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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인간의 야수성은 어디까지인가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24>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 24장 흩날리는 꽃이파리
하늘에서 내려다 본 한라산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초원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바람따라 물결처럼 일렁였다. 눈을 멀리 주니 긴 해안선이 꿈결같이 아스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미군조종사도 눈 아래를 내려다보며 엄지를 치켜들며 원더풀을 연발했다.
장엄한 산의 경관을 바라보노라면 평화가 한없이 넘실거리는 것같다. 푸른 해원을 달려오는 싱싱한 파도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가물가물한 수평선, 깨끗한 하늘빛,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땅에서 살육의 쟁투가 일상화되었는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생소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기후가 온화해 동식물이 서식하기 좋은 땅, 그래서 낙원이라고 부르는 땅. 그런 곳이 저주받은 땅이 되어서 참혹하게 찢기고 있다.
오민균은 연대장실을 찾아 김익창에게 요청했다.
“연대장 각하, L-4를 불러주십시오.”
L-4는 제주 군정장관의 역내 시찰과 군정회의 때 지방에 산개해있는 주요 치안 대표들을 실어나르는 미군정 연락기였다. 9연대장의 산악지대 시찰용으로도 종종 이용되었다.
“호출 이유가 그건가.”
“그렇습니다. 연대장 각하께서는 맨스필드 군정장관 지시를 잘못 들으신 겁니다. 그러니 예정대로 전단을 뿌리고, 사후보고 드리는 것입니다.”
김익창 연대장이 곧 알아차리고 의미있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모르는 일이야” 라고 거듭 확인하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대장은 무능한 듯 보였지만 유연한 면이 있었다. 오민균은 연대장의 이름으로 L-4 연락기를 불렀다. 연락기가 연대 연병장에 내려앉자 그는 전단지 자루를 메고 기체에 올랐다. 조종사가 어깨에 멘 자루가 뭐냐고 턱짓으로 물었다.
“폭도 귀순용 삐라다. 폭도 잠입 루트에 뿌릴 것이다.”
“비행하는 데 위험지역이지 않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리 군대와 군용기는 공격하지 않는다.”
사실 무장자위대는 군과 경찰을 분리하고, 군에 대해선 우호적이었다. 입산자와 폭도를 자극하지 말라는 것이 김익창 연대장의 지침이었고,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군정회의에 참석한다면서? 캡틴은?”
“육로로 출발한다. 우리가 삐라살포 임무를 마칠 때쯤 군정사무실에 도착해있을 것이다.”
“귀관이 수행하는가.”
“그렇다. 맨스필드 군정장관 각하를 함께 만날 것이다.”
“OK.”
오민균은 조종사의 뒷자리에 앉아 자루의 인쇄물들을 한 주먹씩 집어서 좁은 배출구로 쏟아냈다. 조랑말 노루 사슴 토끼들이 놀라서 어디론가 뛰어가고, 전단지는 그들을 쫓듯 나풀거리며 지표상에 내렸다. 조종사는 삐라를 뿌리기 좋게 기수를 위로 치켜올렸다가 내리고, 역방향으로 틀어서 선회하기도 했다. 기체는 한라산 상공을 중심으로 길게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장방형 원을 그리면서 날았다. 뿌려지는 삐라는 산과 계곡, 마을과 마을, 긴 해안선에 걸쳐 흩날리며 내렸다. 삐라는 9연대장 명의의 호소문이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게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은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을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하여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
1948년 4월22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오민균이 임무를 마치고 제주 미군정청에 들어가자 김익창 연대장은 벌써 도착해 청사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료했습니다.”
오민균이 연대장 앞으로 다가가 거수경례를 각지게 올려붙였다.
“난 모르는 일이야.”
그가 예의 의미있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유머감각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맨스필드 군정장관은 부관의 안내로 부속실로 들어서는 김익창과 오민균을 반갑게 맞았다.
“Hi, It is nice to meet you.”
“Meet to you, too, Sr.”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직접 찾아 보고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수행한 9연대 2대대장 오민균 소령을 소개합니다. 부산 5연대에서 증파되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대동했습니다.”
김익창이 소개하자 오민균이 일어나서 거수경례를 올려붙인 뒤 부동자세를 취했다.
“엑설런트! 착석하시오.”
오민균이 자리에 앉자 김익창이 덧붙였다.
“유능한 장교입니다. 일본 육사 출신입니다.”
맨스필드가 웃는 것으로 예를 대신했다. 김익창이 가방에서 영자로 작성된 보고서를 꺼내 내밀었다. 보고서를 눈으로 살피던 맨스필드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좀전 산에 삐라 뿌린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월권이오.”
“폭도 귀순을 위해 뿌린다고 보고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제 내가 중단하라고 전화 지시하지 않았소?”
“저는 유의해서 뿌리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김익창 연대장이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서 중대한 용건이 있을 때를 대비해 곁에 통역을 두라고 했소. 유의하시오. 전단지 뿌린 것은, 응하지 않으면 폭도를 치는 명분도 되니 나쁠 건 없소. 그러나 상부에선 금명간 초토화작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이오. 서로 죽고 죽이는 이런 미쳐버린 증오의 세상을 하루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이 상부의 방침이오.”
“이건 반칙입니다.” 김익창 연대장의 얼굴이 벌개졌다. “화평회담을 지시해놓고 토벌을 강행하다니요? 엄연히 반칙입니다!”
“나도 연대장의 의견과 같소. 하지만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군인의 숙명이오.”
오민균은 절망과 희망이 순간마다 교차하는 걸 숨막히게 지켜보았다. 낙관과 비관을 롤러스케이트 타듯 하는 것은 바로 비애였다. 우리의 운명 하나가 저들의 펜대 하나, 혀놀림 하나로 결정된다... 그의 고뇌를 깨듯 맨스필드가 말했다.
“자, 한번 봅시다. 해방이 되자 급속도로 공산당 조직이 번식하고, 소위 인민무장자위대를 결성해서 공권력을 위협하고 공격했소. 계속 경찰서를 습격했소. 이것이 상부의 시각이자 관점이오.”
김익창 연대장이 받았다.
“군정장관 각하,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입니까. 우리가 그걸 몰라서 협상에 나선 것입니까?”
“이념 전쟁이 되어버렸소.”
“제주도 폭동은 그것과 크게 연관되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생명과 재산을 잃었는데 해결해주긴 커녕 입을 다물라고 하고, 잡아가두니 저항하는 것입니다. 공산세력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역설적이게도 폭압구조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가 폭력을 쓴다고? 공산세력이 침투해 폭력을 쓰는 것을 달리 말하지 마시오. 민주주의를 실천하자는 5.10선거를 보이콧하고, 참여자를 위협했소. 미합중국의 권위를 짓밟았소. 해산명령을 받은 인민위원회가 계속 존속되고, 인민무장대를 결성해 도발하고 있소. 귀하는 왜 그들에게 우호적이오?”
맨스필드는 돌변해 있었다. 의아스러운 태도였다.
“나는 오해살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폭도들을 용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양민과 폭도를 구분해 법의 심판대에 올리자는 것뿐입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공산세력이 더 발호합니다.”
“지금 옥석을 가릴 수 없소. 혼란기엔 방법이 없소.”
