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중국 환경문제를 거론할 때, 지금 보이고 있는 현상과 사실 위주 관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 없고, 어제 없는 오늘 없으며, 오늘 없는 내일 없다. 우리는 중국 환경문제를 역사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특히 1949년 10월1일 국민당 대륙 패퇴와 공산당 대륙 석권을 뜻하는 신중국 성립부터 벌어진 중국 현대사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의 중국 환경 문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서는 중국 환경문제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 3개와 중국의 공업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대연강철, 4개월 동안 철강 6백만t 생산해**
1949년 공산당은 대륙을 제패하며 부패하고 무능한 국민당에 등을 돌린 민주계열 중간파를 흡수했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 시절 그렇게 민주와 언론자유를 외치며 국민당을 비판했던 공산당이 오히려 국민당보다 더 철저하게 사상통제를 하자 민주계열 중간파는 회의를 느꼈다. 이 과정에서 모택동은 일방적인 사상억압 위주의 정책에서 탈피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芳 百家爭名)'을 1956년 교시했다.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문화예술이 꽃피고 사상백가가 나온 것처럼, 신중국도 이제 자유롭게 비평과 토론을 해서 문화수준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에 따라 석 달 동안 공산당 중국에 언론자유가 있었다.
처음엔 민주계열 중간파들이 토론회를 열어, 오직 공산주의 선전만으로 가득한 연극·영화 사조를 비판했다. 모택동도 처음엔 이를 지지했다. 그런데 세상만물이란 관계와 연이 없는 것이 없는 법인지라, 결국 정치비평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심지어 당시 중국 신문 사설에 이런 말도 나왔을 정도다. "이것은 독재다"
모택동은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 석 달 동안 언론자유를 마음껏 누린 언론인과 학자와 민주계열 인사들을 영장도 없이 하루아침에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 숙청했다. 이를 중국현대사에서 '반우파투쟁'이라 한다. 이와 동시에 모택동은 인민의 집단역량으로 모든 외부 객관조건을 극복하기로 결정했다. 더욱 철저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중국을 실현하기 위해 인민공사운동을 벌였다. 모든 사유재산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전 인민을 인민공사 (人民公社) 하부 조직원으로 묶어 자급자족·자력갱생·공동생산·공동분배라는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심지어 만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정말 중국에서 벌어졌다. 이것이 대연강철(大煉鋼鐵)이다.
<사진 1> 1966년 신강성(新疆省) 생산건설병단(生産建設兵團)이 천산(天山) 남북에서 개간하는 모습.
1958년 8월 중공 중앙은 북대하(北戴河)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가 전 당 전 인민에게 강철 1070만t 생산을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한다(中共中央政治局擴大會議號召全黨全民爲生産1070萬吨鋼而奮鬪)"는 회의공보를 발표했다. 공보는 1958년 철강 생산량을 1957년 5백35만t의 두 배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북대하 회의 이전 중국이 그 해 생산한 철강은 4백50만t에 불과했다. 중국이 당시 처한 현실 조건을 보면 4개월 이내에 철강 6백20만t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 강철 만들기 열기가 퍼졌다. 1958년 7월말 강철전선 노동력은 몇십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8월말 몇백만으로 불어나더니, 9월말 5천만 명으로 늘어났고, 10월말 6천만 명, 1958년 말 무려 9천만 명이 강철 만들기 운동에 뛰어들었다. 용광로도 늘어났다. 소형 용광로가 7월 3만개, 8월 17만개, 9월 60만개, 10월 몇 백만 개에 이를 지경이었다. 제철용 초탄(焦炭)이 부족해 일반 석탄으로 대체했고, 일반 석탄이 부족해지자 나무를 베어 불을 지폈다. 고품질 철광석이 부족해 저품질 철광석으로 대체했고, 저품질 철광석마저 부족해지자 집에서 쓰는 철기그릇까지 다 쏟아 부었다. 1958년 겨울, 중국은 강철 1천1백8만t, 생철 1천3백69만t을 생산, 목표 초과 달성을 정식 선포했다. 북대하 회의가 제출한 철강생산 과업을 '완전 달성'했다.
