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올해를 끝으로 반환점을 돈다. 지난달 1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문 대통령이 말한 대로 이미 절반의 임기가 지났을 수도, 이제 반환점일 수도 있다. 그 사이 촛불로 표방된 정부의 개혁은 성과를 내지 못했고, 정권 지지층과 반대층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특히 올해 정부는 대내외 악재에 둘러싸여 갈 길을 잃은 기색이 역력했다. 부동산 폭등과 저조한 경제 성적이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이었던 소득주도성장과 충돌해 민심 이반을 낳았다. 아울러 갈수록 활로를 잃어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대대적인 재정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고, 일각에서는 더 자유주의적 개혁만이 위기 돌파의 묘책이라는 반박도 나왔다. 이 같은 갈등은 지난 10일 밤 겨우 국회를 통과한 512조2504억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으로 일단 결론 지어졌다. 하지만 더 강력한 재정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포퓰리즘 정책의 결과'라는 이른바 '퍼주기 예산' 논란은 내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조국 사태는 집권 세력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다는 평가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조국 사태는 진보 진영과 민주당 지지 층, 젊은 세대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정의당으로 대표된 주류 진보 진영은 이 사태에서 갈 길을 잃었다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즘 정권을 표방한 취임 시기 대통령의 목표와 달리, 정부 임기 내내 커져간 남녀 갈등은 특히 올 한해 들어 여성 연예인의 연이은 자살, 일제 성노예 피해자 문제가 야기한 한일 갈등과 이에 대한 정부 대처를 비판하는 여성계의 목소리,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의 주류 인터넷 문화 등과 맞물려 폭발하는 양상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캠페인은 특히 올해 '타다 논쟁'으로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표방한 정부는 톨게이트 노조 등의 문제에서 어떤 리더십도 보이지 못했다. 그 사이 특히 친재벌 노선으로 전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정부를 향한 노동계의 배신감이 올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구적 위기가 된 환경문제, 곧 기후위기 문제는 올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은 한국에서도 대규모 길거리 시위를 열어 정부를 압박했고, 미세먼지 문제는 올해도 한국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정부는 기후위기 문제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해 이 문제를 우려하는 이들의 실망을 샀다.
현 정부에 반환점 이후, 곧 남은 임기가 특히 중요한 까닭이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프레시안>은 특히 경제, 노동, 여성, 환경, 진보의 다섯 분야에 관해 각 분야 전문가와 인터뷰를 준비했다. 여태 문재인 정부의 해당 분야 정책을 어떻게 보았는지,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했다.
최근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서해문집 펴냄)를 내기도한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현재 진보진영이 문재인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이유를 두고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오면서 만들어진 민주연합세력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문재인 정부 하에서 진보진영이 나가가야 할 방향은 민주연합세력과의 결별에 있다고 설명했다.
아래 그와의 인터뷰 내용.
"진보진영. 문 정부 개혁 후퇴에도 무력한 모습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 : 많은 이가 문재인 정부를 '촛불 정부'라고 칭한다. 스스로도 이를 자임하고 있다. 그러한 문 정부도 집권 2년 반을 지났다. 전환점을 돈 셈이다. 여러 의견이 분분하나, 상당수가 현 정부에서 집권 초기 약속했던 내용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기에는 진보진영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개혁적 성향이 옅어질 때, 이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세력이 진보진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판과 견제에 취약한 진보진영이 있었던가 싶다. 10여 년 전, 민주당 세력이 집권했을 때 보여주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다.
장석준 : 이 말부터 먼저 해야 겠다. 현재의 진보진영은 문재인 정부에 착시효과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이 9년 정도 야당으로 있으면서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정책이나 입장을 상당수 수용했다. 그것에 대한 착시효과를 아직 가지고 있다. 사실 과거 민주당 계열 정치세력이 집권하면, 집권 전 내세웠던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문제는 진보진영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듯하다.
