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전국 곳곳의 산과 들에서, 또 지하 깊은 곳에서 시민의 발이 되어 열차를 운전하시는 기관사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과 같은 일을 하는 기관사로서 현재 국토부가 추진하고 있는 운전실 감시카메라 설치 및 운영의 문제점을 고발하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국토부는 2월 12일 국토부 장관 명의로 '철도안전법 시행 규칙 개정안' 입법 예고를 통해 기관차 운전실 즉 기관사 머리위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겠다고 합니다. 이미 현장의 기관차나 전동열차의 운전실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가동 준비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토부는 수년에 걸쳐 추진한 운전실 감시카메라 운영 방침을 확정짓고 마무리하겠다는 일념입니다. 아마도 사정을 잘 모르는 시민들이 보기엔 수 백, 수 천 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기관사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영상기록장치 설치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전실 감시카메라는 열차 안전과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기관사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운전실 감시카메라 설치안을 따라가 보면 국토부 안전철학의 부재와 행정 과잉의 현실과 마주치게 됩니다. 국토부는 감시카메라 설치로 철도 안전이 더 확보될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실제 얻는 효과는 없습니다. 이미 열차 주행 전 과정은 열차 앞에 장착된 카메라로 다 기록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고는 예방이 최선의 길입니다. 전 세계 철도 안전 체계의 발전 과정은 사고를 막아야 한다는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상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감시카메라는 사고 이후, 사고발생 당시 기관사 행동이 적절했는지 파악하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만의 하나 기관사가 정해진 매뉴얼대로 하지 못했다면 영상기록이 처벌의 주요한 근거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철도 안전의 책임을 기관사에게 전가시키는 동시에 사고와 관련된 여러 가지 요인들은 무시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저는 철도안전법 제정과 개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토부 철도 정책 담당자들은 최소한의 안전 철학과 인권적 소양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철도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일반 상식에 기초한 접근을 하다 보니 철도안전법 뿐만 아니라 철도 관련 정책의 상당수가 철도 발전과 안전에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입니다.
만 번 양보해서 철도 안전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이고 특히 열차 운전실에 영상기록장치를 설치해야할 긴박한 문제가 있다면 국토부의 조치를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국 철도의 안전도는 세계 최고수준입니다. 또 기관사의 실수가 치명적인 철도 사고를 유발한 경우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철도·지하철의 안전시스템은 설령 기관사가 실수를 하더라도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보안체제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운전실 감시카메라로 기관사의 행위를 확인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영상장치만 아닐 뿐이지 기관사가 취급한 과정은 운정정보기록장치에 모두 기록됩니다. 운전정보기록장치에는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속도, 신호, 제동 및 비상제동을 비롯해 수십까지 정보가 기록됩니다. 또한 무선 교신 또한 녹취됩니다. 감시카메라가 없어서 사고 조사를 못하거나 사고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국토부 철도국은 철도가 진정으로 안전하고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합니다. 또한 기관사를 비롯해 철도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다 쾌적하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국토부 관료들은 현장의 노동자들을 통제와 관리 대상으로만 간주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기 까지 합니다. 이들의 관료우월주의와 행정우선주의의 종착역은 바로 과잉행정이고 그것의 하나가 바로 운전실 감시카메라 설치인 것입니다.
저는 사실 궁금합니다. 철도 안전에 대해서 어떤 원칙과 철학이 있는지, 철도 안전은 어떻게 확보 될 수 있는지, 국토부 담당자와 공개토론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국토부가 운전실 감시카메라를 설치한다고 했을 때 다른 나라의 사례는 어떤지 살펴보았습니다. 철도선진국들에서는 아예 사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 뉴질랜드에서 시도가 있었으나 사회적 공론화 과정에서 결국 폐기 되었습니다. 선진국의 철도 안전체계는 인간과 시스템이 상호 보완하는 복합안전 체계입니다. 기관사의 오류는 시스템이 방어합니다. 기관사가 신호를 오인하고 잘못 취급했을 때 시스템이 열차 비상 정지를 시키는 것이죠. 기관사가 졸거나 건강이상으로 쓰러져도 운전자 경계 장치를 통해 감지하고 열차를 정지시킵니다. 반면 시스템의 오류로 이상이 발생했을 때는 기관사가 개입해 바로 잡아 안전을 확보합니다.