“성경에서 보듯이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치입니다.”
“민주주의 제도를 악용하지 마시오. 3.1절 행사를 비롯해 민중이 보인 행동은 난폭했소.”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듣는 얘기를 또 반복하자는 모양이다. 김익창이 또박또박 말했다.
“사건의 진단은 자기들 유리하게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팩트는 분명합니다. 기마경찰의 말이 어린 아이를 치었고, 이에 주민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사람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민간인이 죽고 다쳤습니다. 일제식민 지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해방된 조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미군정 치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수치지요. 존경받는 지역 대표들이 중심이 되어서 민족자주를 외친 평화로운 집회였지요. 그중에는 공산주의 계열도 있었지만 합법적이었습니다. 미군정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권이 보장되고 사상의 자유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방향을 틀었습니다. 정책을 수정한다면 일정 훈정 기간을 두고 단속해도 늦지 않았지요. 혼란만 부추긴 꼴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없습니까? 왜 이렇게 일관성 없게 정책을 바꿉니까.”
“혼란을 부추겼다고?”
“그렇소이다. 나로서는 이상론이라고 생각했지만, 미군정은 그렇게 했소. 그리고 4.3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자 저들과 비밀협상을 가지라고 명령해서 충직하게 따랐습니다. 이쪽 저쪽으로부터 오해를 사면서까지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목숨 걸고 한 일입니다. 그것을 오민균 소령이 해냈습니다. 그쪽의 불신을 달래면서 이룬 성과입니다. 그런데 백지화한다? 내 신의와 명예는 무엇이고, 미국의 자존심은 무엇이 됩니까. 폭도조직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찰을 습격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오?”
“그것을 모르고 협상장에 나오라고 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김익창이 반발하자 맨스필드가 놀라는 표정으로 뒤로 주춤 물러앉았다. 김익창은 맨스필드가 태도를 바꾼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직접 명령해놓고, 틀어버리다니? 고급장교가 이렇게 가벼운가? 물론 그도 지시를 따른 것이겠지만, 자기 할 말이 없단 말인가?
“군정장관 각하, 상부 명령이라고 한다지만 현지의 상황도 중요한 정책 집행 요인이 됩니다. 가볍게 종기를 짜낼 문제를 커다란 암 질환으로 키울 수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사태를 키우는 것 같은 오해를 받습니다. 혹시 뒤에 어떤 어둠의 세력이 있는 것 아닙니까?”
“어둠의 세력? 경찰 말이오? 미군정 물러가라. 친일경찰 물러가라, 악질경찰 물러가라...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화나지 않겠소?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오.”
그는 의미있는 말을 했지만 김익창은 지나쳤다.
“지금 어디서부터 사태를 해결해야 할 지 난망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주민을 쓸어버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폭도들을 정리한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고한 주민까지 적으로 몰아가는 건 민심 배반입니다. 인권을 중시하는 미합중국의 이상을 상처내는 일입니다. 공산주의 소련과의 대결에서도 약점이 됩니다.”
김익창의 설명에 맨스필드가 한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자칭 인민해방군이라고 하는 자들이 일본군이 남기고 간 무기로 무장하고, 수류탄, 일본 군도(軍刀), 죽창으로 우익인사를 습격하고, 한라산 터널 속에 진지를 구축하고 계속 경찰지서를 위협하고, 경찰과 그 가족을 잡아 처형하고 있소. 이것이 협상자의 태도입니까?”
“그래서 해결하자는 것 아닙니까.”
“상부에서 그 점을 계속 환시키고 있소.”
1948년 4월3일 새벽, 한라산 중턱의 오름마다 횃불이 타오르면서 무장대의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제주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단원, 우익단체 인물의 집을 습격했다. 그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항전한다면서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이라는 격문을 써붙이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민생고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맨스필드가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이 질문했다.
“제주도 여자들이 사상교육을 받으러 북으로 간 것이 사실입니까. 그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유학파들로부터 사상교육을 받고 넘어갔다는 거요. 제주 노조원의 주장에는 북에 간 누이들이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단정 단선을 반대한다는데?”
“그들은 생계를 위해 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간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생활력이 강해서 해산물이 풍부한 동해안을 타고 두만강 국경선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숫자가 수백 명입니다. 이 사람들이 38선이 막히면 돌아올 수가 없지요. 일제강점기에도 이동이 자유로웠는데, 해방이 되자 내 땅이 갈라져서 돌아올 수 없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왜 해방이 되었습니까. 내 조국 내 산하 어디서나 자유롭게 왕래하고 돈벌이하고, 행복하게 살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내 영토가 반토막이 나서 오도 가도 못하는 해방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제주도민의 항쟁은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승만 박사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OK하지 않았소?”
“그것은 미래를 보지 않는 개인적 탐욕이자 일탈입니다. 한민족 공동체를 포박하는 만행입니다.”
“왜 그에게 책임이 있다는 거요? 북의 집단 책임이 더 크지 않소?”
“나는 북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다만 남한 사정만 알기 때문에 남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북녘에 제주도 여자들이 수백 명 가있다. 그래서 분단을 반대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군.”
“그것은 여러 중요한 이유 중 사소한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주도민으로서는 절박한 이유가 되겠지요. 어떤 행위에는 반드시 자신들의 이익과 불가분하게 결부되니까요. 그러니 더욱 절실하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자폭하는 태도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강자로서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협상테이블에 응해오지 않으면 우리에게 토벌의 명분이 주어집니다. 해안을 봉쇄하고, 폭도 진지에 폭탄을 투하하면 한달 내에 작전을 끝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주도 반란군 지도부가 북과 연계되어 있지 않다고요? 그런 첩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가능성이 있지요. 미군과 경찰이 그렇게 몰아가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궁지에 몰리면 어떤 누구와도 손을 잡는 것이고, 지금은 이념 체계도 모호하잖습니까.”
맨스필드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맨스필드 군정장관 각하, 지금 폭도들은 수많은 주민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이곳의 특수한 상황을 보십시오. 형제자매가 산으로 숨어들면 그 가족들이 옷과 음식을 몰래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들까지 폭도로 몰면, 제주도 인민 전체가 폭도가 돼버립니다. 사실 초토화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군인으로서 가장 쉬운 길이지요. 그러나 초토화는 승리가 아닙니다. 자랑스런 미합중국의 자부심에 상처를 냅니다. 미합중국이 한국 정치 헤게모니 쟁탈의 쪼잔한 후견인이 돼버린 꼴입니다.”
“헤게모니 쟁탈의 쪼잔한 후견인? 그건 무슨 뜻이지요?”
“산 속에 벌써 삼만 명의 주민이 숨어들었습니다. 제주도 주민의 십분의 일입니다. 그러나 지휘하는 폭도는 삼사 백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세를 과시하느라 수천 명의 무장대라고 과장하지만, 내 정보에 의하면 삼사백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90프로는 공포심을 갖고 숨어들어간 주민들입니다. 중앙정치는 그들을 공포정치로 위협하며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것이고, 미군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김익창은 미국이 세계 전략의 일환으로 제주 주민을 이용해 대결을 조장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맨스필드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 차트를 정리해 왔습니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비행과 폭도들의 만행을 각 카운티 별로, 사례별로 정리했습니다. 증언과 현지조사로 확인한 것들입니다.”