이러한 생각을 더 부추긴 건, '촛불 항쟁'이다. 비일상적인 계기를 통해, 그리고 조기대선을 통해 정권이 들어섰기에, 촛불연합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권을 자임했기에 뭔가 진지하게 개혁에 임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선, 지방선거, 그리고 2020년 총선으로 이어지는 3대 선거까지는 촛불연합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그래서 진보진영 내부에서 문재인 정부에 몰비판적인 자세가 있었다. 그것이 진보진영이 문 정부의 개혁이 후퇴해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프레시안 : 톨게이트 수납원 점거농성을 보면, 10년 전 이랜드 사태가 생각난다. 당시 대규모 정리해고를 진행한 이랜드는 사기업이었고, 그렇게 정리해고를 해도 법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현재 톨게이트 수납원 사태는 한국도로공사, 즉 공기업이 문제해결의 키를 쥐고 있다. 게다가 대법원에서는 이들이 정규직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도 현 정권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수납원 점거농성 관련해서 진보진영에서 이 문제를 풀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이랜드 때,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총력을 기울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장석준 : 아까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그런 착시효과, 내지는 안이한 생각들이 바뀌고 있다. 최저임금과 탄력근로제 등 노동현안이 후퇴하면서 문재인 정부를 연대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조국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국 사태 이후에도 진보진영 내에는 여전히 현 정부에 기대를 거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정리하자면, 지금은 진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던 서로 다른 세력들이 확연하게 다름을 드러내고 있는 시기라고 본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장석준 : 촛불연합이 분리된 것이다. 한 축으로는 여전히 촛불연합, 즉 민주대연합 시각에 있는 세력, 그리고 또 다른 한 축에는 민주대연합과 결별해야 한다는 세력, 이 두 세력이 진보진영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프레시안 : 하나하나 이야기해보자. 민주대연합 세력은 여전히 문재인 정부와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장석준 :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시효를 상실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020년 총선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국회에서 활개치고 다니지 않는가. 그렇기에 민주대연합의 필요성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해봐야 한다. 이미 신자유주의 파고를 한 차례 겪은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질서 자체를 의문시해야 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진보진영은 이러한 국면에서 새로운 의제나 근본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사회 변혁을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보다는 여전히 민주대연합 구도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맞지 않는 목소리를 낼 경우, 차단한다. '우선은 이것이 급하다'는 이유다. 그렇다보니 근본 의제를 이야기하는 세력과는 격돌할 수밖에 없다. 이 두 세력은 정리되긴 어렵다고 본다. 분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진보진영에 묶여 있었지만, 같은 '진보'가 아니었던 셈이다. 간판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이명박근혜' 정권의 지난 9년 간, 한국 사회의 후퇴를 막기 위해 뭉쳐 있던, 즉, 공공의 적을 막거나 제어하기 위해 모여졌던 힘이 이제는 분산할 때가 됐다는 건가.
장석준 : 지난 정권들은 한국 사회를 10년 이상 후퇴시켰다. 이들 정권에 맞서다 보니,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맞서는 의제 자체도 세계사 시간과 비교해 상당히 후퇴된, 뒤쳐진 그런 것들이었다.
프레시안 : 4대강 사업, 부자감세 등이 대표적일 듯하다.
장석준 : 신자유주의 위기를 겪은 세계는 2010년부터 신자유주의 이후 질서를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2010년 당시 한국은 신자유주의 전성기 시대에 시계가 멈춘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다. 당시 의제는 이를 몰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6년~2007년에는 사회 의제에 관한 담론이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석준 : 당시의 한국 사회 진보 담론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앞선 측면이 있었다. 특히 2008년 광우병 촛불 때는 여러 다양한 담론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촛불 실패 이후, 모든 담론과 의제들이 민주대연합론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명박근혜'를 몰아내는 게 최우선이라는 담론으로 정리됐다. 그래서 이른바 저항세력이나 민주세력, 그리고 진보세력조차도 세계사 시간에 뒤처지게 됐고, 그런 현실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연합, 반 자유한국당만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프레시안 :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됐을 때, 그래도 그간 민주정부가 만들어놓은 민주적 절차 등을 후퇴시키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순진하게 느낄 정도로 후퇴됐다. 이 공포심이 매우 크다. 진보진영이 쪼개져 있으면 다시 그때처럼 제2의, 제3의 '이명박근혜'가 나타나 다시금 사회를 후퇴시킬 거라는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장석준 : 다시금 단순히 반 자유한국당이라는 안티 정체성 속에 다 합친다고 연합 질서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 시대에 맞게 기민하게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만 다양한 세력들의 연합이 유지가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연합을 유지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되레 연합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 :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연합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586세대라고 할 수 있나.
장석준 : 세대론 보다는 중산층론이 더 맞는 듯하다. 중산층은 이미 현재의 안 좋은 경제 상황에서도 경제적 이해를 일정 충족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경제적인 이슈는 급선무가 아니다.