대가는 엄청났다. 강철 1천1백8만t 중 8백만t만이 합격이었다. 나머지는 물론 불합격이었다. 생철 1천3백69만t 중 아무 쓸모없는 토철(土鐵)은 무려 4백16만t을 차지했다. 당연히 경제적 손실이 엄청났다. 이와 함께 '대연강철'을 위해 전국 수천만 명이 숲을 마구 없앴고,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생태 파괴를 일으켰다. 현실적이고 잠재적인 손실은 이보다 훨씬 더 크며, 지금도 정확한 손실계산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삼선건설, "전쟁 대비해 협곡에 공장을 지어라"**
삼선건설(三線建設)도 놓칠 수 없는 사건이다. 1964년 하반기, 당시 국제 정세에 따라 중국 정책 결정자들은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상을 제출했다. 같은 해 8월21일 국가건설위원회(國家建委)는 북경에서 '이전(移轉)회의'를 열고, 1966~1970년 이전 항목과 "넓게 분산하고 작게 집중하라(大分散, 小集中)"는 원칙을 제정했다.
특히 전쟁에 대비해 공업 분포를 크게 안배 받았다. 에너지설비·원자재설비·기계공업·전자공업·화학공업·군수공업은 체계적으로 연해 지역에 한 부분, 삼선 지역에 한 부분씩 들어갔다. 삼선이란 중국 전역을 위에서 아래로 줄을 그어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이다. 동부 연해 지역이 일선(一線), 중부가 이선(二線), 중국 서남부인 사천성(四川省)·귀주성(貴州省)·운남성(雲南省)이 삼선(三線)이다. 또 각 성과 시·현·자치주별로 일선·이선·삼선으로 나눈다.
삼선건설은 결국 심각한 환경오염을 야기시켰다. 삼선건설이 강조한 "분산한다, 산을 낀다, 은폐시킨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分散, 靠山, 隱蔽, 進洞)"는 방침은 공업생산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이 좁은 협곡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당시에는 환경문제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었고, 유해물질을 처리하기 위한 정화시설을 만들 자금과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다량의 유해물질의 배출은 불가피했다. 특히 은폐지의 자연정화능력은 매우 약했기 때문에 삼선건설이 환경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컸다. 특히 공업지역을 무차별로 확산시키면서 미개발 청정 지역을 오염에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문화대혁명, "중국 환경에도 큰 상처로 남아"**
대연강철, 삼선건설과 더불어 오늘날 중국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사건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그 유명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만성화된 저발전과 심각한 자연재해와 기근이 닥치면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에 모택동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특히 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는 헐벗은 산야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농민을 눈으로 확인하며 현실을 직시했고, 당시 등소평(鄧小平)이 "우리가 10년 동안 좌(左)로 치우쳤으니 이제 조금 우(右)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며, 사천성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격언을 내세웠다. 이것이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결국 공산당 내부 비판을 견딜 수 없어 모택동은 '7천인 대회'를 계기로 국가 주석을 사임했고 오늘날 중국인의 존경을 받는 유소기가 국가 주석을 승계했다. 모택동은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을 놓지 않았고, 유소기를 비롯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지금의 시점에서는 최악의 방법을 동원했다.
<사진 2> 모택동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을 동원했다.
공산 중국 성립 이후 태어나 철저한 사상교육으로 무장 받은 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들을 동원한 것이다.이것이 1966~1976년 문화대혁명의 발단이다. 모택동은 당 내에 존재하지도 않는 "부르주아 노선을 걷는 자본주의자들을 타파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피 끓는 홍위병(紅衛兵)들을 선동, 인민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한 훌륭한 당원들을 숙청했다.
1966년 홍위병은 "사구(四舊)를 타파하라"는 교시를 받았다. 사구란 4가지 폐습이란 뜻이고, 이 4가지 폐습이란, '구문화(舊文化)' '구사상(舊思想)' '구풍속(舊風俗)' '구습관(舊習慣)'을 가리킨다. 홍위병들은 이 교시에 따라 교수ㆍ교사ㆍ문화예술인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온갖 구실을 내세워 고문하고, 때리고,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물론 이 안에는 모택동의 정적들도 대거 포함돼 있었다.
<사진 3> 교수ㆍ교사ㆍ문화예술인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온갖 구실을 내세워 고문하고, 때리고,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벌어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이는 중국사회 모든 방면에 끼친 일대 재난이었다. 잘못된 정책 지도 아래 공업은 철강을 근본으로, 농업은 식량을 근본으로, 모든 지방은 전쟁준비를 위해 자력갱생으로, 이렇게 한 결과는 생산구조를 단순화·기형화시켰을 뿐 아니라 자원낭비와 환경문제를 대량 발생시켰다.
