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SK그룹은 글로벌 사모펀드 소버린의 지분 매입으로 경영권 상실 위기에 몰린 이후, SK(주)를 정점으로 하는 지주회사 체제로 대대적인 지배구조 개편을 거쳐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갖춘 대기업집단으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16여년만에 ’적대적 대주주‘가 등장할 가능성을 두고, SK그룹 경영권의 안정성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다. ’적대적 대주주‘ 후보는 다름아닌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다.
최 회장 부부는 지난 2012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2017년 7월 최 회장이 이혼조정을 신청했으나 “이혼만은 절대 안된다”던 노 씨는 지난 4일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이혼 조정이 결렬되자 최 회장이 지난 2월 이혼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 맞소송에 나선 것이다.
사실 노 씨는 맞소송을 미뤘을 뿐 이미 오래 전에 이혼을 결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이 이혼조정을 신청한 것도 바로 이 행위에 격분해서였다고 한다.
재계 소식통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에서 노 씨가 남편인 최 회장의 사면을 반대하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 것이 드러나면서 최 회장은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이혼 절차를 밟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 간 신뢰가 완전히 깨졌다는 것이다.
노 씨는 지난 2015년 8월 최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기 전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면 반대 편지'를 보내 최 회장의 사면을 반대하는 9가지 이유를 나열했다. 그 중에는 "최 회장이 석방된다고 해서 국내 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최 회장 측은 노 씨의 행위가 민법 제1편 1장 제2조 1항(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에 규정된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혼인 상태의 아내가 남편의 사면을 반대하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낸 것은 부부 사이의 신의성실의 원칙을 저버린 행위이기 때문에, 노 씨가 이혼소송에서 최 회장이 이혼 사유를 초래한 유책 배우자로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2015년 12월 최 회장은 10여년간의 별거 중 생긴 자녀의 존재를 고백하고, '사실혼' 관계인 김희영 씨의 존재를 공개했다. 혼인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최 회장은 자신의 자녀 관련 보도가 난 이후 노 씨가 '사면 반대 편지'를 보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됐고, 사면 반대 편지와 관련한 언론 보도까지 나온 뒤 더 이상 혼인관계를 형식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의미없다고 판단해 이혼을 위한 법적 절차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노태우의 딸, 그리고 그의 재산 분할 요구
세간의 시선은 노 씨가 요구하는 '재산 분할'에 쏠려 있다. 노 씨는 최 회장의 SK 지분(지분율 18.44%)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분을 재산분할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이 요구가 최 회장이나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면, 노 씨는 단숨에 국민연금(8.28%)에 이어 SK의 3대 주주로 등극하게 된다. SK그룹은 노 씨가 ’적대적 대주주‘로서 글로벌 사모펀드와 손잡을 경우 ’제2의 소버린‘ 사태가 벌어질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법 제839조의2(재산분할청구권) 등에 따르면 이혼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재산분할에 관하여 협의를 이루지 못하면 가정법원이 ‘쌍방의 협력으로 이룩한 재산의 액수 기타 사정을 참작해 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론적으로 재산분할을 현물로 요구해서 받아들여질 경우 최 회장이 보유한 SK 지분 거의 절반이 노 씨에게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최 회장의 지분율은 10.64%까지 떨어지게 된다. 최 회장의 가족 및 친인척을 포함한 우호지분율도 29.61%에서 21.82%로 떨어져 그룹 지배권이 취약해진다.
하지만 SK처럼 국민이 키워준 역사를 지닌 재벌그룹의 경영권이 달린 지분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법원이 ’현물 분할‘을 수용할 가능성은 오히려 적다는 지적이 법조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이혼전문 변호사들에 따르면, 최 회장이 보유한 SK 지분 거의 절반을 달라는 노 씨의 요구가 법원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 최 회장의 SK 지분 대부분은 결혼 전 상속 재산이기 때문에, 결혼 이후 이 재산에 대한 노 씨의 기여도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노 씨가 요구한 지분의 가치는 현재 주가 수준으로 환산하면 1조 4000억 원 정도다. 따라서 당사자끼리 비밀협상을 통해 재산분할 액수를 합의하거나, 합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 법원이 일정 비율을 인정해 현금으로 지급하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최 회장이 보유한 SK지분은 상속재산이므로 재산분할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1988년 결혼해 30년 넘게 혼인 관계인 최 회장 부부같은 경우는 재산분할 대상이 폭넓게 인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한다.
혼인 중 부부가 공동으로 협력해서 모은 ‘공동재산’은 당연히 최대 절반까지 재산분할 대상이 된다. 그뿐이 아니다. 혼인 전부터 부부가 각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나 부부 일방이 상속· 증여· 유증으로 취득한 재산 등은 부부 일방의 '특유재산'으로서 재산분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다른 일방이 그 특유재산의 유지·증가에 기여한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예외적으로 재산분할에 포함시킬 수 있다.
노 씨는 현재 최 회장의 SK 지분 중 42.29%인 548만7327주(총주식 대비 7.8%)를 요구하고 있다. 최 회장 측에서는 이 지분을 특유재산으로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노 씨가 이 재산의 형성과 유지, 증가에 대한 기여를 입증할 근거를 제시할 경우 일정 비율을 얻어낼 가능성이 적지 않다.
만일 당사자의 재산분할 협의가 이뤄지지 않거나, 법원이 노 씨의 요구대로 최 회장의 SK지분 일정 비율을 현물로 넘길 것을 결정한다면 최 회장이 경영권 방어를 위한 부담이 급증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노력이 SK 주가 상승의 호재가 될 가능성 있다는 관측과 악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재벌은 '정경유착'의 산물이자 대부분의 대기업이 국민이 키운 기업이라는 점에서 최 회장 부부의 이혼 소송이 SK그룹의 기업가치가 좌우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 관장은 정치권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인물이다. 지난 총선 때는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던 자유한국당(현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노 관장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냈었다. 전두환의 자녀가 특정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어찌됐든 전직 대통령의 '영애'다. 그리고 그의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광주 학살과 내란의 주범이었다. 이혼 소송은 사적인 부분이다. 누구에게 귀책 사유가 있든, 합리적 방향으로 조정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어색한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다. '내란범죄자'의 후대가 사적인 소송을 넘어서, 국민이 키운 대기업을 무리한 방식을 동원해 장악하려 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왜 그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걸까? (관련기사 : '노태우 딸'과 김문수, 저만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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