프레시안 : 경제적으로 충족되면, 정치를 돌아보게 되는 듯하다.
장석준 : 그렇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슈가 중요하다. 특히 자유한국당을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말이 안 되는 행동과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을 청산하려면 다시 촛불 광장 같은 만남의 공간을 열고, 다수의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연합전선을 펼치는 데에는 비정규직도 필요하고, 젊은 세대도 필요하다. 쇠락해가는 지방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대연합을 형성하려면 반 자유한국당만을 부르짖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이며, 기후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비정규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를 억압하고, 중요하지 않다며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이런 행보를 보여 온 게, 즉 촛불광장에 형성됐던 연합을 계속 깎아온 게,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세력들이다. 세대로는 586세대이고, 계층으로는 중산층이다.
프레시안 :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화두는 상당히 많다. 특권층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이를 담론으로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검찰 개혁이 우선이기에 나머지는 후순위로 밀리는 식이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과거 민주노동당은 선거에서 '부유세'를 담론으로 던졌다. 논쟁을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지금은 그런 식의, 즉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없는 듯하다.
장석준 : 구조적 문제가 있다. 민주당이야 정체성과 지향이 그렇기에 바뀌길 기대하기 어렵다. 남은 건 진보진영인데, 여기도 쉽지는 않다. 진보진영의 대표격인 원내정당 정의당이나 노동자를 대표하는 민주노총을 이야기해보자. 현재 이곳에는 아까 언급한 '민주대연합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으로 공존한다. 이는 한국 사회 구조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장석준 : 단순히 말해, 민주노총 내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고, 대기업과 영세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이 있다. 정의당 내에도 민주노총의 조직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교차 지지하는 층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정규직, 대기업, 민주당지지)의 정서는 우리 사회의 범 중산층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
프레시안 : 민주노총 내에 있지만, 서비스연맹 소속 청소노동자와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노동자간 정서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장석준 : 정의당이 '조국 찬성'이냐 '반대'이냐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건, 이러한 객관적인 토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문제는 이러한 토대는 진보진영의 구조적 문제이기에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과의 연대 내지 협조가 체질화된 듯싶다"
프레시안 : 현재처럼 분열된 세력이 공존하는 방식, 그리고 범 중산층 정서로 귀결되는 정체성은 개선돼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장석준 : 진보진영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겠다는 자기 입장을 분명히 정하지 않으면, 지금의 기성 진보세력들이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당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이 진보정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앞으로 명확한 노선 계획이다. 어느 세력을 어떤 식으로 세력화하고 연합을 구축해 개혁의 힘으로 가져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내년 총선 때 무엇을 이야기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민은 없고 개방형 경선제와 같은 이벤트성 이야기만 하고 있다.
프레시안 : 지금의 정의당에서는 원내교섭 정당 의석수를 만들려고 하는 모습 말고는 보이는 게 없는 듯하다.
장석준 : 이해는 된다. 어쨌든 진보정당 운동 역사에서 선거법 개정이라는 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패스트트랙 처리까지 민주당과의 원내 연대를 이어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난 9년 동안 단단하게 쌓아온 민주당과의 연대 내지는 협조가 체질화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프레시안 : 야성의 DNA가 아니라 원내 교섭의 DNA로 변화된 듯하다.
장석준 : 그러한 체질을 개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무엇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장석준 : 책임 있고 진지한 정치세력이라면 현 정권의 우클릭 내지는 재벌친화적인 행보를 정확히 잡아내고 대응해야 한다. 이제는 민주당과 연합이 아니라 경쟁으로 가야하며 필요하면 사안별 제휴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세력 대 정치세력으로 견제하고 대립하는 국면으로 넘어가야 한다.
프레시안 : 진보진영에서는 그런 사안별 제휴 등을 총선 이후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총선 이후에 가능할까 싶다. 아까 언급했던 지난 9년 간 만들어진 DNA가 이후에도 유지되는 게 아닌가 싶다.
