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국주의’에 국제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미국이 저지른 이라크전의 폐해만 하더라도 이제 먼 나라의 얘깃거리가 아니라 우리 생활 깊숙이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지식인이 이러한 미국의 부패한 제국주의에 커다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회비평가로서 내 조국의 운명과 다른 나라들의 운명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책을 쓴다”는 말과 함께 한국 등 전세계 국가 시민들에게 "미국의 지구 유권자(global constituency)"가 돼 달라고 호소하고 나섰다.
책 제목 또한 경고 문구다. <세계여 경계하라-재앙의 제국, 미국의 승리주의자들(WORLD, BEWARE!)>(시어도어 로작 지음/ 구홍표 옮김, 필맥 펴냄).
***‘대항문화’ 개념 만든 로작, 미국의 ‘부패한 제국주의’ 일갈**
언뜻 보면 요새 시류를 타고 나오고 있는 여러 책들 가운데 하나로 치부될 성도 싶다. 그렇지만 지은이가 시어도어 로작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가는 책이다. 시어도어 로작하면 일찍이 1960년대에 젊은이들의 반전, 평화, 자유를 지향하고 타락한 기성 질서와 가치에 반기를 든 문화적 현상을 '대항문화(Counter Culture)'라는 개념으로 파악해내, 전 세계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미국의 저명한 문화사학자다.
그런 그가 현재 미국의 모습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며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로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이런 암울한 예언을 했을 때 유럽은 산업화에 따른 혼돈의 새벽에 있었고, 사회주의 혁명 직전에 비틀거리고 있었으나 “이제 정반대의 유령이 인류를 덮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대부분이 국내정책에서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점점 더 보수화되고 있는 한 나라의 통제아래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인데 “그 나라는 바로 나의 조국인 미국”이라고 로작은 지적하고 있다.
그가 내세우고 있는 명제는 간단하다. “미국은 숭고한 이상을 지킨다는 미명아래 자신과 다른 나라 시민들에게 도덕적, 경제적, 물리적 피해를 주면서도 조금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며 노동자 대중에게 의료보호와 연금제도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만큼 정치적 스펙트럼이 취약한 나라이고 학교, 공원, 상수도, 전력, 심지어는 군대까지 가장 비싼 가격을 부르는 자들에게 팔아버리는 데 혈안인 보수세력이 20여년을 지배해온 나라이며,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넘쳐나지만 거리에서는 수많은 홈리스들이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나라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자유시장의 무정부 상태가 최악의 상태로 치달은 나라”인데 “이런 나라에게 세계의 리더십을 구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또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가 미국의 중동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 말을 전하며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좋은 말로만 할 때보다 총을 들고 이야기하면 더 많은 것을 얻는다.” 럼스펠드가 2003년에 한 이 말은 악명 높은 갱인 알 카포네가 1926년에 한, 바로 그 말이다.
***“승리주의자-코포라도-근본주의자들의 삼위일체, 미 세계패권 추구”**
그렇다면 미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세계패권을 향해 내딛게 됐는가. 저자인 로작은 그 근원을 ‘새로운 삼위일체’에서 찾는다. 서로 수렴하는 세 가지 사회적 힘, 즉 레이건 행정부 이래의 보수주의 부활을 뒷받침해온 돈, 머리, 유권자가 새로운 삼위일체의 세 축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돈’이란 “미국 경제를 지배하게 된 탐욕스러운 기업 지도자”들을 상징하며 이들은 ‘코포라도(corporados)'로 불리운다. 코포라도를 좀더 부연 설명하면 “돈의 힘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중세의 강도귀족에 비견되는 지위를 미국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대기업의 우두머리들”이다.
