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년간 많은 허울이 벗겨지긴 했지만, 아직도 적잖은 이들에게 미국은 '자유와 풍요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김동춘 저. 창비 출간)은 그러나 "미국의 진짜 모습은 전쟁과 시장주의를 무기로 전세계를 수탈하고 있는 '파시즘 제국'"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전쟁과 시장주의로 무장한 미 제국**
진보사회학자로 활발한 저술과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시장과 전쟁이야말로 미국을 존립하게 해주는 두 개의 엔진"이라면서 "시장만능주의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풍요를 향한 열망과 소외는 범죄를 낳고, 미국 내부의 범죄와 폭력은 외부의 폭력(전쟁)과 언제나 동시에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우선 미국의 우수한 면을 인정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미국은 분명히 지난 20세기 세계문명을 주도할 만한 자격이 있는 나라이며, 그 문명의 혜택을 한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누려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인들은 친절하고 경건하며, 관용적이고 창의적이다. 다재다능.모험심.실용주의.창의성의 상징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정신은 오늘 미국 사회의 도처에 숨쉬고 있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된 것은 단순히 천혜의 자연자원과 지리적 장점 덕분만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까지의 미국을 말하고 있다"면서 "그것은 알렉시스 토크빌이 보았던 미국, 제국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미국"이라고 갈파했다. 저자는 "오늘의 미국인들처럼 그렇게 많은 칭찬을 받았던 과거의 독일인이 히틀러의 등장을 지지하였으며, 나치가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것을 방조하거나 모른 체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파시즘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은 물질적 탐욕, 무관심과 개인주의, 불안감"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현재 미국은 파시즘 국가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 미국 내의 양심세력과 유럽과 미국 이외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보는 미국은 "가장 대표적인 법치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전쟁의 문 앞에서 언제나 법치는 멈추었고,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인권의 원칙은 존중되지 않는" 국가다.
막강한 힘을 가진 거대자본과 로펌들의 정치권 로비, 역사상 최악의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불평등과 범죄가 미국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실 시장과 전쟁은 무척 많이 닮았다. 시장터와 전쟁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과거에 양반이었는지 남의 집 종이었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다른 제약이나 조건없이 자신의 능력만 갖고서 동등하게 겨루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시장과 전쟁은 사실 '태생보다는 능력이 좌우하는' 미국의 정신과 가장 잘 부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식 자유와 시장경제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오만함이 밑바닥 미국인들과 다수의 세계인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화시켰는가"라고 미국에게 반문한다.
저자는 "누구든지 남을 두려워하고, 재산을 쌓아두거나 육체의 쾌락에 빠진 사람은 틀림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싸울 것"이라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이는 오늘의 미국을 두고 하는 말 같다"며 최근 이라크침공 과정을 미국 현지에서 지켜본 소회를 밝혔다.
***냉전과 지구화가 공존하는 유일한 나라,한국**
그에 따르면 미국은 1990년대이후 단순한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제국이 되었고 전세계는 미국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은 이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세계다. 사실 미국은 1945년 이후 냉전시대부터 '제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국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나라다.
아직 냉전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의 한국은 지구화의 물결에 휩쓸려들어가면서 전세계 국가중 '제1차 미국화(냉전)'과 '제2차 미국화(지구화)'가 공존하는 유일한 나라가 됐다.
그래서 한창 일할 나이의 3,40대가 미국 이민열병에 사로잡혀 있는 나라, 전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많은 10만명 이상의 미국 유학생이 있는 나라, 매년 7천여명의 여성이 '미국시민'을 낳기 위해 원정출산을 가는 나라, 대학생의 45%가 만약 이중국적자로서 하나를 택하라면 미국 국적으로 택하겠다는 나라, 약육강식의 미국 자본주의를 이론화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철저하게 세뇌돼 "미국이 요청하면 조건 달지 말고 들어주자"는 주미대사나 국방부 대변인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저자는 "한국인에게 미국은 혈맹,형님 혹은 아버지의 존재 그 이상"이라면서 "따라서 오늘의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원조'인 미국을 잘 알아야 하고, 그것은 곧 미국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국가' 미국의 대박사업, 2차대전과 마샬플랜**
저자는 '자본주의 미국'을 전쟁을 주요사업으로 하는 '기업국가'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박을 떠뜨린 전쟁사업은 2차대전 참전과 전후 복구를 위한 마샬플랜, 그리고 냉전전략이다.
2차대전으로 미국은 세계 총생산의 반을 차지하는 경제적인 초강대국이 되었다. 흔히 뉴딜이 미국 자본주의를 공황에서 구해냈다고 말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2차대전이 미국경제를 살렸다.
저자는 "전쟁은 자본이득을 증가시켰으며 투자기회를 확대하면서 고용문제나 경제난이 전쟁으로 한방에 해결되었다"면서 "더구나 자기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니 인명손실을 제외하고는 별로 손해본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2차대전 개입후 미국은 전쟁호황에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면서 "이 전쟁으로 미국사람들은 전쟁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표현한다. 게다가 파시즘을 멸망시켰다는 명분도 얻었으니 그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면서 "그래서 미국인들은 2차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후 유럽복구를 위한 마샬플랜, 냉전적 봉쇄전략, 그리고 트루먼의 한국전쟁 개입 결정은 패권을 유지하고 미국 경제를 구제해준 가장 '현명하고 탁월한 사업'"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중에서 유럽자본주의를 안정시키고 유럽을 미국의 안정적인 시장으로 확보한 마샬플랜이야말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해준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2,3년이 지나자 벌써 미국경제의 성장둔화 조짐이 나타났다. 실업자가 다시 증가하였으며, 기업이윤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위기의식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 집단은 바로 전쟁의 특수경기가 계속되리라 기대했던 대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점차 트루먼 정부를 압박해댔다. 시장을 확대하고 남아도는 자본을 수출해야 할 필요성이 다급해진 것이다.