장석준 : 총선이라는 게 하나의 과정이다. 총선 전에, '우리가 어떤 정치 행위를 하겠다'는 것을 밝히고 그에 따라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심판을 받는다. 만약 총선에서 유의미한 의석수를 얻는다면 총선 전에 밝힌 '어떤 정치 행위'를 하도록 위임을 받는 식이다. 그렇기에 지금 총선 이후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결정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총선 이후, 뭔가를 결정해서 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내가 볼 때는 선거법만 정리되고 나면,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그 시기에 정의당이 시대상황과 맞지 않는 입장을 택한다면, 총선에서 민심은 정의당을 버릴 수도 있다. 새로운 진보 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프레시안 : 2008년 광우병 촛불, 김진숙 희망버스 등을 지켜본 느낌으로는, 진보진영이라는 시스템이 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날것이면서도 필요한 담론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어느 곳에서도 담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는 듯하다. 이걸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원내로 들어와서 '어떤 정치 행위'를 하겠다고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듯하다.
장석준 : 촛불 등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의 사람들이 계속 집행라인을 잡고,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인물의 문제가 아니다. 선거법 개정이 그나마 정의당이 역사에 봉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새로운 세력 진출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게 선거제도, 정당제도다. 거기서 선거법 개정은 파열구를 만드는 것이다. 정의당 자신이 미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해도, 미래의 주체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여는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쉽지 않은 듯하다.
장석준 : 이런 걸 계속 막으면 혁명이 일어나든가, 사회가 망하든가 할 것이다. 임계점에 온 듯하다.
프레시안 : 일례로 20대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는 게 모두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도 '중요하지만 난 모르겠다'는 식으로 있는 듯하다.
장석준 : 말로만 젊은 세력들이 진출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쇼윈도 마네킹'처럼 진출시키다 보니 그런 것이다. 실제로 젊은 세력들이 진출하게 하려면 기존 결정권자들이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물러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 않나. 자기네들이 물러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오도록 해야지, 자기네들은 그대로 있으면서 보여주기 식으로 픽업해서는 안 된다.
"진보정당, 기성 문법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프레시안 : 세대교체론 이야기 나올 때 나오는 이야기가 리더십, 경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기존 인물들은 젊은층이 주도권을 쥐면 조직이 망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장석준 : 모든 문제를 지난 세대의 퇴장으로 환원해서 이야기하면 매우 편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건 뻔하다.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어떤 종합 대책을 가져가든, 구 세대 지도층이 적절하게 퇴장해야 한다는 내용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퇴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건 분명히 지적하고 따끔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프레시안 : 40대 기수론 이야기도 나온다.
장석준 : 세대가 지체되니 40대 기수론이 나오는데, 정확히 이야기하면 20대 30대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기후 위기 등은 세대적으로 더 내려갈수록 해결 능력과 의지가 강하다.
프레시안 : 당사자성이 중요한 듯하다.
장석준 : 당을 이끄는 사람 가운데 집을 소유한 사람, 남성, 수도권 거주자, 대졸자, 나이든 사람 등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프레시안 : 그렇기에 부동산 문제나 기후 문제 등은 후순위가 되는 듯하다. '니 의견이 맞는데, 시급한 거는 검찰 개혁이다' 이런 논리가 되는 듯하다.
장석준 : 이는 지금 한국 정치 지형을 이끌어가는 세력들의 심각한 문제다.
프레시안 : 그래서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듯하다.
장석준 : 어느 한 곳에서라도 조직 내 목소리 중심이 새로운 쪽으로 이행되어가는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신선한 바람이 불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뀌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안 보인다. 정의당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심상정 의원이 당 대표를 하면서 의원도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 의원 지역구인 고양시는 잘 닦여진 곳이다. 그곳에 심 대표 대신 젊고 참신한 새 후보를 출마시킨 뒤, 당선하도록 하는 사례를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매우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라는 게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지금 진보진영의 리더십은 그런 스토리를 만드는 것에서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아름다운 스토리가 나왔으면 한다.
프레시안 : 원내에 진출한 진보정당 정치인들을 보면, 기존 정치인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장석준 : 어느 특정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보진영이 원내진출 15년이 넘으면서, 각자 정치에 닳고 닳았다. 정치를 잘 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중 정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대중을 만족시킬 정치를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동안 익숙해온 원내 정치, 이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여의도 정치다. 그것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본인은 대중 정치라 생각하지만, 언론만 바라보는 정치, 타당 의원과의 협상만을 바라보는 정치에 갇혀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때다.
프레시안 :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원내 교섭단체 지위를 얻었다고 해도,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장석준 : 이건 단호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원내진출 할 때의 포부는 새로운 정치 문법을 만들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원내 진출 15년이 지나면서 굉장히 세련되고 진화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새로운 문법을 만들기 보다는 기성 문법에 포로가 되어버렸다. 철저한 성찰이 필요하다.