철도 사고는 선로 등 시설과 차량의 안전도 향상을 기초로 신호시스템의 발전과정에 따라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현재 한국철도 신호시스템은 열차자동보호나 자동운영체제가 적용되는 최신 시스템입니다. 선진국은 자동위성항법장치 및 보다 고도화된 자동보호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시점입니다. 철도 기술 전문가들은 철도 기술 발전추세를 보면 머지않아 무인운전 시스템이 일반화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여는 미래에 없어질 직업 리스트에도 기관사는 상위권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과 시스템의 보완이라는 복합적 철도 안전 시스템 역시 시간이 갈수록 인간의 영역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관사의 머리 위에 카메라를 설치해 감시하겠다는 발상을 철도안전 대책 일환으로 내놓는 관료들의 심장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물론 운전실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나라들도 있습니다. 철도 민영화로 몰락한 남미의 몇몇 나라들입니다. 이들 나라들에선 민간 자본이 '먹튀'를 하는 동안 철도투자 부재로 열차자동보호시스템은커녕 자동 정지 장치조차 누락된 곳이 많습니다. 때문에 오로지 기관사의 판단과 능력에 철도 안전을 맡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민영화 탓에 기관사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합니다. 이러니 감시카메라라도 달아서 기관사에게라도 사고와 배상에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 한국철도 안전정책이 몰락한 남미철도를 쫒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토부 관료들의 발상이 갖는 또 다른 문제는 지극히 행정 편의적이면서 권력남용형이라는 것입니다. 굿이 조지오웰을 불러오지 않더라도 감시카메라라는 빅 브라더 시스템을 추종하는 이들의 행태는 시민이자 노동자는 오직 관리와 감시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선진국의 안전 철학은 어떤지 짚어보겠습니다.
2019년 12월 3일, 벨기에 형사법원에서는 의미 있는 열차사고 관련 판결이 있었습니다. 2010년 바위징엔역 열차충돌로 19명이나 사망한 대형 사고에 대해 근 10년이나 이어졌던 재판 끝에 판결이 났습니다. 정지신호를 오인했거나 무시하고 사고를 유발한 혐의를 받았던 기관사에게는 유죄가 인정됐지만 형사처벌은 하지 않는 것으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검찰은 기관사에게 3년 형을 구형했지만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구형을 철회하고 사실상 무죄라고 했습니다. 검사는 3년형을 구형한 기관사측에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기관사가 신호를 잘못 봐 대형 충돌사고가 났다면 다른 요인은 무시하고 엄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판장의 주요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차 기관사는 안전 체계에서 최후의 연결고리일 뿐, 유일한 보호수단은 아니다"
그럼 벨기에 열차충돌사고의 책임은 누가 졌을까요? 바로 벨기에 철도공사와 시설공단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철도공사와 시설공단에게 충돌사고와 같은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안전시설을 설치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55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사고이후 벨기에 시설 공단 Infrabel 대변인은 "매일같이 철도 네트워크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헌신해 왔으며, 참사 이후 자동 브레이크 시스템이 빠른 속도로 장착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유럽 안전 시스템(ECTS)이 도입되고 있으며, 2025년까지는 전체 네크워크에 설치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국에서 벨기에 같은 열차사고가 났다면 당장 운전실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었을 텐데 벨기에는 안전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한국과 벨기에의 방식 중 어디가 철도 안전에 더 필요한 길 인 것 같습니까?
여기서 잠시 세계 최고의 철도 시스템을 자랑하는 스위스 연방철도가 제정한 기관사 등 현장 노동자 업무의 공정성 가이드라인을 살펴보죠.
위 표에서 보여 지듯 착각, 태만, 소흘 등으로 일어나는 인적 오류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오류를 허용한다는 의미는 이런 오류를 범하라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발생 가능할 수 있으니 시스템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관사는 운행 중 수십, 수 백 개의 신호와 표지 등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전체 운행시간을 초 각성된 상태로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인적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를 방어할 체제를 갖추는 것입니다.