“그만 두시오. 경찰의 명예를 훼손하지 마시오. 연대장의 명예가 있듯이, 그들에게도 명예가 있소. 싸우지들 마시오. 니 편, 내 편 갈라서 왜 싸우려고만 하시오?”
맨스필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군정장관 각하, 내가 토벌에 미온적이니까 폭도대 내통자로 나를 몰아붙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습니다. 싸우지 않기 위해서요. 왜 참느냐고요? 이건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만든 함정에 빠져들어간 것 뿐입니다.”
“함정?”
“그렇습니다. 나는 그런 정치적 음모에 말려들고 싶지 않소이다. 다만 동족을 살상해서 정치적 이익을 담보하려는 음모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분명히 가지고 있소. 그래서 중립입니다.”
“전쟁에 중립이란 없소. 군인이 중립의 길을 갈 수 있소?”
“금방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전쟁이 아닙니다. 그들은 내가 맨스필드 장관 각하에게 보고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모략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비행을 감추려고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음해 전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9연대장 각하, 나도 현지 경찰지서장에게 사태를 알아보았소. 지서장은 사태 악화의 책임을 부인하진 않았소. 다만 자기 부하들이 다치는 게 화가 난다고 했소. 제주 지식인들의 진정서도 여러 건 받아놓았소. 김 연대장이 수집한 정보와 내가 수집한 정보도 점검했는데, 대체로 일치하오. 그 참상이 보고된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는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각자 보는 관점이 다르고, 서울에서 보는 시각도 다르오. 미군정은 경찰정보를 신뢰하고 있소. 반면에 군의 정보가 나이브하다는 것이오. 그래서 내 의사가 묵살되고 화평회담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이오.”
“중단은 안됩니다!“
김익창 연대장이 소리질렀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장관각하.”
두 사람의 개미 쳇바퀴 도는 듯한 대화를 듣고 있던 오민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관 각하께서 보시다시피 이곳 평화로운 고장에 피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주민은 공포심을 못이기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보복과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그 고리를 장관 각하의 이름으로 끊어주십시오.”
“폭도는 폭도일 뿐이오.”
그는 어떻게든 상부의 지시를 따르는 명분을 축적해가고 있었다.
“그들이 죄를 지은 것만큼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불법적 행태도 가려서 처벌해야 합니다.”
“경찰의 폭력성과 폭도들의 만행을 동일시하지 마시오. 그자들은 반란자들이고, 경찰은 공권력을 행사하는 치안 책임자들이오.”
“제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일본 육사를 다닐 때, 일왕의 항복 방송이 나오고, 일본 전역이 패망의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육사 내에도 동구대라는 사설 테러집단이 생겨서 지역경찰과 함께 귀국하는 조선인 생도와 교포들을 타깃 삼아 공격했습니다. 자기들 패망의 울분과 불만의 출구를 그런 식으로 표출했습니다. 이때 조선인 학생 몇이 희생되었습니다. 교포들도 다쳤습니다. 그러자 학교측에서 관련자 체포 작전을 폈습니다. 학교측에 의해 이들이 체포돼 구속됐는데, 패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타고 그들이 모두 풀려났습니다. 학교는 다시 그들을 잡아 경찰에 넘겼습니다. 경찰은 또다시 풀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교장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잡아서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반복적으로 죄를 물은 결과, 조선인 생도들과 교포들은 귀국선을 타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저입니다. 이렇게 돌아온 사람들이 제주도에도 있습니다. 이민족의 보호를 받아 어렵게 귀국했는데, 동족의 손에 죽어야 한다면 자랑스런 미군정하에서 어떻게 자유민주의 가치를 말하고, 정의가 흐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미합중국이 일본보다 못해서 되겠습니까?”
맨스필드 군정장관이 듣고 있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관의 애국충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진행하시오. 내 고민은 여기서 끝내겠소.”
오민균이 맨스필드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각하, 지시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인간의 야수성은 어디까지인가

작은 충돌은 있었으나 상황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장대는 공격을 멈추었는데 아마도 화평 협상에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면 경찰은 병력을 계속 증강했다. 서북청년회도 수백명 추가로 입도(入島)했다. 국방경비대는 육지부 병력을 특별부대로 편성해 제주에 증파했다. 총공격을 앞둔 무서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구대구 부단장이 쌍통을 잔뜩 찌푸린 채 청년단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 귀퉁이에서 대원 둘이 밧줄로 꽁꽁 묶인 한 사내를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광대뼈가 튀어나와 개성이 뚜렷해 보였다.
“잡아왔습네다. 허리춤에서 피스톨을 찾아냈습네다.”
대원 중 하나가 구대구를 보더니 소리쳤다.
“어디서 잡았네?”
“봉개동 인민무장해방군 훈련장이란 곳에서 잡았습네다. 숲속에서 낮잠 자고 있더마요.”
무엇을 묻고 따질 필요도 없었다. 최동칠 경위에게 넘겨야 한다. 최 경위는 요근래 실적이 부진하다고 입을 쩝쩝 다셨다. 어느날 최동칠이 경찰서를 찾은 구대구를 복도 밖으로 불러세웠다.
“폭도놈들 잡는 족족 인계하라우. 승진해야 하지 않갔니? 구 동지도 경찰복 입어야 하구 말이다. 정 안되면 민간인이라도... 알겠지?”
그 말을 듣고 구대구는 활동을 폈는데 좀처럼 잡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보아하니 대물을 잡아들였다. 피스톨을 휴대했다면 적장급이 될 것이다. 구대구는 사내를 경찰서로 압송했다. 사내를 인계하자 최동칠이 반색을 했다.
“신분 확실하니?”
“자백 받아내는 게 최 경위님 특기 아닙네까? 김달삼을 만들어도 되구, 현호진을 만들어도 되구, 이덕구를 만들어도 되구, 조덕구를 만들어도 되지요. 이덕구는 네 명이나 되니깐요.”
최경위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말고 돌아가라우.”
더 이상 말이 없는 게 구대구는 섭섭했지만 나중을 기약하고 그대로 경찰서를 물러나왔다.
최동칠은 사내를 취조실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다소 위압감을 느꼈다. 어깨가 딱 벌어져 있었다. 잡아끌어도 억지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 버티기도 했다. 어라, 이 새끼 봐라... 그는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족쇄도 채워버렸다.
촉수낮은 전등불 아래 바닥은 물이 흥건하고, 구정물이 가득 들어있는 드럼통 두 개가 귀퉁이에 세워져있고, 철제의자와 철제 책상이 가운데 놓여있었다. 유사한 방이 몇 개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다른 쪽 방에서 아악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숨넘어가는 소리였다. 그쪽 방에서 수사관인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악을 해도 끝났어. 다른 방에서 니 동지가 벌써 불었어, 자식아!”
“자, 우리도 시작해볼까.”
최동칠이 사내가 휴대했다는 전단지와 낡은 피스톨과 단도를 책상에 올려놓고 말했다.
“이름이 뭔가.”
“현가요.”
“현호진이란 말이지?”
“현호진이 누구요?”