특히 올해 정부는 대내외 악재에 둘러싸여 갈 길을 잃은 기색이 역력했다. 부동산 폭등과 저조한 경제 성적이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이었던 소득주도성장과 충돌해 민심 이반을 낳았다. 아울러 갈수록 활로를 잃어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대대적인 재정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고, 일각에서는 더 자유주의적 개혁만이 위기 돌파의 묘책이라는 반박도 나왔다. 이 같은 갈등은 지난 10일 밤 겨우 국회를 통과한 512조2504억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으로 일단 결론 지어졌다. 하지만 더 강력한 재정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포퓰리즘 정책의 결과'라는 이른바 '퍼주기 예산' 논란은 내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조국 사태는 집권 세력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다는 평가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조국 사태는 진보 진영과 민주당 지지 층, 젊은 세대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정의당으로 대표된 주류 진보 진영은 이 사태에서 갈 길을 잃었다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즘 정권을 표방한 취임 시기 대통령의 목표와 달리, 정부 임기 내내 커져간 남녀 갈등은 특히 올 한해 들어 여성 연예인의 연이은 자살, 일제 성노예 피해자 문제가 야기한 한일 갈등과 이에 대한 정부 대처를 비판하는 여성계의 목소리,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의 주류 인터넷 문화 등과 맞물려 폭발하는 양상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캠페인은 특히 올해 '타다 논쟁'으로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표방한 정부는 톨게이트 노조 등의 문제에서 어떤 리더십도 보이지 못했다. 그 사이 특히 친재벌 노선으로 전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정부를 향한 노동계의 배신감이 올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구적 위기가 된 환경문제, 곧 기후위기 문제는 올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은 한국에서도 대규모 길거리 시위를 열어 정부를 압박했고, 미세먼지 문제는 올해도 한국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정부는 기후위기 문제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해 이 문제를 우려하는 이들의 실망을 샀다.
현 정부에 반환점 이후, 곧 남은 임기가 특히 중요한 까닭이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프레시안>은 특히 경제, 노동, 여성, 환경, 진보의 다섯 분야에 관해 각 분야 전문가와 인터뷰를 준비했다. 여태 문재인 정부의 해당 분야 정책을 어떻게 보았는지,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했다.
최근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서해문집 펴냄)를 내기도한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현재 진보진영이 문재인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이유를 두고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오면서 만들어진 민주연합세력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문재인 정부 하에서 진보진영이 나가가야 할 방향은 민주연합세력과의 결별에 있다고 설명했다.
아래 그와의 인터뷰 내용.
"진보진영. 문 정부 개혁 후퇴에도 무력한 모습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 : 많은 이가 문재인 정부를 '촛불 정부'라고 칭한다. 스스로도 이를 자임하고 있다. 그러한 문 정부도 집권 2년 반을 지났다. 전환점을 돈 셈이다. 여러 의견이 분분하나, 상당수가 현 정부에서 집권 초기 약속했던 내용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기에는 진보진영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개혁적 성향이 옅어질 때, 이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세력이 진보진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판과 견제에 취약한 진보진영이 있었던가 싶다. 10여 년 전, 민주당 세력이 집권했을 때 보여주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다.
장석준 : 이 말부터 먼저 해야 겠다. 현재의 진보진영은 문재인 정부에 착시효과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이 9년 정도 야당으로 있으면서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정책이나 입장을 상당수 수용했다. 그것에 대한 착시효과를 아직 가지고 있다. 사실 과거 민주당 계열 정치세력이 집권하면, 집권 전 내세웠던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문제는 진보진영에서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듯하다.