‘머리’는 미국의 싱크탱크를 지배하고 대학과 언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이 떠오른 군사화된 이데올로그들을 말하며 로작은 이들을 ‘승리주의자’(Triumphalists)라고 부르고 있다. 승리주의자들로 불리우는 이들 초보수 세력은 “다른 나라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동시에 국내의 진보진영을 분쇄하는 데도 골몰하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승리’는 국내 선거에서의 승리와 해외에서의 군사적 우월을 모두 포함한다. 오늘날 신문지상에서 많이 거론되는 ‘네오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마지막으로 ‘유권자’란 물론 모든 일반적인 유권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승리주의자들의 집권을 뒷받침하는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을 일컫는다. 로작은 이에 대해 “지금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 종교집단의 결합은 새로운 초보수 혼합에서도 가장 기괴한 현상”이라며 종말론적 복음주의에 기반을 둔 배타적인 기독교 광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자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로작에 따르면 이들 세 집단은 각기 독특한 의제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 역할의 급격한 변화, 부의 분배의 변화, 세계 경제의 재편, 민주주의의 의미 재정의 등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를 향해 연합해왔다. 저자는 이들을 방치한다면 미국의 21세기판 군산복합체가 일방적인 힘의 행사를 통해 전 세계를 굴종시켜 제국주의 질서를 굳히면서 세계 곳곳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해나갈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승리주의자들 막기에는 미국내 대항세력 역부족”**
그렇다면 이들 각각과 그들의 결합을 미국 내에서 막으면 될 것 아닌가. 로작에 따르면 불행하게도 미국 내에서는 그들의 전횡에 맞설 대항세력의 힘이 충분치 못하다. 대항세력이 충분치 못한 사례들을 실증해내고 있는 로작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이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로작에 따르면 “미국에서 승리주의자들에 맞서는 주요 반대세력은 민주당의 진보적 자유주의 진영이지만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있다.” 우선 미국 진보적 자유주의의 불운은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투표 행태의 인구학적 변화가 낳은 결과다. 그는 특히 ‘선벨트’에 주목하고 있는데 선벨트는 미국 정치를 급격하게 우향우하게 만들었다고 로작은 평가한다.
미국의 선거정치와 관련해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로 새로운 권력기반으로 급부상한 ‘선벨트 지역’이란 버지니아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이어진 곳으로 “2차대전 직후 항공우주산업이나 방위산업 등 주로 군산복합체와 연결된 새로운 투자 유입에 힘입어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무기를 생산하고 노조를 기피하는 제조업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뚜렷한 보수적인 문화를 갖게 됐고 민주당 소속인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인종적 정의를 구현한다는 원칙 아래 법과 선거제도의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함에 따라 인종차별 정책의 전통이 뿌리깊은 남부 지역의 보수적 성향은 더욱 짙어졌다. 아울러 선벨트와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게 되면서 공화당은 점점 더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됐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그는 또 “제도화된 인종차별은 승리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더러운 비밀’”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48개주에서는 투옥된 범죄자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데 37개 주에서는 가석방으로 출소중인 자도 투표권이 없다. 14개 주에서는 전과자들에 대해 영구적으로 투표권을 제한하며 공직 출마도 할 수 없는데 이런 이유에서 약 4백40만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공민권을 제한받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흑인이다. 2000년 대선 당시 가장 문제가 됐던 플로리다주에서는 흑인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투표권이 없었다.
로작은 이와 관련 ‘범산복합체’에 주목한다. 미국의 교도관 노동조합은 정치운동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강력한 로비단체인데 교도관들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공적 피고용자라는 의미에서 생겨난 단어이다. 군산복합체와 마찬가지로 범산복합체는 많은 이권을 갖게되며 재소자 수가 늘어날 수록 그들이 누리는 혜택의 규모가 커진다. 보수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범죄행위로 인해 투표권을 빼앗기는 흑인의 수가 많아지면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게 되는 셈이다.
아울러 저자는 언론의 오락기계화, 정치홍보 업계에 의한 유권자 의식 조작, 현대 기술문명이 초래한 대중적 피해망상증과 무기력증 등으로 인해 미국의 시민의식과 민주주의는 힘을 잃었고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한 채 깊은 침묵에 빠져있다고 본다.
***“승리주의자 패퇴시키려면 ‘지구유권자’ 필요”, 한국서 가장 먼저 출간**
이에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지구유권자(Global constituency)"다. 승리주의자들의 전략은 스스로 억제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이들 승리주의자들을 패퇴시키려면 미국 이외 다른 나라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미국 문제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다른 나라사람들도 미국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한다.
저자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기능장애에 빠진 국제기구의 치료 ▲금융의 사슬을 잡아당김 ▲미국인들을 재교육시키기 등을 제시하고 “미국 정치에 건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어찌보면 다소 무리가 있는 방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국의 패권적 지배력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고정관념을 떨쳐내고 다시 생각해보면, 저자의 세가지 제안은 의미심장하다고 역자는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저자가 이 책을 당분간 미국에서는 발간하지 않고 아시아와 유럽의 4~5개국에서 우선 발간하겠다고 한 뜻도 지구유권자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출판됐다는 것은 그 만큼 한국이 미국 영향력에 가장 많이 좌우되면서도 반면 그만큼 미국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반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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