사내가 반문했다.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하디. 개호로새끼야, 나를 개좆으로 보니? 너 일본 갔다 왔지?“
“그렇소. 중국에도 있었소.”
“일본 중국에서 왔으면 됐지, 무슨 잔 말이 많아. 어이 현가, 폭도대엔 왜 들어갔니?”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모욕을 당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거긴 농투서니들 집합소야. 하긴 펜대 굴린 놈들이 악성분자가 더 많디. 온통 빨갱이들이니까니. 꼴을 보니 넌 먹물 좀 먹은 것 같군. 좆같은 놈, 안그레네?”
“예의를 지키시오.”
“빨갱이에게 예의가 이서?”
“난 빨갱이가 아니지만, 빨갱이에게도 그렇게 대하면 안되오.”
“어라, 이 새끼 봐라. 뚫린 입이라고 놀려대는군. 끝까지 가나 보자.”
생각보다 배짱있고 강성이라고 생각되자 최동칠은 조금 위축되었다. 그는 노획한 피스톨을 집어들어 만지작거리다가 사내에게 겨눠본 뒤 구겨진 전단지를 펴서 읽기 시작했다.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 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한참 지난 사건 개지구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이딴 걸 품고 다니네? 그래, 빨갱이들, 해방되자마자 지 세상 만났다구 완장차고 난리 춤 추었지? 남로당과 합세해서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네? 남로당과 함께 경찰서를 습격하지 않았네? 남로당 남로당 남로당!”
“남로당이 뭐요? 노인당이오?”
“어라, 이 새끼 봐라.”
“없는 남로당 얘기 그만 하시오.”
“야, 이 새끼야, 이 권총으로 우리 경찰 몇 명이나 쏴죽였니? 경찰이 미제 식인종에 붙어먹는 주구라면서 쏘았지? 친일경찰이라고 쏘았지? 그래놓고도 살기를 바라네? 이 개새끼야!”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고스란히 견뎠다. 이쪽이 겁먹을 정도로 의연한 자세였다. 그러나 전단지와 피스톨과 단도를 증거물로 압수했기 때문에 뛰어봐야 벼룩이다. 최동칠은 그가 현호진이든 아니든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물증이 나온 이상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남로당이 노인당 이름이냐고?”
최동칠은 생각할수록 성질이 뻗쳤다.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앙갚음할 게 없나 궁리하다가 책상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시위 행렬이 합법적으로 감행하지 못할 시 당 독자적으로 행동을 감행한다’. 오호 그렇군. 이 말은 경찰이 막든 막지 못하든 우리는 우리식대로 강행한다는 뜻 아니가. 군정을 무력화시키려는 남로당 행동 강령이란 말이다. 그렇지? 또 이렇게 씌어있군.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들을 응징하라. 행동 대 행동, 실력 대 실력이 협상력을 제고시킨다’”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미군정은 사회단체. 정치 결사체를 인정하지 않소?”
“니들은 유리한 것만 달달 외누만? 남로당의 불법활동을 막는 것이 우리 임무 아니가. 경찰이 대갈박을 선반에 올려놓고 다니네?”
최동칠이 다시 서류철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남로당은 전위조직인 도, 읍, 면 민주청년동맹 조직을 완료했고, 남로당 전위조직인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스탈린과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 유영준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과연 그렇군. 그리고 파업, 파괴, 습격, 폭력, 납치, 린치...”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우익청년단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사안들이었다.
“나와는 무관하오. 그건 당신들이 탄압하려는 수법으로 뒤집어씌운 혐의들이요.”
“니들을 늘 그렇게 말하디. 그러니까니 니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거디? 그러니 네놈들이 우리를 불러모으게 한 책임이 있단 말이다. 근본 책임은 남로당 놈들에게 있다 이 말이디. 고런데 우리더러 물러가라고? 제주 땅이 느그가 불하받은 적산 토지냐? 너 도대체 누구냐.”
“나는 만주독립군 출신이오.”
만주독립군이란 말은 생소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처음 듣는 군대 이름이군. 어느 군대라구?”
“조선의용군이오.”
“별놈에 군대도 다 있군. 거기서 뭘했소?”
그제서야 최동칠이 말버릇을 고쳐서 물었다. 사내가 계속 의연해서 최동칠은 조금은 쫄았다.
“타이항산 일대에서 후자좡전투(1941.12), 싱타이전투(1941.12), 폔청전투(1942.5)를 벌이다가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면서 정탐병으로 근무했소. 조선의용군 김원봉, 무정, 김두봉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소.”
“그들이 어떤 자들이오?”
사내가 픽 웃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현씨, 비웃나?”
“비웃는 것이 아니오. 답답해서 그러오.”
“그래서 웃는다? 좋다. 몇개 더 묻고 진행하갔다. 거기서 무슨 활동을 했나?”
“조선의용대의 세 가지 범주 내에서 활동했소. 첫째 전지 공작이란 게 있는데, 일본군 점령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서 활동하는 초모활동·선전활동·정보활동이오. 둘째는 군사교육과 사상교육을 하오. 셋째는 생산활동이오. 전우들이 밭을 일구어 직접 농산물을 생산하는 보급투쟁이오. 나는 두 번째 세 번째 일을 했는데, 일본이 패망하자 충칭에서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들어왔소. 그리고 소련군에 체포되어 무장해제 됐소. 내 나라에 들어와서 무장해제 당하는 수모를 겪었소. 나는 그들 초병을 패주고 맨 몸으로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왔고, 거기서 또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와서, 사흘만에 제주 들어오는 객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소.”
“참 멀리도 갔다 왔다. 다시 묻갔다. 중국 조선의용군이 무슨 군댄가?”
“왜병 잡는 일이지 무슨 일이겠소. 왜병 잡는 데는 중국군보다 조선의용군이 훨씬 무력이 뛰어났소.”
“이 새끼들은 자나깨나 일본군을 무슨 철천지 원수로 알고 있대니까. 묘한 종자들이야.”
“그게 말이라고 하나?” 사내가 버럭 화를 냈다. “같은 민족으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민족, 민족 하지 말라우. 너만 민족이니? 고렇지. 흥분하면 안되지. 그럼 왜 폭도대에 가담했니?”
“그럼 당신은 왜 친일경찰이 되었나?”
“빨갱이 새끼들은 이렇게 이분법적이야. 사람이 없는데, 치안유지 인력은 그 뿐이었잖네? 행정공백을 메우려면 옛 관리들이 다시 나설 수밖에 없는 거구 말이다. 문맹율이 80%가 넘는다.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래두 관리들은 문서를 만지작거리지 않네?”
“영혼의 문제지. 우리는 경찰이 아니라 건국치안대로 국내 치안을 맡을 수 있었소.”
“고따우 군벌 새끼들 개지구 뭘 하자는 기야? 비적떼들이지.”
“그러니 당신들은 안된다는 것이오.”
“이 새끼들은 선악 이분법밖에 모른단 말이야. 어쩔 수 없는 것도 부정한단 말이야.”
“당신들은 자주와 평화와 공평과 정의라는 상상력을 모르는군.”
“내가 어뜨렇게 경찰이 되었다고 보니? 너희놈들 때문이 아니갔나?”