공업 자력갱생을 도모하기 위해 많은 도시가 공해산업을 부적당하게 배치했다. 예를 들어 북경(北京)·항주(杭州)·소주(蘇州)·계림(桂林)·제남(濟南)·서안(西安)·낙양(洛陽)·곤명(昆明) 등 도시가 모두 철강·화학·건설자재공업 등 공해산업을 건설했다. 거주밀집지역·문화교육지역·풍경유람지역·수원보호구역 등지에도 마구잡이로 공장을 세웠다. 소형공장도 많이 세웠다. 일반적으로 소형공장은 기술과 장비수준이 낮고 자금투입도 적어 정화능력도 형편없다. 소형공장이 일으키는 환경오염과 생태파괴도 상당히 심각하다.
<사진 4> 문화대혁명 때는 각종 문화유산도 '사구'로 분류돼 파괴됐다.
농업을 보자. 여러 지역이 편협하고 단순하게 식량 생산만 추구했고, 경제작물 재배를 포기했다. 다작경영을 내팽개치고 경작제도를 바꿨다. 비전통 농업 구역에서 호수를 메워 밭으로 일구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함부로 숲과 초원을 없애는 개간을 하는 일도 일어났다. '맑은 1천개 호수(素有千湖)'라는 별명을 지닌 호북성(湖北省)은 원래 1천무(1무=2백평) 이상 넓이 호수가 1천65곳이나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까지 5백곳 밑으로 내려가 수면 면적이 4분의 3이나 줄었다.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파양호(鄱陽湖)는 호수 방파제 3백31개, 호수면적 1백30만무, 보호어종이 번식하는 수면만 78만무였다. 1970년대 후반 이 호수 면적은 39만무에 불과했다.
이밖에 임업지역에서는 나무 위주 정책이 무너지고 식량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인민들은 숲을 훼손하고 개간해 식량을 생산해야 했다. 목축 지역에서는 초원을 파괴해 대규모 농업 지대가 조성됐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목축업을 할 수 있는 초원만 파괴한 것이다.
이런 호수간척·산림훼손·초원개간은 어업·임업·목축업 생산조건을 파괴했고, 토양유실·하류 토사량 증가·토양 사막화·기후실종·자연재해 빈번 등 생태계 평형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사진 5> 모택동의 대형 사진을 들고 환호하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군중.
***"급속한 공업화가 부른 대량 환경 파괴"**
문화대혁명 10년. 중국 환경오염과 생태파괴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부터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이후 10년이 넘는 노력 끝에 중국은 이미 체계적인 공업시스템을 건설했다. 중형·대형 공업 항목 3천개 이상을 건설해, 이미 기본적으로 자체 기술력에 의지하는 광산·발전소·야금·석유화학·자동차·조선 등 중요 공업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성과를 얻으며 지불한 대가도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1989년 전국 공업폐수 방출량은 3백53억t, 약 80%가 아무 처리도 거치지 않고 그냥 강·호수·바다로 흘러들었다. 1988년 지류 5백32곳을 표본측정해보니 4백36곳이 오염되어 있었다. 공업 고체폐기물과 도시 생활쓰레기 방출량이 나날이 증가했다. 이런 모든 폐기물이 도시와 공업지역 교외에 있는 하천에 계속 쌓여 심각한 2차 오염원이 되었다. 유독·유해폐기물 증가도 중국이 짊어져야 할 매우 위험한 잠재적 위험문제다.
공업화에 수반하는 것이 도시팽창에 따른 농지 대량 잠식이다. 신중국 성립 후 30년간 상해(上海)시가 전용한 교외 농지는 1백10만무가 넘는다. 천진(天津)시 면적은 1980년 1백61㎢에서 1986년에는 282㎢로 넓어졌다. 6년간 42.9%를 확장한 것이다. 1986년 대련(大連)시 신개발지역은 3만8천무인데, 이는 원래 도시면적의 30%에 달한다. 도시들은 교외로 넓혀 개발하는 것을 좋아한다. 향진기업이 전용하고 낭비하는 농지도 심각해졌다. 1979~1987년, 10년도 안 되는 사이 전국 향진기업이 전용한 농지는 1억무에 이른다.
***"중국 공산당이 부른 '환경문제'라는 유령"**
모택동과 등소평의 중국정부는 환경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독재 정권 때 일방적인 개발 위주의 정책을 펴면서 환경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우리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는 이미 1970년부터 환경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돼 있다.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한 지 20년만에 부메랑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중국이 체계적인 공업화를 시작한지 이제 20년이 좀 넘는다. 그 이전에도 이미 중국은 대연강철, 삼선건설,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환경에 심각한 손상을 입혀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 공산당의 과오가 지금 '환경문제'라는 거대한 유령을 부르고 있다.
(이 글은 박근형 전 <시민의 신문> 기자와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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