선진국이 철도안전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과 철학은 한국의 관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철도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컨트롤 타워에 잠시 거쳐 가는 한국의 구조적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최소한의 인간적 태도나 인권감수성 조차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국토부가 국가적 사명이라도 되는 듯 감시카메라 설치를 추진할 정도로 한국철도·지하철 안전이 심각한 상황일까요? 앞서 예를 든 벨기에 충돌사고 같은 일은 한국 철도 신호 시스템 상 발생하기 힘듭니다. 철도 지하철 대부분 선로에 장착된 신호보안 시스템은 열차 충돌을 근본적으로 막아주고 있습니다. 중대 철도 사고도 매년 줄어들고 있습니다. 주요 철도 선진국의 사고 유형과 빈도와 비교해도 매우 안전한 철도입니다. 최근 가장 충격을 준 사고는 강릉역 KTX 탈선 사고였는데 이 사고의 원인은 운영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시공 단계에서의 잘못이 국토부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확인되었습니다. 사실 강릉선 탈선사고는 운영과 시설을 분리한 국토부의 상하분리 정책이 유발한 측면도 있습니다.
국토부는 입법예고를 앞두고 3월 23일까지 국토부 장관에게 의견을 달라고 공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기관사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소속 노조에 의견 제시를 요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또한 철도·지하철 노조가 회원으로 있는 궤도협의회를 통해 감시카메라 설치 반대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토부는 반대의견을 접수하더라도 충분히 검토 했다며 개정안을 강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 안전을 위한다면서요.
그래서 기관사들은 국토부에 조건을 내걸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만약 강행 된다면 "전국의 기관사들은 그냥 하루 쉬겠다." 가뜩이나 긴장의 연속인 승무 시간인데 감시카메라 까지 달리면 스트레스 지수가 엄청 높아질 테니 하루라도 쉬면서 고민을 해 보겠다고 정부에 사정하는 겁니다. 쉽게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겠다며 집회 같은 것을 하는 것인데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고 봅니다. 모여서 이야기해도 언론 보도도 안 될 뿐 더러 사회적 반응도 얻기 힘듭니다. 서울역이나 세종시에 모여도 종로나 해운대 사람들은 모였는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요즘 적지 않은 집회들 지루하고 재미도 없습니다. 돈은 많이 들고요.
전국의 지하철 기관사 여러분! 비록 주생활 공간이 지하이지만 우리도 밝은 곳을 지향하는 인간임을 선언합시다. 기생충도 아카데미상을 받았는데 인간인 우리도 숨은 쉬고 싶다고 말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 전국의 철도 기관사 여러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는 현실에서 진짜 철도 안전을 위해 하루쯤은 단체로 쉬는 방안을 모색해봅시다.
국토부가 전체 기관사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면 봄 볕 좋은 날 하루 잡아 모두 조용히 사라집시다. 어디 모이거나 하지 말고 모든 기관사들이 각자 알아서 시립도서관을 가든 낚시를 가든 등산을 가든 명상을 하든 사라짐으로서 우리도 인간으로서 존중 받아야 함을 말합시다. 부재가 존재의 소중함을 알게 할 것입니다. 오늘도 안전운행 하시길 바라며...
한국 철도 기관사 박흥수 드림.
P.S. 김현미 국토부 장관님!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인 줄 알지만 한 때 노동자 편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셨던 적이 있었음을 압니다. 철도 개혁이든 안전 이든 관료들의 말은 충분히 듣고 공감하셨을 테니 현장의 목소리도 들어주십시오. 뭐 워낙 바쁘시다는 것은 알지만요.
P.S. 국토부 철도 정책 담당 분들 너무 과로하시는 것 같은데 워라벨 꼭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가끔은 시나, 소설, 인문학 책도 읽어보시길 부탁드려요. 결제문서나 공문에 치이다 보면 종합영양제로도 회복하기 어려운 결핍이 생깁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같이 독서토론모임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P.S. 4.15 총선에 도전하는 예비 후보 여러분!! 공천 경쟁과 본선을 앞두고 정신이 없으실 테지만,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신다면 정부 관료들이 내미는 각종 법안이나 개정안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 주세요. 개중에는 시민의 이해보다 관료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것들이 꽤 많습니다.
P.S. 이 글을 읽은 기관사 분들께서는 주위 동료 7분에게 반드시 전달해야 합니다. J.F. 케네디 대통령은 7명에게 전달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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