그는 사실 경찰조직에 참여하리라고는 해방될 때까지 꿈도 꾸지 못했다. 민족자주 어떠니 하는 놈들 때문에 얻은 자리였다. 해방공간은 여러 가지 행운을 안겨다주는 무대였다. 평안도 말단 경찰이 여기 내려와서 고급경찰 명함을 달고 다닌다. 남한은 기회의 땅이다. 사내가 꾸짖듯이 말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착한 백성을 탄압하는 것은 왜놈들이 가르친 나쁜 습관이오.”
“그렇게 사물을 보니 인생이 해결되니? 말 많으면 공산당이란 말이 맞군. 김일서이가 너네 시조 어른인가? 삐라를 보니 김일성 장군을 내세웠닪아!”
“여러 사람 이름 올려놓은 것 중 하나요. 그들 이름을 갖다 붙인 건 단체의 위세를 내세우고자 올려놓은 것이오.”
“명칭을 도용하고 사칭했다 이 말이디? 고럼 더 나쁘디. 남의 문패 훔쳐다 다는 개도적놈들이 어디 이서? 빨갱이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지. 여기 있는 서류가 다 말해주는 기야. 서류는 근거주의의 기본이란 것 몰라? 먹물 좀 먹은 것 같은데 사리분별은 하갔지? 남로당중앙 지령에 따라 ‘혁명과업 담당 세력은 지주,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혁명적인 노동자, 농민계급임을 선전하라’. 이 주장은 김일서이가 지령하는 조국 건설 방향의 기본이지.”
“히로히토에 충성하지 마시오. 그가 분탕질한 뒤 패망하자 몸만 빼 사라지고, 대신 남은 자들이 다시 나라를 분탕질하는데, 빌붙었던 자들이 제국주의 불씨를 살린다는 게 망신스럽지 않소?”
“하여간에 너희 종자들은 물고 늘어지는 데는 선수지. 악질 놈들.”
“내 분명히 말해두겠소. 일제 식민지 중 조선이 가장 참혹하게 당했소. 왜 그러는지 아시오? 당신과 같은 동족이 동족을 밟았기 때문이오. 일본놈들이 항복하고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빠져나간 사이, 당신들은 미제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 다시 역사를 비틀고 있소. 역사는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서 왜곡ᐧ날조돼가고 있소. 그러니 지금의 역사는 99%가 가짜요.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당신들이 우리의 찬란한 독립운동 투쟁의 성과물들을 모조리 무화시켜버렸소. 잘 알다시피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은 위대하오.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중국에서 풍찬노숙하며 견뎌냈던 힘은 오로지 나라의 독립이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소.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갑산전투에서 일본군을 타격한 목적은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자는 처절한 열망 때문이었소. 일본군은 수십 배의 화력으로 독립군을 도운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어도 살아남은 자는 다시 결집해서 항일독립군을 위해 신새벽에 주먹밥을 준비하고, 옷과 신발을 제공했소. 그들의 이런 헌신으로 항일투쟁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중국군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룩한 우리의 저력이오. 중국 인민은 중국군대나 일본군대나 똑같은 비적떼로 보고, 일본군이 쳐들어와도 그놈이 그놈이다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형편이었소. 하지만 조선 사람은 그렇게 당하고도 항일독립군에게 밀떡, 미숫가루를 빻아 제공하고,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러면서 체포되어 고문받고 처형되었소. 이런 도덕적 순결성은 조선민족만이 가진 자산이오(이상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강연 일부 발췌). 그런데 당신들은?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대들은 그때 어디 있었소? 지금 제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보고, 역시 못된 버릇은 버리지 못하는구나 하는 슬픔으로 내가 통곡하고 싶소이다.”
“도대체 너의 정체가 뭐냐?”
“제주도가 고향인 사람이오.”
“그러면 통곡 많이 하라우. 고래서 어쨌단 말이가?”
사내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분단을 즐기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성과들을 당신들이 밟고 있소. 찬란한 독립운동사의 결말이 이런 식으로 사라져서야 되겠소? 허무하지 않소? 우리가 과연 독립했소? 발가락이 하나 다쳐도 통증으로 제대로 설 수 없는데, 몸통의 가운데를 토막내버렸는데 홀로 섰다고 말할 수 있소? 분단이라는 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소? 일본이 물러나자 그 빈 자리에 세워야 할 것을 못세우고 생뚱맞은 이념 대립에 에너지를 소진하니 전범국가 왜놈이 벌써 희희낙락하고 있잖소. 보다시피 이건 좌우대립이 아니오. 일제의 분열 정책을 좌우 대립으로 치환했을 뿐이오. 이 상태로 가면 필히 전쟁이 날 거요. 좌우 대립이라는 허깨비 명패를 달고 삼천리 강토를 도륙할 거요. 우리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는 사이 일본은 국방비 한푼 쓰지 않고 건설에 매진할 거요. 그들은 우리가 강대해져서 복수할 것이 두려웠는데, 우리가 내전을 치르면서 국력이 쇠진해지자 내놓고 조롱하면서 전쟁폐허를 딛고 일어선단 말이오. 그들이 똥 싸지르고 간 한반도를 미국이 떠맡고, 미국은 또 세계전략의 실험장으로 한반도를 이용하고 있소. 미국이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힘이 약한 소련 정도는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고, 분단도 극복할 수 있소. 그런데 냉전의 실험장으로 끌고 가고 있소. 미 군산복합체와 곡물산업과 석유메이저들이 세계 지배의 장난을 치고 있소. 그런데도 우리는 맹인이 되어있소. 이익 앞에 무력해지는 당신들을 보면서 찌르는 듯한 아픔에 내가 견딜 수가 없소.”
“공산당은 역시 이론이 많아.”
최동칠이 비웃는 얼굴로 두 손을 높이 쳐들어 짝짝짝 박수를 쳤다.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많지만 유독 일본이 지배한 나라들은 한결같이 내전을 치르고 있소. 왜 그런가. 일제가 그들 통치하기 좋게 내부를 찢어놓았기 때문이오. 친일 기득권층과 수탈당한 민중,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거기에 좌우 색깔론을 끼워 넣은 것이오. 이렇게 분열시켜 놓으면 참으로 통치하기가 쉽지.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 자기들은 손 안대고 코를 푸니까 말이오. 지금 일본이 패망하니 일본을 추종했던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별별 수작을 다 벌이고 있소. 일제 학습 그대로 주민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고, 또다른 외세에 빌붙어 온갖 대중조작적 프로파간다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소. 이런 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일본놈 물리치는 것보다 더 험난한 길이오. 왜냐하면 이것들은 또 재빨리 변신해 강자에 빌붙기 때문이오. 미국이란 나라는 세련되면서도 말 잘듣는 친일파가 경제적으로 지원까지 해주며 협력하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가. 일본이 저지른 짓과 똑같이 허깨비 같은 좌우 이념의 명패를 내걸어 민족정통성을 파괴하고, 또다시 식민지 역사를 써가고 있는 것이오. 일제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 중 한반도가 가장 처참하오. 중국, 대만, 인도차이나 어디를 보아도 조선반도처럼 분열된 나라는 없소. 네 토막된 오스트리아를 보시오. 나치 독일과 함께 전범국가가 된 오스트리아는 패망하자 미영소중이 10년간 신탁통치한다고 발표했소. 그러나 그들은 내부적 결속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이를 통합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소. 그들은 찢어놓는 것을 합치는 능력이 있고, 우리는 유리한 통합의 조건을 이민족보다 더한 증오로 갈갈이 찢고 있소. 제주도가 그 시험무대고, 당신들이 그 중심에 섰소.”