그들이 볼 때 만약 유럽시장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유럽의 심각한 경제상태를 틈타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면 미국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차단하고 유럽경제를 회복한다는 거창한 구호 아래 마샬플랜이 추진되었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냉전이었다.
결국 전면전을 벌이지 않더라도 '전쟁준비를 일상화하는 것'이 미국 자본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공산주의라는 적과의 전쟁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생명력', 즉 미국 경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한국전쟁은 바로 울고 싶은 아이의 뺨을 때려준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은 미국 자본주의의 희생양"**
1949년부터 이미 미국의 전후 호황은 끝나고 경제는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투자는 감소하고 실업률은 7.6%로 올랐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경제가 회복되었다. 2003년 3월 부시가 이라크를 침략하고 나서 그러했듯이 당시 월스트리트의 주가는 연일 상종가를 쳤다. 한국전쟁으로 도산위기의 군수산업이 돌아가고, 실업자들에게 좋은 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지 5년밖에 안된 시점이라 전쟁의 즐거운 기억이 정치인들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자, 혈육의 죽음과 이산의 고통을 의미하는 우리로서는 정말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진실"이라고 말한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윌리엄 스튜어크 미 조지아대 교수는 "한국전은 미소간 3차대전의 대리전"이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곳에서든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며, 남북한은 세계자본주의, 정확하게는 미국 자본주의가 다시 굴러갈 수 있도록 희생양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미 외교문서의 상용구 '결정적 이해'의 비밀**
저자는 미국의 국방.외교문서, 미국의 정치인.언론인들의 연설이나 논문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결정적 이해'(vital interest)라는 용어가 바로 미국 자본주의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사업가의 투자처이며 이윤의 원천이다.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이 위험하다는 주장은 일본시장, 그리고 미국의 대리자로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아시아 시장을 뺏길까 두렵다는 의미다. '결정적 이해'라는 것은 미국시민들이 안전한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이고, 좀더 구체적으로 미국기업이 돈을 버는 문제이다.
미국에 적이란 곧 실제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시장경제, 자본주의적인 사유재산제도, 미국기업의 활동, 미국식 생활방식을 의심하거나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미국 내외부의 세력들이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사업인 전쟁은 영토 점령이 목적이 아니다. 8.15 해방 후 친미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당시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일본과 달리 미국은 땅이 크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므로 우리의 영토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따라서 우리를 도와줄지언정 침략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저자는 "조병옥이 말한 것처럼 미국이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는 나라인 것은 틀림없다"면서 "미국은 자유를 국가의 존립근거로 하는 나라이고 남의 땅을 직접 점령해 억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나라"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세계경영의 사상적 기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전염력이 강한' 자유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자유의 실제내용은 그리 간단치 않다.
미국은 북아케리카 대륙을 횡단하여 태평양에 닿은 다음부터 점점 전세계를 자신의 자유주의,시장경제, 그리고 기독교의 땅으로 만들 생각을 품었다. 물론 그 당은 법적으로는 그곳 주민들이 통치하고 관리하게 되어 있다. 미국은 단지 그 영토에서 나는 자원과 노동력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자기나라 자본을 자유롭게 투자하여 영리활동을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미국의 투자처, 즉 '자유'라는 관념을 전파하기 위한 선교의 대상이자,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자유세계'로 변할 수 있는 잠재적 영토다. 미국 정부의 외교담당 부서 명칭이 국무부(State Department)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제국'인 미국이 입장에서 볼 때 내정과 외치는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40여년만에 극우가 득세**
그러나 저자는 현재 미국은 지난 매카시즘이 횡행했던 1950년 이후 40여년만에 다시 신매카시즘의 극우세력이 득세한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단지 그들이 지목하는 미국 내외부의 적이 공산주의에서 테러리즘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파시즘은 나라 안에서는 국가와 대자본이 결합한 군사주의 체제이며, 대외적으로는 전쟁 도발 체제였다. 9.11 테러를 이용한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예방 공격론'은 사실 북한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슬람 국가에 대한 전쟁 선포라는 것이다.
"우리 편인가, 테러 편인가"라는 이분법은 파시즘이나 폭력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언사이다. 과거의 매카시즘이 주로 미국사회의 내부에 영향을 미쳤다면, 부시의 신매카시즘은 온세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그동안 미국이 세계에서 지도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희망과 이상을 인류에게 줄 수 있었기 때문인데, 9.11 이후 미국은 그러한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적나라한 자기이해만을 내세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미국 내부에서도 상위 1%가 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면서 심각한 내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면서 "시장과 국가는 인간에게 따를 것을 요구할지언정, 공동체와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를 가르치지 않는다"면서 미국식 자본주의하의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저자는 "지금부터라도 미국이 만들어놓은 표준에서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켜야 한다"면서 "지난 백년 동안 잊고 있던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분단과 적대의 벽을 허물고 세계 다른 지역 사람들과 이웃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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