이러한 생각을 더 부추긴 건, '촛불 항쟁'이다. 비일상적인 계기를 통해, 그리고 조기대선을 통해 정권이 들어섰기에, 촛불연합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권을 자임했기에 뭔가 진지하게 개혁에 임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선, 지방선거, 그리고 2020년 총선으로 이어지는 3대 선거까지는 촛불연합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그래서 진보진영 내부에서 문재인 정부에 몰비판적인 자세가 있었다. 그것이 진보진영이 문 정부의 개혁이 후퇴해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프레시안 : 톨게이트 수납원 점거농성을 보면, 10년 전 이랜드 사태가 생각난다. 당시 대규모 정리해고를 진행한 이랜드는 사기업이었고, 그렇게 정리해고를 해도 법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현재 톨게이트 수납원 사태는 한국도로공사, 즉 공기업이 문제해결의 키를 쥐고 있다. 게다가 대법원에서는 이들이 정규직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도 현 정권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수납원 점거농성 관련해서 진보진영에서 이 문제를 풀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이랜드 때,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총력을 기울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장석준 : 아까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그런 착시효과, 내지는 안이한 생각들이 바뀌고 있다. 최저임금과 탄력근로제 등 노동현안이 후퇴하면서 문재인 정부를 연대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조국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국 사태 이후에도 진보진영 내에는 여전히 현 정부에 기대를 거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정리하자면, 지금은 진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던 서로 다른 세력들이 확연하게 다름을 드러내고 있는 시기라고 본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장석준 : 촛불연합이 분리된 것이다. 한 축으로는 여전히 촛불연합, 즉 민주대연합 시각에 있는 세력, 그리고 또 다른 한 축에는 민주대연합과 결별해야 한다는 세력, 이 두 세력이 진보진영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프레시안 : 하나하나 이야기해보자. 민주대연합 세력은 여전히 문재인 정부와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장석준 :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시효를 상실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020년 총선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국회에서 활개치고 다니지 않는가. 그렇기에 민주대연합의 필요성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해봐야 한다. 이미 신자유주의 파고를 한 차례 겪은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질서 자체를 의문시해야 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진보진영은 이러한 국면에서 새로운 의제나 근본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사회 변혁을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보다는 여전히 민주대연합 구도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맞지 않는 목소리를 낼 경우, 차단한다. '우선은 이것이 급하다'는 이유다. 그렇다보니 근본 의제를 이야기하는 세력과는 격돌할 수밖에 없다. 이 두 세력은 정리되긴 어렵다고 본다. 분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진보진영에 묶여 있었지만, 같은 '진보'가 아니었던 셈이다. 간판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이명박근혜' 정권의 지난 9년 간, 한국 사회의 후퇴를 막기 위해 뭉쳐 있던, 즉, 공공의 적을 막거나 제어하기 위해 모여졌던 힘이 이제는 분산할 때가 됐다는 건가.
장석준 : 지난 정권들은 한국 사회를 10년 이상 후퇴시켰다. 이들 정권에 맞서다 보니,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맞서는 의제 자체도 세계사 시간과 비교해 상당히 후퇴된, 뒤쳐진 그런 것들이었다.
프레시안 : 4대강 사업, 부자감세 등이 대표적일 듯하다.
장석준 : 신자유주의 위기를 겪은 세계는 2010년부터 신자유주의 이후 질서를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2010년 당시 한국은 신자유주의 전성기 시대에 시계가 멈춘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다. 당시 의제는 이를 몰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6년~2007년에는 사회 의제에 관한 담론이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석준 : 당시의 한국 사회 진보 담론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앞선 측면이 있었다. 특히 2008년 광우병 촛불 때는 여러 다양한 담론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촛불 실패 이후, 모든 담론과 의제들이 민주대연합론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명박근혜'를 몰아내는 게 최우선이라는 담론으로 정리됐다. 그래서 이른바 저항세력이나 민주세력, 그리고 진보세력조차도 세계사 시간에 뒤처지게 됐고, 그런 현실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연합, 반 자유한국당만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프레시안 :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됐을 때, 그래도 그간 민주정부가 만들어놓은 민주적 절차 등을 후퇴시키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순진하게 느낄 정도로 후퇴됐다. 이 공포심이 매우 크다. 진보진영이 쪼개져 있으면 다시 그때처럼 제2의, 제3의 '이명박근혜'가 나타나 다시금 사회를 후퇴시킬 거라는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장석준 : 다시금 단순히 반 자유한국당이라는 안티 정체성 속에 다 합친다고 연합 질서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 시대에 맞게 기민하게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만 다양한 세력들의 연합이 유지가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연합을 유지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되레 연합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 :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연합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586세대라고 할 수 있나.
장석준 : 세대론 보다는 중산층론이 더 맞는 듯하다. 중산층은 이미 현재의 안 좋은 경제 상황에서도 경제적 이해를 일정 충족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경제적인 이슈는 급선무가 아니다.
프레시안 : 경제적으로 충족되면, 정치를 돌아보게 되는 듯하다.