“고래서?”
“역사는 당대의 가치관이고, 망각과의 투쟁 과정이오. 권력자들은 잊으라고 하지만, 광포한 시대를 어떻게 잊겠소?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잊으라고? 어제의 범죄를 단죄하지 않으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준다고 어느 작가는 말했소. 잊지 말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고, 그래서 역사 발전의 증거로 삼아야 하오. 현대사일수록 허구가 많소. 눈앞의 진실도 힘 가진 자들이 비틀어버리기 때문이오. 우리는 지금 변형된 일제와의 내전을 피흘리며 다시금 치르고 있소.”
“복잡하게 말하지 말라우. 그 힘은 단순하디. 힘은 총구녕에서 나오디. 총구의 화력이 누가 더 세고, 누구에게 더 집중되어 있니? 헛 수작말구 당신 전향할 것을 명령한다. 보아하니 똑똑한 인간인 것 같은데, 그래서 봐준다. 이건 내 경찰 경력 최초의 일이다. 공산당에서 빠져 나오라우. 빠져나오면 당장 경찰 간부다. 지식적으로는 나보다두 위에 있다.”
“난 공산당이 아니오. 물귀신 같은 이념의 덫. 그것 말고는 잡아가둘 것이 없나? 생각이 바른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나? 일제가 만들어놓은 분열의 유전인자를 그대로 상속받을 것인가? 내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조작된 진실이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니오. 추악한 일본 하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오. 그 프레임에 갇힌 당신들을 보면 내가 슬프오.”
최동칠이 버럭 소리쳤다.
“슬퍼하지마 미친 새끼야. 내가 그렇게 말해두 못알아 듣갔나? 그런데두 니가 무슨 자격으루 날 슬퍼하니? 또라이 새끼구먼. 야, 제주도민 80%가 빨갱이거나 지원세력이란 걸 모르네?”
“그게 설사 맞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핍박받은 민중일 뿐이다.”
“고래, 육체는 영혼의 그릇이라고 했는데, 얼마나 고상하게 버티나 보자. 하지만 할 말은 하구 넘어가자. 이건 전국적으로 계획된 남로당의 정치투쟁이고, 제주도가 그중 가장 극렬하다. 조그만 섬에서 악랄하게 저항하며, 총파업을 단행하고 5.10선거를 반대했다. 경찰만 제외한 모든 기관, 제주도청, 각 면사무소, 금융조합, 학교, 시장 상가, 노동조합, 어촌계, 해녀조합 등 166개 기관단체 5만명이 총파업에 참가했고 말이다. 모두 빨갱이 세상이 되어서 미쳐 돌아가고 있디. 경찰도 무단이탈자가 66명이나 나왔다. 이놈들 중 상당수가 입산해버렸다.”
“그들이 왜 입산했나를 생각해보지 않았나?”
최동칠이 잠시 망설였다가 말했다.
“공산당은 입주뎅이로 망한다는 말이 틀림없군.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말해주디. 너희 폭도놈들이 중문지서에서 주민 시위 해산을 경고한 경찰관을 죽을만치 두둘겨 팼디. 경찰 부부를 대창으로 찔러죽였디. 어린아이를 시켜서 경찰관에게 침을 뱉도록 모욕했디. 불법 집회를 단속하는 경찰관을 습격해 폭행했디. 남원에서는 폭도에 쫓겨 바다에 뛰어든 경찰을 갈고리로 찍어내어 무자비하게 살해했디. 북촌리에서는 경찰관 2명을 개잡듯이 팼디. 공권력이 이렇게 개좆이 돼버린 기야. 그래도 잘했다는 거니?”
최동칠은 일부러 흥분을 끓어올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점잖게 말하갔다. 관등성명 대라우.“
“현호산이다.”
“획 하나 바꾼다고 똥개가 진돗개 되니? 해박한 걸 보니 넌 틀림없이 넌 현호진이다. 내 관할인 서청 정용팔 섭외부장 어떻게 했니? 그 자가 너네 집으로 간 뒤 행방불명이 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산에서 무슨 역할 했나? 너 산사람 아니가?”
“알려줄 수 없다.”
꼬장꼬장하게 대꾸한 것도 기분 나쁜데 여기서 또 버틴다. 곧바로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묶인 채 그는 딱딱 살에 잘 엉기튼 단단한 박달나무 몽둥이를 맞았다. 어깨를 맞고 어깻죽지가 무너졌다. 최동칠이 흥분하자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 바람에 그의 갈비뼈도 나갔다. 콧등이 뭉개지고 얼굴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졌다. 머리가 으깨지고, 이빨 석대가 옥수수 알처럼 뱉어져 나왔다. 이윽고 하얀 골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분이 안풀리는지 최동칠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쉣바닥 마구 놀리니 내가 돌아버리가서!”
그때 문이 열렸다. 경찰서장이었다.
“하여간에 최 경위는 용감무쌍해.”
최동칠이 하던 짓을 멈추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서장이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태워버리구, 혹 신원이 밝혀지면 분신자살자로 처리하게. 그리고 일곱시에 락희주점으로 오게. 모처럼 육지에서 어린 갈보들이 들어왔다네.”
죽은 자는 무슨 경위로 제주에 들어왔는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이 가장 어둡다
“똘똘한 네 놈만 차출하라우.”
구대구 부단장이 행동대 조장 김대골에게 지시했다. 대개는 수색대 비슷하게 두 명을 보내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 네 명을 차출했다. 김대골이 밖으로 나가고 구대구가 단장실을 찾았다.
“신촌리 쪽에서 붙을 것 같습니다. 경찰도 증파됐습니다.”
그는 서울 말씨로 보고했다.
“몇 놈이 나갈 건가.”
“네 명 차출했습니다.”
“더 충원해. 부단장이 직접 인솔하고.”
사진봉은 폭도들이 제주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열명 쯤이요?”
“열댓 명은 돼야지. 4개조로 나누어 저인망으로 훑어가. 오후엔 하도리 쪽에서 올라오는 하대칠 조직부장 조와 합류하구. 난 경찰서 들렀다가 부두로 나가갔다. 명분없는 짓은 하지 말고, 대신 복수할 놈은 과감히 응징해.”
“알갔습네다.”
“현호진 집도 살피라우. 단서가 있을 거야.”
“알갔습네다.”
“다시 강조하지만 불필요한 시빗거리에 휘말리지 말구 보복할 놈만 골라 똑부러지게 해.”
“알갔습네다.”
“알았으면 나가봐.”
그들은 경찰 트럭 두 대에 분승해 조천 방향으로 달렸다. 구대구는 사진봉의 지시가 마땅치 않았다. 지시가 불확실하다. 시빗거리가 붙지 않도록 하되 복수할 놈은 응징하라. 그 기준이 모호했다. 타격기준이 불명확하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너희들 마을에 들어가면 반항하는 자는 조진다. 알갔나?”
