본노래를 부른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닙니까?" 하면서 그는 호쾌하게 웃었다.

"과거의 친일은 매국노였으나, 현재의 친일은 애국자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회장은 청년시절 가와이 에이지로(河合榮次郞)의 글을 전부 읽고 영향을 받아 일관되게 반공주의자의 길을 걸어왔으며, 그의 서재는 일본책으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한국은 총론은 미래지향적이나 각론은 과거집착형 아니냐"고 묻자, 그는 "아니다. 총론은 '반일', 각론은 '우호'라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지일파(知日派)였다.

<산케이 신문> 기자다운 "만족스럽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같은 날 김 회장을 인터뷰한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김 회장을 "일제때 같이 중학교를 다녔던 일본인 동창들과 해방후 지금까지 매년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동창회를 열어온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의 친일파에 대한 냉소가 읽혀지는 소개였다.

노태우와 김재순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한국 권력 내부의 친일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도 단단히 박혀있다. 한 줌의 이들이 존재하기에 일본 극우는 거침없이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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