장석준 : 그렇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슈가 중요하다. 특히 자유한국당을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말이 안 되는 행동과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을 청산하려면 다시 촛불 광장 같은 만남의 공간을 열고, 다수의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연합전선을 펼치는 데에는 비정규직도 필요하고, 젊은 세대도 필요하다. 쇠락해가는 지방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대연합을 형성하려면 반 자유한국당만을 부르짖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이며, 기후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비정규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를 억압하고, 중요하지 않다며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이런 행보를 보여 온 게, 즉 촛불광장에 형성됐던 연합을 계속 깎아온 게,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세력들이다. 세대로는 586세대이고, 계층으로는 중산층이다.
프레시안 :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화두는 상당히 많다. 특권층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이를 담론으로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검찰 개혁이 우선이기에 나머지는 후순위로 밀리는 식이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과거 민주노동당은 선거에서 '부유세'를 담론으로 던졌다. 논쟁을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지금은 그런 식의, 즉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없는 듯하다.
장석준 : 구조적 문제가 있다. 민주당이야 정체성과 지향이 그렇기에 바뀌길 기대하기 어렵다. 남은 건 진보진영인데, 여기도 쉽지는 않다. 진보진영의 대표격인 원내정당 정의당이나 노동자를 대표하는 민주노총을 이야기해보자. 현재 이곳에는 아까 언급한 '민주대연합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으로 공존한다. 이는 한국 사회 구조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장석준 : 단순히 말해, 민주노총 내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고, 대기업과 영세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이 있다. 정의당 내에도 민주노총의 조직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교차 지지하는 층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정규직, 대기업, 민주당지지)의 정서는 우리 사회의 범 중산층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
프레시안 : 민주노총 내에 있지만, 서비스연맹 소속 청소노동자와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노동자간 정서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장석준 : 정의당이 '조국 찬성'이냐 '반대'이냐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건, 이러한 객관적인 토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문제는 이러한 토대는 진보진영의 구조적 문제이기에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과의 연대 내지 협조가 체질화된 듯싶다"
프레시안 : 현재처럼 분열된 세력이 공존하는 방식, 그리고 범 중산층 정서로 귀결되는 정체성은 개선돼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장석준 : 진보진영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겠다는 자기 입장을 분명히 정하지 않으면, 지금의 기성 진보세력들이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당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이 진보정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앞으로 명확한 노선 계획이다. 어느 세력을 어떤 식으로 세력화하고 연합을 구축해 개혁의 힘으로 가져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내년 총선 때 무엇을 이야기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민은 없고 개방형 경선제와 같은 이벤트성 이야기만 하고 있다.
프레시안 : 지금의 정의당에서는 원내교섭 정당 의석수를 만들려고 하는 모습 말고는 보이는 게 없는 듯하다.
장석준 : 이해는 된다. 어쨌든 진보정당 운동 역사에서 선거법 개정이라는 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패스트트랙 처리까지 민주당과의 원내 연대를 이어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난 9년 동안 단단하게 쌓아온 민주당과의 연대 내지는 협조가 체질화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프레시안 : 야성의 DNA가 아니라 원내 교섭의 DNA로 변화된 듯하다.
장석준 : 그러한 체질을 개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무엇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장석준 : 책임 있고 진지한 정치세력이라면 현 정권의 우클릭 내지는 재벌친화적인 행보를 정확히 잡아내고 대응해야 한다. 이제는 민주당과 연합이 아니라 경쟁으로 가야하며 필요하면 사안별 제휴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세력 대 정치세력으로 견제하고 대립하는 국면으로 넘어가야 한다.
프레시안 : 진보진영에서는 그런 사안별 제휴 등을 총선 이후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총선 이후에 가능할까 싶다. 아까 언급했던 지난 9년 간 만들어진 DNA가 이후에도 유지되는 게 아닌가 싶다.
