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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잃은 사람들, 희망을 박탈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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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잃은 사람들, 희망을 박탈한 사회

[새책] 박수정의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

"여기가 그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나오는 학교라면서요. 내 아들이 이런 학교에 다녀야 하다니 너무 슬퍼요."

인천 만석동 이웃들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과정을 그린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 펴냄)의 저자 김중미 씨가 한 글에서 털어놓은 충격적인 얘기다. 자기 아들이 '불쌍한 아이들'과 같이 학교에 다닐 것을 슬퍼하던 그 학부모는 결국 자기 아이를 근처 '불쌍한 아이들'이 없는 초등학교로 전학시키고 말았다. 물론 만석동 아이들 역시 친구가 전학 간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김중미 씨는 "이제 도시 빈민들이 더 이상 집단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더욱더 소외되고 차별받는 존재로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를 당하는 존재로 남게 됐다"고 사회의 관심을 촉구한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박수정 씨의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이학사 펴냄)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이들처럼 취급되는 우리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극단 한강과 <연극 전태일>을 공동 창작했고, <삶이 보이는 창>, <진보평론> 등에 인터뷰와 르포를 기고해온 박수정 씨는 구로동 재개발 지역 빈민들, 영등포역 노숙인들, 버림받은 독거 노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구로구 구로3동,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 중에는 부모 한쪽이 가출하거나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다...부모가 다 있어도 싸움이 잦거나 알코올에 중독된 경우가 많다. 한쪽 부모가 없는 아이를 보면 싸우는 엄마 아빠라도 다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부모 싸움에 우는 아이들을 보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연극놀이로 가족 모습을 조각한 적이 있었다. 지영이는 6학년 아이 하나를 등 돌려 세우더니 엄마라며 음식을 만드는 시늉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엄마는 계속 잔소리를 해대며 아이들을 혼낸다. 지영이는 다른 아이를 아빠로 삼아 가운데에 세우고는 치켜든 손에 몽둥이를 쥐어줬다. 그리고 그 몽둥이 밑에 오빠 역할을 하는 아이와 함께 서서 고개 숙이고 우는 시늉을 했다. 그때 처음 지영이는 집안을 보여주었다. "어디를 때리니?", "머리도 때리고요, 아무 데나 막 때려요."

"내일이면 정원이는 구주택 골목을 떠난다. 아마 여기로 다시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을 것이다. 올해 아니면 내년 안으로 구주택들을 모두 헐고 새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니, 정원이네뿐 아니라 지금 사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차츰 사라질 것이다. 아파트가 다 지어진다고 해도 그 값은 그이들이 꿈꿀 수 없는 액수일 것이며...이제 사람들은 철새처럼 다시 마땅치 않을 정착지를 찾아 떠나야 한다."

박수정 씨는 10년째 구로구 구로3동, 일명 구주택 지역에 살고 있다. 박씨는 공부방에서 그 곳 아이들을 만난다. 그곳 아이들은 말 그대로 '변방의 아이들'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어른들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항상 풀 죽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저희들끼리 웃고 장난하고 뛰고 싸우고, 하여튼 조금이라도 지루해지기 전에 움직인다. 세상이 지루해진 어른들에 비하면 아이들은 건강하다."

아이들은 절망에 찌든 어른들에 비하면 훨씬 건강하지만, "가슴 한쪽에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버림받은 외로움과 서러움,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박씨는 잠시라도 내 것, 내 아이, 내 가족, 내 고통에서 비껴서 '마음이 가난한 이 아이들'을 보듬을 것을 요청한다. 그럴 때 그 아이들은 물론, 내 아이,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다.

***혼자 사는 노인들,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첫 번째로 들른 집은 반지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녀 둘을 데리고 산다. 며느리는 집을 나간 지 오래고, 아들은 재작년 간경변으로 세상을 떴다. 몸이 약한 두 노인은 따로 일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생활보조금 받는 걸 알뜰하게 모아 그나마 깨끗한 집에 살 수 있었다. 지금 사는 집을 얻기 전에 다른 집을 계약했는데, 이사 들어가는 날 주인집에서 중풍을 앓는 할아버지를 보자 송장 치울 일 있냐고 당장 계약을 깨더란다. 평소보다 넉넉하게 도시락 두 개를 더 얹어드리자 놀라신다."

"할머니들이 혼자 사는 집의 문은 거의 합판 문이다. 몇 번씩 다른 나무 조각들을 덧댄 자국이 남아 있다. 방에서 문까지 한 걸음도 안 될 거리이건만 할머니들에겐 천 리 길처럼 멀기만 하다...며칠 추운 방에서 자다가 안 되겠다 싶어 이웃집에 가서 잤는데 얼굴과 귀에서 물이 나오더란다. 피부과에 가니 얼굴이 얼었다가 녹아서 그런 거라고 하더란다."

혼자 사는 노인들. 여든일곱 살의 김봉옥 할머니는 서른여덟 살에 혼자 됐다. 가난했지만 의지했던 남편이 위암으로 세상을 떳고 딸 셋만 남았다. 시다, 미싱사, 가방공장 노동자를 전전하든 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게다가 둘째 딸은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서른여덟 살에 혼자가 됐다. 형편이 나은 막내딸이 가끔 연락하지만, 부담이 될까봐 연락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지금 김봉옥 할머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구주택이 헐리는 일이다. 구주택이 헐리고 나면 전세 3백만원으로 얻을 수 있는 집이 아예 없어지기 때문이다. "4월이면 철거한다는데 어쩐대", 할머니의 말에 박씨는 가슴이 무겁다.

"오늘날의 주거는 돈의 힘에 의해, 이익과 경쟁, 증오에 의해 이루어진 조잡한 타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계기가 인간의 존엄을 헤치고 비굴하게 만들며 최소한의 비천하지 않은 사람을 영위해야 할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잊어버리도록 만들고 있습니다...영속성을 지향하는 모든 사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한 말이다. 땅 장사, 집 장사로 돈벌이에 혈안이 돼 우리 사회가 어떻게 결단이 나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업자, 관료, 정치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다.

***'나의 희망'이 '우리의 희망'으로 확장돼야**

이 책에는 이밖에도 노숙인, 탈북자, 비전향 장기수,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농민 윤금순이 농민 운동가가 된 사연 등이 빼곡히 들어 차 있다.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바로 우리 이웃들의 얘기다.

박씨는 "자신의 삶을 내보여준 이들의 인생이 100%라고 한다면 1%도 채 되지 못할 자신의 글이 사람들의 가슴에 온기를 되살리기를 바라며 이 삶의 모자이크를 완성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우리가 박씨의 증언에 대답할 때이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이런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동정의 수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불쌍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소개하는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을 <조선일보> 6월5일자는 '북 섹션'에서 가장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한 편에서는 땅 장사, 집 장사하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마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하는 척 생색을 내는 것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그들에게는 결여된 탓이다. 그런 인식이 없는 동정이 이끌어낼 수 있는 반응은 바로 글머리에 언급한 한 학부모의 이기적이고 천박한 태도일 것이다.

김중미 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이제까지 도시 빈민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가난과 불평등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이제까지의 도시빈민정책이나 주거정책이 정작 지역주민과 가난한 사람들의 정책이 되지 못했던 것은 사람과 그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놓고 보지 않은 경제적 관점의 정책 때문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서민들, 빈민들의 입장에서 정책을 구상하고 개혁을 이끌어내야 할 때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이웃들은 물론 나와 한국 사회의 "내일에 희망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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