고르지 못한 도로 때문에 트럭은 덜커덩거렸지만 구대구는 목소리 높여 외쳤다. 그는 신촌리 쪽으로 대원들을 들여보내고 대원 셋을 데리고 현호진의 집으로 갔다.
“샅샅이 뒤지라.”
구대구는 마당으로 들어서서 대문 곁에 붙어있는 헛간을 살폈다. 똥통은 갑각류처럼 마른 똥이 표면에 깔려있고, 그 위로 먼지가 뿌옇게 앉은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사용치 않은 것으로 보였다. 밥을 지은 지도 오래인 듯 재들도 쌓여서 굳어있었다. 한 대원이 골방에서 C레이션 박스와 먹다 버린 귤껍질, 카라멜 따위를 발견했다. 다른 대원이 소리쳤다.
“미제 팬티다!”
일행들이 우루루 골방으로 몰려들어갔다. 구대구가 팬티를 손가락 집게로 들어올려 살펴보더니 개새끼, 하고 욕을 퍼부었다.
“정용팔, 이 자가 또 녀성 하나 따먹었구레?”
그러나 노상 하던 짓이라 구대구는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대원들이 광으로 들어갔다. 보리 썩는 냄새와 함께 음산하고 귀기서린 분위기가 확 끼쳐들었다.
“뭔가 이상합네다.”
“무슨 냄새네? 헤집어봐.”
뒤따르는 대원들이 마루 바닥에 널려있는 보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보리를 말리기 위해 널어놓기만 했을 뿐, 그동안 뒤집지 않아서 손으로 헤칠 때마다 먼지와 함께 곰팡내같은 썩은 냄새가 역하게 풍겨져 나왔다.
“보리 썩는 냄새가 왜 이렇게 독하네?”
구대구가 코로 흠흠 하다가 한 손으로 코끝을 눌러 막았다. 광 바닥을 헤집었으나 냄새는 더 역하게 풍겨나왔다.
“안방 살피고 나오라우.”
구대구는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지 별다른 의심없이 이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안방으로 나온 대원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송판 농을 군화발로 걷어차 부수고, 여자의 옷과 남자의 옷이 가지런히 포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외 특별히 의심할만한 것은 없었다.
“생각보다 맑습네다.”
“철수한다.”
그가 명령하자 대원들은 헝클어놓은 집기들을 대충 정리하고 집을 나왔다.
“김갑칠과 장풍선이가 교대로 이 집 잠복 근무하라우. 깨림칙한 게 있다.”
무언가 튀어나올 것같은 분위기가 구대구의 뒤통수를 땅기고 있었다.
그들이 신촌리에 당도했을 때, 비석거리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 곁에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저 간나새끼가 토끼다가 잡혔소.”
구대구 일행이 다가가자 미리 와있던 하대칠이 상황을 설명했다. 구대구가 나뭇단 위에 올라가 모여있는 주민을 향해 소리쳤다.
“어젯밤 폭도들에게 식량과 옷, 삽과 곡괭이, 대창을 갖다 준 자 나오라우! 다서이 셀 때까지 나오라우. 안나오면 가만 안둡네다.”
그는 정보를 다 알고 있다는 듯 건너짚고 협박했다. 그러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괜한 사람 잡게 하디 말구 정직하게 나오라우.”
그는 둘러앉은 마을 주민을 눈으로 샅샅이 훑으며 본보기로 후려칠 자를 골랐다.
“여러분, 이승만 박사가 뭐라시는 줄 아네? 사상이 건전한 서북청년회야말로 애국의 보루이다조국의 들보이다! 라고 하셨디. 그리구 제주 파견을 극렬히 독려하셨디. 우리가 고저 아무 대거리없이 왔는 줄 아네? 이승만 박사의 명을 받들고 빨갱이를 잡고자 온 거디. 내 말 알가서? 지금부터 다서이를 세겠다. 고때까지 안나오면 어뜨렇게 되나 보자우. 하낫 둘 서이 너이...”
그러면서 그는 한 사내를 발견하고 다서이! 하고 숫자를 딱 마무리 했다.
“너 일루 나와.”
지목된 사내가 쭈볏거렸다.
“나오라우!”
그래도 사내는 주춤거렸다.
“끌고 나오라우!”
대원들이 우루루 몰려가 청년의 양 팔목을 잡아비틀어 앞으로 끌고 나왔다.
“바로 서라우.”
그가 바로 섰다.
“니 마누라 이름이 을순 어멍 아니네?”
사내가 어설프게 머리를 저었다.
“아 어멍 여기 있네?”
“집에 있습니다.”
“김대골! 가서 끌고 나오라우.”
김대골이 대원 두 명을 이끌고 마을 안으로 몰려가더니 잠시후 여인을 끌고 왔다. 여인이라기보다 십대로 보이는 소녀 모습이었다. 구대구 앞에 여자가 서자 을순 어멍이가? 하고 그가 물었다. 여자가 몸을 떨면서 고개를 젓는 듯 마는 듯했다.
“너 정용팔 섭외부장 만났네, 안만났네?”
여자가 놀라는 빛을 보였다.
“빨리 말하라우. 다 알고 와서. 정용팔이 신촌리 을순 어멍이랑 붙은 얘기를 자주 했디. 남편은 스물한 살이고, 여자는 열여덟이라고 했디. 벌써 딸 하나를 낳은 여자인데 속궁합이 그만이었다고 늘어지게 자랑했디. 당신, 정용팔 부장 언제 보았네?”
그녀가 그녀의 남편을 보며 쭈볏거렸다.
“빨리 말하라우. 정용팔 부장과 통간한 거이 고렇게두 챙피하네?”
그러자 남편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간나새끼, 여자 하나 간수 못하구, 눈깔 까뒤집긴?”
구대구가 청년의 샅을 걷어찼다. 청년은 두 손으로 샅을 감싸며 허리를 구부렸다.
“빨리 말하라우.”
“그런 사람 몰라요.”
“쌍간나 년! 통간하구도 모른다구? 내 그럴 줄 알았디. 당연히 모른다구 하갔지. 그럼 넌 모르네?”
구대구가 그 남편에게 물었다. 순간 남편이 그의 아내 뺨을 갈겼다. 구대구가 다가서며 막았다.
“이 새끼 왜 때리누? 외간남자 만났다구 조지네? 이 자 버릇부터 고쳐 놓으라우.”
대원들이 달려들어서 각목으로 청년을 늑신하게 팼다. 그의 아내가 쓰러진 남편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못된 놈들아, 나도 남편도 죄가 없다. 이게 무슨 짓이냐. 짐승같은 놈들, 벼락맞아 뒈져라!”
“우리가 짐승이란다. 저 년도 손봐라.”
그녀에게도 닥치는대로 각목이 떨어지고 발길질이 이어졌다. 두 젊은 부부가 늘어진 사이 재빠르게 숲으로 도망가는 남자가 있었다.
“저 자 잡으라!”
남자는 순식간에 숲속으로 사라졌다.
“날레 잡아오라우.”
대원들이 숲속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한참만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끌고 왔다.
“반동새끼, 왜 도망가네? 숨는 자가 범인이디. 너 폭도들에게 식량 얼마나 퍼주었넹?”