장석준 : 총선이라는 게 하나의 과정이다. 총선 전에, '우리가 어떤 정치 행위를 하겠다'는 것을 밝히고 그에 따라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심판을 받는다. 만약 총선에서 유의미한 의석수를 얻는다면 총선 전에 밝힌 '어떤 정치 행위'를 하도록 위임을 받는 식이다. 그렇기에 지금 총선 이후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결정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총선 이후, 뭔가를 결정해서 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내가 볼 때는 선거법만 정리되고 나면,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그 시기에 정의당이 시대상황과 맞지 않는 입장을 택한다면, 총선에서 민심은 정의당을 버릴 수도 있다. 새로운 진보 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프레시안 : 2008년 광우병 촛불, 김진숙 희망버스 등을 지켜본 느낌으로는, 진보진영이라는 시스템이 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날것이면서도 필요한 담론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어느 곳에서도 담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는 듯하다. 이걸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원내로 들어와서 '어떤 정치 행위'를 하겠다고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듯하다.
장석준 : 촛불 등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의 사람들이 계속 집행라인을 잡고,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인물의 문제가 아니다. 선거법 개정이 그나마 정의당이 역사에 봉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새로운 세력 진출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게 선거제도, 정당제도다. 거기서 선거법 개정은 파열구를 만드는 것이다. 정의당 자신이 미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해도, 미래의 주체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여는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쉽지 않은 듯하다.
장석준 : 이런 걸 계속 막으면 혁명이 일어나든가, 사회가 망하든가 할 것이다. 임계점에 온 듯하다.
프레시안 : 일례로 20대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는 게 모두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도 '중요하지만 난 모르겠다'는 식으로 있는 듯하다.
장석준 : 말로만 젊은 세력들이 진출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쇼윈도 마네킹'처럼 진출시키다 보니 그런 것이다. 실제로 젊은 세력들이 진출하게 하려면 기존 결정권자들이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물러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 않나. 자기네들이 물러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오도록 해야지, 자기네들은 그대로 있으면서 보여주기 식으로 픽업해서는 안 된다.
"진보정당, 기성 문법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프레시안 : 세대교체론 이야기 나올 때 나오는 이야기가 리더십, 경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기존 인물들은 젊은층이 주도권을 쥐면 조직이 망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장석준 : 모든 문제를 지난 세대의 퇴장으로 환원해서 이야기하면 매우 편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건 뻔하다.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어떤 종합 대책을 가져가든, 구 세대 지도층이 적절하게 퇴장해야 한다는 내용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퇴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건 분명히 지적하고 따끔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프레시안 : 40대 기수론 이야기도 나온다.
장석준 : 세대가 지체되니 40대 기수론이 나오는데, 정확히 이야기하면 20대 30대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기후 위기 등은 세대적으로 더 내려갈수록 해결 능력과 의지가 강하다.
프레시안 : 당사자성이 중요한 듯하다.
장석준 : 당을 이끄는 사람 가운데 집을 소유한 사람, 남성, 수도권 거주자, 대졸자, 나이든 사람 등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프레시안 : 그렇기에 부동산 문제나 기후 문제 등은 후순위가 되는 듯하다. '니 의견이 맞는데, 시급한 거는 검찰 개혁이다' 이런 논리가 되는 듯하다.
장석준 : 이는 지금 한국 정치 지형을 이끌어가는 세력들의 심각한 문제다.
프레시안 : 그래서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듯하다.
장석준 : 어느 한 곳에서라도 조직 내 목소리 중심이 새로운 쪽으로 이행되어가는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신선한 바람이 불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뀌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안 보인다. 정의당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심상정 의원이 당 대표를 하면서 의원도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 의원 지역구인 고양시는 잘 닦여진 곳이다. 그곳에 심 대표 대신 젊고 참신한 새 후보를 출마시킨 뒤, 당선하도록 하는 사례를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매우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라는 게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지금 진보진영의 리더십은 그런 스토리를 만드는 것에서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아름다운 스토리가 나왔으면 한다.
프레시안 : 원내에 진출한 진보정당 정치인들을 보면, 기존 정치인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장석준 : 어느 특정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보진영이 원내진출 15년이 넘으면서, 각자 정치에 닳고 닳았다. 정치를 잘 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중 정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대중을 만족시킬 정치를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동안 익숙해온 원내 정치, 이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여의도 정치다. 그것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본인은 대중 정치라 생각하지만, 언론만 바라보는 정치, 타당 의원과의 협상만을 바라보는 정치에 갇혀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때다.
프레시안 :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원내 교섭단체 지위를 얻었다고 해도,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장석준 : 이건 단호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원내진출 할 때의 포부는 새로운 정치 문법을 만들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원내 진출 15년이 지나면서 굉장히 세련되고 진화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새로운 문법을 만들기 보다는 기성 문법에 포로가 되어버렸다. 철저한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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