“안퍼줬습니다.”
피를 흘린 채로 남자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비굴할수록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왜 도망가니? 안퍼줬음 그만이디, 왜 도망을 가니?”
사내는 여러 가지 위협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도망을 간 것이었다.
“밤새 새네끼를 꼬았습니다.”
“새끼 꼰다고 식량 못퍼주네? 저 남정네 모셔 오구레.”
구대구가 사람들 가운데 키가 큰 남자를 손가락질하자 대원들이 달려가 그를 끌고 나왔다.
“이 자 폭도대에 식량 갖다 줬네, 안갖다 줬네? 증인 서라우.”
“나는 모릅니다.”
“이 새끼들은 한결같이 모른다는 기 답이야!”
구대구가 경찰봉으로 그의 허리를 갈겼다.
“이놈 조지라우!”
그와 동시에 대원들이 달려들어 그도 늑신하게 팼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으켜 세우라우.”
그가 부축을 받아 서지만 다시 고꾸라졌다. 구대구가 고꾸라진 사내를 노려보며 물었다.
“저 자가 폭도들에게 식량 갖다 주는 거 봤네 안봤네?”
그가 공포스런 얼굴로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
“간나 새끼들, 얻어터져야 제대로 분단 말이다. 저승맛을 보아야 사실을 실토한단 말이다. 비겁한 놈, 조지라우!”
한 대원이 대검으로 그의 복부를 찔렀다. 그는 하얗게 눈을 까뒤집은 채 숨을 거두었다. 주민들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현실같지 않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너희 놈들이 가장 악질 반동분자들이란 말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울부짖었던 말을 다시 퍼부었다. 그가 길바닥에 나자빠져 뻗어있는 청년의 바지를 와락 잡아챘다. 그의 옷이 허물 벗듯 벗겨졌다.
“더러운 놈, 사루마다 좀 빨아 입으라우. 고약한 냄새에 이렇게 지저분해개지구, 이렇게 비위생적으루 살면 마누라가 좋아하갔나?”
구대구가 그의 꾀죄죄한 팬티에 침을 칵 뱉었다. 뒤이어 주민들을 일렬로 세운 뒤 해안선으로 내려보냈다. 대원들이 집총을 하고, 일부는 각목을 든 채 언덕을 내려가는 주민들을 감시했다. 김대골이 앞서 걷고 주민들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들 뒤에는 다른 대원이 집총을 한 채 따라붙었다. 그들의 행렬은 흡사 검은 죽음의 주로(走路)처럼 보였다. 그들이 해안선에 당도했을 즈음 구대구가 남은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소각하라우.”
대원들이 우루루 마을로 들어가 짚덤불에 불을 붙여 초가지붕에 던지자 삽시간에 불이 붙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길은 걷잡을 새 없이 치솟아 올랐다. 해안선으로 내려가던 주민들이 불타는 마을을 보더니 아우성치며 언덕으로 올라왔다.
“아유, 이를 어째, 우리집이 탄다, 우리 아기, 우리 양식...”
“이게 무슨 난리우까. 오, 하느님, 이것이 무슨 난리이우까.”
그들이 소리 지르며 마을로 몰려오자 대원들이 오는 족족 각목으로 내리치고 죽창을 휘둘렀다. 구대구가 권총을 뽑아들어 허공에 대고 마구 쏘아댔다.

같은 시각, 남원면에서는 경찰 가족이 무장자위대에 끌려 나왔다. 노인과 경찰관 부인이었다. 무장대 네 명이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다.
“제주도 본토 놈이 양민을 폭도라고 밀고해?”
“시키는 일을 어떡하겠나.”
노인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당신 아들이 경찰이라고 세상 겁나는 게 없소?”
“동네 소식이 무슨 기밀이 있나. 내가 밀고한 건 아닐세. 다 아는걸.”
“당신 아들 때문에 주민 두 사람이 끌려가 죽었단 말이다.”
그제서야 노인이 입을 다물었다.
“소개령 내린 것 알고 있었소, 몰랐소?”
“몰랐네.”
“거짓말 말아! 당신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미리 가재도구를 빼내가지고 안전지역으로 피신했잖아!”
“어떻게 나만 살림 빼돌리고 했겠나. 알았다면 진작에 말해주지.”
그들은 서로 이웃마을에 살았다. 하지만 경찰가족과 우익이라는 인사의 집은 안전했다. 불태워진 집도 없었으나 탔더라도 불티가 옮겨붙어 탄 것이었다. 살림과 가재도구를 빼낸 다음이었다. 제주읍내로 이주한 노인은 며느리와 함께 잔여 물건을 챙기러 마을로 들어갔다가 무장대에게 붙들렸다.
“당신, 성산포 주정 공장에서 일어난 사건 알고 있소?”
“알고 있지.” 노인이 말했다. “그거야 서청 놈들이 한 짓 아닌가.”
“경찰 비호 아래 그런 짓이 벌어졌단 말이오. 제주 출신 경찰은 동원되지 않았지만 당신 아들새끼만 주민 사냥에 나섰단 말이오!”
“명령 때문에 동원된 거지, 어쩔 도리가 없잖나.”
“영감탱이야, 다른 경찰은 도망 갔잖나! 거기에도 애국 경찰이 있다니까!”
주정 공장 창고에서는 서청 단원들이 인근 부녀자와 처녀들을 모아 집단 겁탈했다. 일부 대원들은 여자 음부에 고구마를 쑤셔박았다고 했다. 주정공장은 경찰이 접수해 무기 제조하는 조병창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 못된 짓한 걸 몰랐다는 거요?”
“어허, 세상 말세로세. 가당치도 않네.”
“당신 며느리도 우리가 그렇게 해줄까?”
그 말을 듣고 경찰관의 젊은 아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덱기 천벌 받을 놈들!”
노인이 소리쳤다.
“경찰 놈들과 서청 놈들이 하던 식대로 해주마.”
“못된 놈들. 니놈들이 누구 자식인 줄 내 안다.”
그러자 한 무장대원이 노인의 턱을 갈겼다.
“너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 새끼야, 토벌대 놈들이 양민들 모아놓고 시아버지가 며느리 배를 올라타게 하고, 부모가 총맞아 쓰러질 때 아이더러 만세 부르라고 하고, 죽은 아버지 앞에서 박수치게 했단 거 몰라? 생사람에게 돌을 매달아 물골에 쳐박은 것 몰라? 그것이 서청 놈들, 경찰 놈들, 우익놈들이 저지른 짓이야!”
“내 아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노인이 가슴을 쥐고 쓰러졌다. 한 무장대원이 권총을 뽑아들어 노인의 가슴을 겨눠 쏘아버린 것이다. 노인의 며느리가 눈을 까뒤집은 채 죽은 노인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천벌 받을 놈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 시아버지는 너희놈들을 위해서 빨갱이 명단을 불에 태워버린 분이다! 남편이 너희놈들 보호해주다가 상관한테 맞아서 귀머거리 병신이 돼버렸다, 이놈들아! 이 천벌 받을 놈들아,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 살려내! 아아악!”
이윽고 여인이 입에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었다. 날이 밝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만, 휴전 직전의 제주도는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날이 밝더라도 그 상흔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암담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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